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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수 전 주무관의 자기 고백록 <블루게이트>
▲ <블루게이트> 책 표지 장진수 전 주무관의 자기 고백록 <블루게이트>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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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민간인 불법사찰 파문을 아직도 기억한다. 청와대가 전방위로 개입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정권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민간인들을 불법으로 사찰하고 그 증거를 인멸했다.

MBC <PD수첩>의 보도에 이은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는 정권 말기에 접어든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입혔다.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지난 6월 출간된 <블루게이트>는 민간인 불법사찰과 그 증거인멸 사건을 폭로한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고백록이다.

저자인 장진수씨는 이 책에서 주요언론을 통해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낱낱이 풀어놓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혼란,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까지 보여준다. 그는 이 모든 부끄러움을 딛고 양심의 자유를 만끽하기에 이르는 절절한 승리의 드라마를 써내려간다.

이 책은 거대한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이 실명으로 언급된다. 저자는 그들과 나눈 대화를 구어체로 생생하게 옮겼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그 자신을 먼저 고발한다. 이 은밀한 고발서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권력기관의 구성원이었다. 처음에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문제점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점, 증거인멸죄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집단의 의사에 반해 진실을 말하지 못했던 것,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 속에서 검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던 선택까지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작은 의리와 큰 의리가 충돌할 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집단의 가치, 즉 의리가 작용하고 있다. 의리. 공자와 맹자의 '의'는 올바르고 마땅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 유학자들은 '이' 개념을 중요시했다. 이 '의'와 '리'가 결합하여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의리'가 나왔다. 의리는 본래 개인 간의 신의, 사회도덕질서로서의 도의, 국가에 대한 충의, 나라 사이의 신의 등 여러 개념을 포괄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단어들이 그렇듯, 이 말은 수백 년간 사용되며 본뜻이 이지러지고 뭉개졌다. 현재는 동일한 집단의 구성원 혹은 친구 사이에서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본래 의리는 그 적용범위에 따라 대의와 소의로 나눈다. 현재 쓰이는 뜻은 소의에 해당한다. 의리 사상은 대의와 소의가 충돌하는 경우 대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증거인멸과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저자는 소의, 즉 집단의 의리라는 개념과 본격적으로 마주한다. 그는 상사가 맡긴 일을 잘 수행하고자 했고, 재판과정에서 동료와 상사들을 배신하지 않으려 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그에게 의리라는 이름으로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킬 것을 강요했다.

검찰의 소환을 앞두고 조언을 구하는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전임자였던 김경동 주무관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의리란 게 있는데, 그걸 안 지키면 나중에 얼굴 보겠어요? 또 장 감사가 저 사람들까지 다 끌고 들어가면 결국 뒤를 돌봐줄 사람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잘 생각해서 하세요. 나도 예전에 종로구청에 있을 때 검찰수사를 받아봤어요. 나중에 조서 읽어보니까 이건 뭐 아주 난리더라구요. 서로 막 헐뜯고. 그때 내가 그 사람들 다 알아봤다니까.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의리를 지켰더라고요. 내가 그 사람하고는 아직도 연락을 해요." (165쪽)

저자에게 하드디스크 파기를 지시한 최종석 행정관은 그를 달래며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장 감사가 고생스럽더라도 좀 안고 가야 내가 밖에서 움직이면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윗분들이 메시지를 전달해서 검찰 수사 단계에서 별 일 없이 잘되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설령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뜻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장 감사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게 다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장 감사님 하나쯤은 나 혼자서도 책임질 수 있고요." (167쪽)

저들에겐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으로 진실을 차단하는 것이 의리였고, 사익에 앞서 공익과 대의를 말하는 것은 배신이었다. 이 대화에서 엿보이듯이 당시 구성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뭉쳐있는 폐쇄적인 집단 속에 있었다. 이런 집단 속에서 의리는 공익이나 대의와 배치되는 순간에서조차도 절대적인 가치로 기능한다. 이들에게 법과 양심, 공익과 대의는 너무 멀었고 자기들끼리의 작은 의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장진수 전 주무관도 무죄는 아니지만...

민간인불법사찰의 청와대 개입 의혹과 입막음용으로 전달된 5천만원 돈다발 사진을 공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이 지난 2012년 4월 5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 MB정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 민간인불법사찰의 청와대 개입 의혹과 입막음용으로 전달된 5천만원 돈다발 사진을 공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이 지난 2012년 4월 5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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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대의를 멀리하고 작은 의리를 가까이 한 것은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검은 돈을 받아 유용한 것에 대해서 그 선택을 몹시 후회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증거인멸 작업을 수행한 데 대해서는 그것이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고 상사의 요청을 성실히 수행한 것이라는 점을 수차례 강조한다. 언뜻 보기에 스스로의 책임을 덜고자 하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그의 심정도 이해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조직적 증거인멸행위에 도구적으로 이용된 것에 불과했고 증거인멸의 범의를 가진 공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죄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한 나라의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공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고 충직한 태도는 작은 의리에 해당한다. 공무원이란 모름지기 공익이라는 대의를 잘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직무다. 하드디스크의 파괴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요청을 받고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일을 처리했던 그의 모습에서 대의와 공익에 무관심한 이 나라의 수많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떠오른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큰 의리는 모르고 작은 의리만을 내세우는 사람들로 뒤덮여 있다. 대의를 모르고 소의만을 아는 이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집단의 의리가 집단을 벗어나 보편적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대의와 공익을 생각하는 이들은 배신자이며 고지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그러나 대의와 소의가 충돌할 때 대의를 따르는 것이 의리사상의 본질이며 이 시대의 보편적 정의와도 합치한다.

의리라는 단어가 그저 집단의 이기주의와 욕망을 포장하는 개념으로 쓰이는 오늘날, 우리는 작은 의리를 부수고 보다 넓은 정의를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대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알게 하는 이 책이 공직사회는 물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블루게이트> (장진수 씀 | 오마이북 | 2014.6. | 1만5000원)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goldstarsky)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블루게이트 -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의 최후 고백

장진수 지음, 오마이북(2014)


태그:#장진수, #오마이북, #의리사상, #블루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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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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