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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개인비리와 불법 대선개입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그 후임인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차기 국정원장에게는 1차적으로 ‘국정원 개혁’이라는 중책이 맡겨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병기(67) 주일대사를 국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병기 후보자는 직업외교관 출신이지만, 안기부장 특보와 안기부 2차장,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 특보 경력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간에 안기부 ‘북풍공작’과 한나라당의 ‘차떼기 자금 매수공작’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정치공작 전과자’다. 북풍공작은 검찰 기소를 면했지만, 의원 매수공작은 유죄(벌금 1천만원) 판결을 받았다. 야권이 반발하는 이유다.

이에 이병기 후보자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통해 대통령이 과연 국정원을 개혁할 의지가 있는지, 국정원에서 또 다시 공작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를 짚어본다. 지상 검증은 ▲2002년 차떼기 공작과 이병기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정치특보 ▲1997년 북풍 공작과 이병기 안기부 2차장 ▲이병기 후보자와 국정원장론의 순서로 진행한다. [편집자말]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가 15일 오후 서울 강서구 공항로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가 6월 15일 오후 서울 강서구 공항로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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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박근혜 수첩인사'의 특징은 '박정희 인맥'과 '올드 보이'의 귀환으로 요약된다.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당선인의 첫 인사는 윤창중이었다. 직제에도 없는 '당선인 수석대변인'에 기용된 윤창중은 첫 브리핑에서 옆구리에 <월간 박정희>를 끼고 나타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 꿴 인사의 첫 단추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문창극은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낼 때 이사로 일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특보단장이었다. 이병기 후보자는 당시 이회창 후보 정치특보였다. '올드 보이'의 귀환은 박 대통령에게 심리적 위안과 안정감을 줄지 모르지만, 국민에게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대한 부패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모금 범죄를 가리키는 2002년 '차떼기'의 추억이 그것이다.

'차떼기'는 본디 '차'(車)에 무리를 나타내는 '떼'와 어미 '기'가 붙어 만들어진 합성어다. 사전적 의미는 '화물차 한 대분의 상품을 한꺼번에 사들이는 일이나 흥정'을 뜻한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선 차떼기의 의미를 '화물차 한 대분의 만원권'(당시는 오만원권이 발행되기 전)으로 바꿔 놓았다. 그 중심에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핵심 측근인 최돈웅 한나라당 재정위원장과 서정우 대선후보 법률특보, 그리고 LG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있었다.

'올드 보이'의 귀환에 따라온 '차떼기'의 추억

당시 불법 대선자금의 '입구'와 '출구'를 파헤친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의 수사기록과 재판 기록을 검토해 보면, 명실상부한 '차떼기'에 부합된 불법자금에 관여한 3인방은 최돈웅과 서정우, 그리고 강○○ LG 구조본부장이다. 검찰 수사기록과 재판 기록을 통해 당시의 범죄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2002년 10월 말~11월 초 최돈웅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30층에 있는 강 본부장(사장급)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전에 방문 목적은 알고 있던 터였다. 최 의원은 자신이 LG의 후원을 맡았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기업의 '후원'은 '선거자금'을 의미했다. 최돈웅은 액수를 특정하지 않았다. 다만 "예년의 후원 규모와는 단위를 달리하는 규모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본부장은 '접근하는 방식의 대담성'에 크게 놀랐다. 초면인데 전화 한 통화 하고 찾아와선 '단위를 달리하는 규모'를 요구한 것이 그랬다. 당황스러웠다. LG그룹의 정당 공식후원금 규모부터 알아봤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98년 0원, 99년 5억 원, 2000년 1억 원, 2001년 10억 원 등 총 26억 원을 한나라당에 전달했다. 이에 비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는 2001년까지 146억원을 지원했다. 차액이 120억원으로 '언밸런스'했다.

퍼뜩 1997년의 경험이 떠올랐다. LG는 IMF 긴급구제금융을 초래한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1997년 대선에서 민주당을 외면했다. 이후 1998년 대기업 빅딜 과정에서 LG반도체를 빼앗긴 아픈 상처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회창 대세론'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당초에는 올해 상반기에 후원금 집행을 미뤘다가 하반기에 30억 원을 집행할 계획이었다. 강 본부장은 '단위를 달리하는 규모'를 100억 원대로 추산했다.

구조본은 계열사 지분 포트폴리오를 관리했다. 각 계열사 공통의 이익을 위해 해야 할 일, 예를 들어 각 계열사들이 공식 후원금을 얼마씩 분담할지를 정하는 것도 구조본부장의 몫이었다. 강 본부장은 구조본 산하 재무관리팀의 이○○ 상무에게 현금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LG그룹 총수일가 등이 지난 99년 이후 계열사 주식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19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얻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LG본사.  LG그룹 총수일가 등이 지난 99년 이후 계열사 주식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19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얻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LG본사.
 여의도 LG트윈타워. (자료사진)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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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관리팀이 트윈타워 금고방에 관리한 비자금 160억 원

재무관리팀은 LG를 공동창업한 구씨와 허씨 일가족으로 구성된 특수관계인 주주들의 주식과 세금을 관리하는 부서다. 이 팀장 밑에 12명의 직원이 주식관리 파트와 세무파트로 나뉘어 일했다. 다른 대기업과 달리 3세 경영체제로 특수관계인의 수가 많은 LG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특수관계인들의 주식변동을 구조본 차원에서 관리했다.

이 상무는 내화벽으로 만든 재무관리팀 금고방에 특수관계인 주주들의 상속 및 증여에 대비해 마련해둔 현금 160억원이 있다고 보고했다. 특수관계인 주주들의 예금, 계열사 배당액 등을 증권계좌에서 인출한 것으로 비실명채권을 사서 상속-증여를 할 계획을 세웠다가 자금세탁방지법 시행 등으로 보관중인 현금이라고 했다. 강 본부장은 고민 끝에 '배팅' 규모를 150억 원으로 정했다. 지난 5년간의 민주당 공식 후원금과의 차액 120억원에 원래 계획한 30억 원을 더한 액수였다. 결과적으로는 계산 착오였고, 판세를 오판했다.

150억 원은 연간 후원금 한도를 훌쩍 넘는 거액이다. 강 본부장은 공식 창구인 최 의원이 불법자금을 전달할 창구로 미덥지 못했다. 150억 원이라는 거액을 '배달사고'나 사후 잡음 없이 후보에게 직접 전달할 '창구'가 필요했다. 그는 전임 구조본부장인 이○○ 부회장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했다. 이 부회장은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서 자란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이자 이회창 후보 법률특보인 서정우 변호사를 추천했다.

이회창과 서정우의 '특수관계'는 특보단 임명장 수여식의 자리 배치에서 드러난 바였다. 서 특보는 원외이므로 초선의원 다음 서열이지만, 이 후보의 배려로 김기춘 특보단장 다음에 자리가 배치되었다. 그 이후 서정우는 이회창 후보의 막후 실세로 통했다. 강 본부장은 서정우 변호사를 만나 LG의 후원 의사를 전달했다. 서정우는 현금을 실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으로 가져오면 차를 가져간 뒤에 차를 그 자리에 돌려주겠다고 수금 방법을 제안했다.

'차떼기'의 명소가 된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그 무렵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 캠프는 다른 대기업들에도 은밀하게 '수금'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1차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4대 재벌의 후원액은 ▲ 삼성 152억 원(추가조사에서 300억 원으로 늘어남) ▲ 현대 100억 원 ▲ SK 100억 원이었다. LG의 배팅액은 현대와 SK보다 50억 원이 더 많은 거액이었다. 삼성은 불법자금의 대부분을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전달했다.

전달 방식도 특이했다. SK는 대선 한 달 전인 11월 12~26일에 김창근 구조본부장이 최돈웅 의원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승용차로 20억 원씩 5회에 걸쳐 100억 원을 전달했다. 현대의 경우 서정우가 경기고 후배인 최한영 현대차 부사장에게 직접 전화해 돈을 요구했다. 최한영 부사장은 50억 원씩(사과상자 40개) 2회(이틀)에 걸쳐 스타렉스 승합차에 실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차량 채로 전달했다. 서정우는 직접 차를 몰아 한나라당 당사 지하주차장에서 이재현 재정국장에게 전달했다.

첫날 50억 원을 당에 전달한 서정우는 다음날에는 돈상자 40개(2억 원들이 10개, 1억 원 들이 30개) 중에서 1개를 자기몫으로 빼놓는 여유를 보였다. 이틀에 걸쳐 100억 원 '차떼기'로 담력을 쌓은 서정우는 며칠 뒤 LG에 같은 방법으로 전달해 줄 것을 주문했다. 강 본부장은 재무관리팀에 보안유지를 위해 로고가 없고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탑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재무관리팀은 LG상사 패션부문에 연락해 의류 수송에 쓰이는 외부 지입차량인 2.5톤 탑차를 대기시켰다.

 15일 오전 한나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이회창 전 총재가 10시 37분경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이회창 전 총재의 도착시간에 맞춰 민주노동당 빈민위원회가 대검찰청사앞에서 '차떼기 100억 이회창 전달식' 퍼포먼스를 벌였다.
 2003년 12월 15일 오전 한나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이회창 전 총재가 10시 37분께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이 전 총재의 도착시간에 맞춰 당시 민주노동당 빈민위원회가 대검찰청사 앞에서 '차떼기 100억 이회창 전달식' 퍼포먼스를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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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본부장은 11월 22일 구조본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 재무관리팀 직원들을 시켜 현금 150억 원이 든 상자를 비상엘리베이터를 통해 금고방에서 지하2층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은 탑차로 옮겨 실었다. 2억4000만 원씩 담은 상자 62개와 1억2000만 원을 담은 1개를 합친 돈상자 63개였다. 그는 사전에 서정우에게 전화해 "2.5톤 탑차이니 1종 대형면허가 필요합니다"라고 알렸다. 그리고 저녁 8시쯤 경부선 하행선 '만남의 광장' 주차장에서 차량키와 화물칸 키가 달린 열쇠고리를 서정우에게 전달했다. 검은 돈 조달의 '턴 키' 방식이었다.

'차떼기' 장본인 서정우 변호사의 공식 역할은 '네거티브 대응'

서정우는 현대처럼 50억 원을 예상하고 나갔는데 그 세 배인 150억 원이어서 크게 놀랐다. 막상 탑차를 보니 대형면허가 없어 운전 미숙으로 교통경찰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서정우는 담배를 한대 피우면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에 직접 차를 한나라당 당사로 몰았다. 문제는 차가 커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재현 재정국장은 탑차를 한강둔치로 이동시켰다. 급히 재정국 직원 3명이 렌트한 봉고차 2대에 돈상자를 나눠 실은 뒤에 당사 지하주차장으로 와서 재정위원장실에 옮겨 보관했다.

그전까지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불법자금의 전달 방식은 쇼핑백이나 사과상자에 담은 현금을 승용차나 승합차에 실어 운반하는 것이었다. LG는 불법자금 운반수단을 현금 수송차량에 걸맞은 탑차로 격상시켰다. 불법 대선자금 '흑역사'에서 명실상부한 '차떼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서정우 법률특보의 공식 역할은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에 대한 법적 대응을 지휘하는 일이었다.

한나라당은 1997년 대선 당시에도 국세청을 동원해 대기업에서 불법자금을 모금한 '세풍'(稅風)과 안기부를 동원해 공기업에서 불법자금을 수금한 '안풍'(安風)이라는 '국기문란 전과'가 있다. 당시 한나라당은 서슬 퍼런 집권당이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하는 법이다.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어서도 불법자금의 사슬을 끊지 못했다.

강유식 본부장은 검찰 조사에서 "왜 야당인 한나라당에만 거액의 불법자금을 제공했냐?"는 질문에 두 가지 이유를 댔다. 하나는 '이회창 대세론'에 현혹되어 대선 판세를 오판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세론의 영향 때문인지 돈을 요구하는 한나라당의 압력이 민주당보다 몇 배는 강했다는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의 무모한 탐욕과 LG의 오판이 '차떼기'라는 '흑역사'를 새로 쓰게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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