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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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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의가 임질재 접견실에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예진충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날렵한 체격에 청의 단삼을 입은 세 명이 서있다.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흰색 술이 달린 것으로 보아 은화사 요원인 것 같았다. 눈빛이 살아 있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세가 주위를 감싸고 있다. 될 수 있는 한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은화사 요원들이라 예진충 외에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예진충의 진한 눈썹이 미간을 향해 모아졌다 흩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풍천의는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겼거나 아니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화를 꾹꾹 누르는 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을 보니 예상대로 후자였다. 하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풍장반, 대체 어찌된 일이오?"
"미안하게 됐소이다, 예총관. 나도 좀전에 보고를 받고 알게 됐소만. 아무래도 이곳이 담곤의 근거지이고 우리는 외인(外人)이다 보니, 그들만 알고 우리가 모르는 비밀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풍천의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변명을 하고는 옆에 서 있는 조복을 바라보았다.
"우리 대원들이 비룡표국 곳곳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조복이 말했다.

"됐소이다. 이 넓은 표국의 쥐구멍을 언제 일일이 다 수색한단 말이오. 내가 알고 싶은 건 담곤이 언제쯤 표국을 빠져나갔을 것일까 하는 거요. 여기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소?"

"우리가 담곤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파악한 게 오늘 오시정(午時正: 낮 12시)쯤이었습니다. 담 국주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총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기다리는데, 총관사가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총관사 자신도 어제 오전에 표국일로 이야기를 나눈 후 만나지 못했고, 담곤이 거처로 삼고 있는 구연정의 가정(家丁: 하인)과 하녀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어제 아침이후 보지 못했답니다. 그러니 제 추측으로는 어제 사시에서 오시 사이에 표국을 빠져나갔지 싶습니다."

조복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임무에 실패한 자의 표정으로 은화사 총관이라는 자에게 보고를 했다.

"음, 어제 오전이라면 그동안 만 하루가 지났는데, 사통팔달 정주에서 만 하루 동안이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겠소."

예진충이 눈썹이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글쎄올시다. 어떤 수단을 택하느냐에 달렸지만 일단 말 한 필로 본다면 하루거리에 개봉과 낙양 정도에 닿을 것이고 이틀거리로 장안과 금릉, 북평까지도 잘 하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

예진충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다.

"정주, 개봉, 낙양, 장안 각 지역 금의위 지부에 수배령을 내리오리까?"

풍천의가 말했다.

"아니오,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담곤의 행방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 점은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되오. 그것보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금의위 대원이 몇이나 되오."

예진충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조복은 저자가 담곤의 행방을 알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우릴 불러 다그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얘기의 핵심은 금의위 대원의 지원요청인 것 같았다.

"현재 표국에 있는 팔 명이 전부입니다. 개봉과 낙양 지부에 지원요청을 한다 해도 십오 명을 넘진 않을 것이오만. 대규모 인원이 필요하면 정주와 개봉의 관병과 포졸을 징발할 수 있습니다."

풍천의의 말이 하오체에서 경어로 조금씩 바뀌었다.

"아니오 방침을 바꿨소. 이제 방이니 수배령을 내리지 않고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소."
"그럼, 금의위 대원만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일단 현재 표국에 있는 팔 명부터 은화사 작전에 전념해 주기 바라오.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따로 방침을 내릴 터이니 기동(機動) 준비를 해주기 바라오."

예진충이 말을 끝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풍천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풍천의도 알아차리고 그럼 이만, 하면서 포권을 취하고는 접견실을 나갔다. 예진충은 풍천의와 조복, 두 금의위 대원이 임질재 건물을 벗어난 걸 확인하자 손을 들었다. 뒤에 있던 은화사 요원들이 상체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예진충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총관 나리 계신지요?"
정중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기척을 냈다.

"뉘시오?"
"표국 총관사 금택영이라 합니다. 잠시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총관사라, 예진충은 얼른 떠오르진 않았지만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담곤의 주위에 얼쩡거리면서 표국 일을 돕던 자이던가. 아마 맞을 것이다.

"들어오시오."

장지문이 열리면서 총관사라는 자가 들어섰다. 작은 체구에 오종종한 인상의 그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 방안엔 본관 외에는 아무도 없소이다."
예진충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제야 안심을 한 듯 총관사는 예진충을 향해 부복을 했다.

"채 어르신의 명을 받들어 예 총관 나리께 고(告)하고자 합니다."
"채 어르신이라면 채욱 첩형관을 말씀하시는 거요?"
"네, 그렇사옵니다."
"음……."

예진충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이미 이곳까지 손을 썼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 혼자 허둥댄 꼴이 우스워 순간 볼이 화끈했다. 상대부라면 사전에 주위에 정보망을 깔아놓았으리라 미리 예측을 했어야 했는데…….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래, 이곳 사정은 어떻소?"
예진충은 총관사가 언제 어떤 과정으로 은화사에 포섭 당했는지 묻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은 그저 목적한 바를 손에 넣으면 되는 것이다.

"총관 나리께서 찾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젊은 남녀라면 오늘 점심 무렵 표국의 담 국주와 함께 빠져나갔습니다."
금택영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점심 무렵?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는 거요?"
예진충이 미간을 좁히며 벌떡 일어섰다.

"우선 남의 이목을 숨기느라 어두울 때까지 기다린 것이고, 다음으로 이게 진짜 이유인데 어차피 표국 안에서는 총관 나리가 원하는 소득이 없을 것인즉 담 국주가 어디론가 간다면 모른척하고 보내주고는 그 뒤를 쫓는 것이 보다 나은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

예진충은 듣고보니 총관사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진경이 표국 내에 있진 않을 것이다. 서생이 잠입했다고 다짜고짜 체포부터 하고보면 그의 사숙인 담곤이 반발하여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가 있다. 총관사의 말대로 차라리 담곤을 만나게 해준 다음 그들이 어디론가 간다면 그 뒤를 밟아 진경이 숨겨진 곳을 알아내거나 혹은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게 낫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있는가?"
"국주와 젊은 남녀는 수조마차에 숨어 표국을 빠져나갔는데, 개봉으로 가는 척하긴 했지만 정확한 행선지는 소인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갈지 소인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바로 운부산 산장입니다."

"운부산?"
"네, 여기서 말로 하루거리입죠. 표국의 비밀 은가인데 담 국주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산장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표국 안에서는 저 혼자뿐입니다."

"흠, 그 정도 기밀사항이라면 거기로 갔을 가능성이 크겠군. 고맙네. 총관사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으이. 자네의 공을 잊지 않겠네."
"뭘요, 공이랄 것까지야. 나랏일인데 당연히 협조해야죠."

"운부산 어디쯤인가?"

예진충이 묻자 금택영이 지필묵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부터 조수협이고, 거길 빠져나오면 구사곡이 이어집니다. 예진충은 지도를 보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산장 주위의 지형을 그려가며 매복, 차단, 기습 지점을 짚어나갔다.

상대부의 치밀한 사전 준비는 어김없이 중요한 순간에 위력을 발휘한다. 상대부가 무극진경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태허진인 네 제자의 주위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첫째 제자 모충연의 주위에서는 비영문 장문인 연발연, 셋째 습평의 주위에는 재가한 아내, 넷째 담곤의 주위에는 그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금택영을 매수한 것이다. 은화사에서 삼년 전부터 시작한 공작이다. 다만 셋째 기승모만은 행방을 알 수 없어 포기했다.

포섭이라고 해봤자 별 건 아니다. 주목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 이를 테면 사제 간 연락을 취하거나 만난다면 알려달라는 것이다. 특히 네 제자가 동시에 같이 모인다거나 그런 기미가 있으면 긴급히 연락해야 한다. 포섭 작업은 아마 예검비화 채욱이 주도한 것 같았다. 작전은 주효했다. 서생이 소주의 여제자한테 간 사실도 비영문 장문인의 입을 통해서 알아냈고, 이곳 비룡표국에서 담곤과 관조운 일행의 행방을 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총관사라는 촉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만하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예진충은 상대부의 무서운 능력에 새삼 경외감이 일었다. 

금의위에게는 담곤이 빠져나간 사실을 일부러 흘린 다음 그들에게 책임 추궁을 하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향후 지휘체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금의위 대원들은 동창에 대해 한편으로 선망하고 한편으론 질시하는 상반된 감정을 품고 있다. 어느 쪽을 자극하느냐에 따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적보다 더 심한 적이 될 수도 있다. 운부산은 넓다. 만약 일이 잘못 돼 담곤 일행이 도주를 한다면, 자신을 포함한 은화사 요원 넷이 일일이 수색하고 도주로를 차단하고 예상 경로에 매복할 순 없다.

따라서 금의위의 인력 지원이 절실한 것이다. 그렇다고 관병이나 포졸을 동원해 이 잡듯 뒤질 수도 없다. 상대부는 진경 입수 건을 병부(兵符)나 도찰원에 포착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관병이나 포졸을 동원하려면 병부에 연락을 해야하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도찰원에서도 알게 될 것이다. 며칠 전 예검비화 채욱이 자신에게 온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 때문이다. 서생 놈을 추적한답시고 포청에 연락해 섣불리 방부터 붙인 것을 추궁한 것이다. 진경에 관련된 어떤 행동도 노출시키지 마라. 이것이 상대부의 새롭게 내린 지령이다.

금의위 정주 장반 풍천의에게는 이 정도 군기를 잡았으니 앞으로 고분고분할 터이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영반 조복이란 놈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복종하는 눈빛이 아니고 무언가 복심(腹心)이 따로 있는 것처럼 눈동자의 움직임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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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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