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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다큐스페셜 <오늘도 힘든 당신-번아웃>의 방영(2014.6.30) 이후, 번아웃(Burn Out)증후군 혹은 소진증후군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으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인 번아웃 증후군.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 중에서 무력감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유독 근무시간이 긴 한국의 직장인과 과중한 공부압박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물론 가정주부들도 그에 못지 않은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열심히 하지 않는다' 혹은 '의지가 없다'라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자책하던 많은 사람들은 '증후군'이라는 진단에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질병이고,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환자이므로 타인과 자신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권하는 번아웃 증후군의 예방법과 해결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생활습관을 바꿔서 삶의 여유를 갖는다', '대화와 공감을 통해 타인과 소통한다', '일과 삶의 가치를 찾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이 아닌가?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던 단어, '힐링'의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힐링, 명상, 내려놓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처방하며 그 병세를 완화시키고자 애쓰고 있었다. 적절한 처방으로 효과를 본 사람도 있었겠으나, 근본적인 원인 분석없이는 방송 이후 자신의 상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처럼 불안감만 커질 뿐이다.

MBC 다큐스페셜은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을 '과도한 업무'로 보았다. 장기간의 업무, 지속적인 긴장감과 스트레스, 막중한 부담감이 원인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과도한 업무가 번아웃증후군을 만드는가? 우리는 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가?

'성과사회'가 만든 번아웃증후군

한병철 지음/ 문학과 지성사/ 2012.03.05
▲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문학과 지성사/ 2012.03.05
ⓒ 김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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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21세기는 '성과사회'라고 말한다. 성과사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개인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벽에 부딪혀 '우울한 한탄'에 빠지고 있다.(p.28) 규율사회에서 복종의 위치에 있던 개인이 규제를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있다. 역설적인 자유가 병리적으로 표출된 것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번아웃증후군)과 같은 심리적 질병인 것이다.(p.29) 

성과사회가 점차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고(p.65) 지적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각종 에너지음료 소비가 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경향상제나 각성제를 복용하는 학생들의 사례도 계속 늘고 있다. 심리적으로는 할수 있다라고 설득하고, 기술적으로는 각종 멀티태스킹 기기들이 등장하고, 신체적인 능력까지 약물로 향상 시켜주며 성과사회는 우리를 쥐어짜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긍정성 과잉에 대항하는 '부정성'이 인간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 줄 것이라는 헤겔(p.52)의 말을 인용한다. 부정성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p.53)이며, 사색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확인한다.(p.73)

휴식도 나를 소진시킨다

성과를 위해 달려가는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잠시라도 멈춰서 '하지 않고', 지금을 돌아보는 사색과 놀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유, 휴식, 명상 등, 앞서 번아웃 증후군의 예방법으로 제시한 것과 동일한 처방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한 의욕저하나 무기력이 아니라 일종의 '질병'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증상의 원인을 깊이 살펴보는 여유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빠른 치료를 위해 다음 단계로 직행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숙면을 취해야 한다면서 침구류를,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면서 아로마 제품을, 휴식을 권한다면서 여행상품을 소개하는 기사와 게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실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유는 번아웃증후군 예방법 뿐만 아니라 힐링에서, 인문학에서, 예술문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들어왔지만 그저 말뿐이다.

조기교육의 역효과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놀게'하겠다면서 '놀이학원', '놀이학교'를 찾고 있다. 인문학의 가치가 '소문'나자, 한때 '힐링'이 그랬듯이 '인문학'은 상품처럼 유행을 타고 있다. 번아웃 증후군을 치료를 위한 과정에서도 최대한의 성과를 뽑아내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귀를 기울인다. 모모처럼

미하엘 엔데/ 비룡소/ 1999.02.09
▲ <모모> 미하엘 엔데/ 비룡소/ 1999.02.09
ⓒ 김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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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면, 일단 멈춰야 한다. 그렇다고 당장 일을 때려치우고 산으로 바다로 명상을 떠나야 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처럼 멈춰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시나 산으로 떠났다고해도,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TV나 스마트폰에 귀기울이던 일상의 탈진상태 휴식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모는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 내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시간을 빼앗으러 온 회색신사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그가 시간도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회색신사의 말에 홀려, 최대의 성과를 내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은 일은 물론 휴식까지도 성과를 내면서 몰두하는 우리처럼 소진되고 고갈되어 결국은 병에 걸리게 된다.

"그 병은 어떤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 게야.[...] 점점 악화되는 게지. 그 사람은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된단다. 그 다음에는 그런 감정마저 서서히 사라져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 무관심해지고, 잿빛이 되는거야.[...]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란다."(p.329)


판타지와 동화의 형식으로 <모모>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도 '견딜 수 없는 지루함'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센 성과사회의 흐름에 맞선 멈춤의 시간이다. 과중한 업무로 인해 몸이 피곤한 것인지,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인지,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낀 것인지, 일 자체의 의미를 잃은 것인지 멈춰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명상, 취미, 힐링, 인문학,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상관없다.

'너'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학생과 선생, 기업과 노동자, 국민과 정부. 소통이 없고 교감이 없는 것은 서로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아, 교육, 입시, 취업, 경제, 정치, 어디 하나 뚜렷한 대책이 없는 답답한 사회에 대해 사색하는 것도 귀찮고 골치아프다. 성급하게 '치료'한다고 해도 결국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성과사회의 물결에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잠시라도 멍하니 멈춰서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나와 너의 목소리를 찾아서, 온전히 증상을 듣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회색신사의 정체까지 꿰뚫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우주와 소우주에 귀를 기울이는 모모의 모습을 소개해 본다.

"모모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있는 옛 원형극장의 둥근 마당에 혼자 앉아 거대한 정적의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곤 했다. 그러면 모모는 별들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거대한 귓바퀴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나직하지만 웅장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밤이면 모모는 유난히 예쁜 꿈을 꾸었다.

아직도 귀기울여 듣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모만큼 잘 할 수 있는지 한번 직접 시도해 보길 바란다."(p.32)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kyoo711에도 게재.
<모모> 천천히읽기 북클럽을 진행중인 네이버카페에도 게재 예정.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2012)


태그:#번아웃증후군, #피로사회, #모모, #성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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