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지난 200년 간 크게 두 번의 패러다임 변화를 맞았다. 뉴턴이 나무 밑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축구 역시 120년에 걸쳐 크게 두 번의 변화를 맞았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토털 사커'를 들고 나왔을 때, 1989년 이탈리아 출신 아리고 사키 감독이 AC 밀란 감독을 맡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가 그랬다.

미헬스 감독의 토털 사커는 말 그대로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뜻한다. 그의 철학에서 포지션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공격수도 수비를 하고 수비도 공격을 한다. 그래야 어디서든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승부처는 공격과 수비가 전환될 때다. 우리 편 골라인에서 상대편 패널티 지역까지는 약 70미터. 공을 뺏겨 역습을 당하면 70m를 질주해 다시 수비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경기 내내 반복된다. 지금으로써는 당연한 플레이지만 당시 전문가들에게 그의 축구철학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축구철학이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팀은 사실상 그가 지휘했던 아약스와 바르셀로나, 네덜란드 대표팀 뿐이었다.

미헬스를 계승한 아리고 사키의 두 번째 혁명은 그보다 한층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상대편 공격수가 공을 소유하면 우리 측 수비수 세 명이 달려가 에워싼다. 공격이 거셀 경우 진영을 3선으로 나눠서 각각의 선수가 주어진 공간을 방어한다. 상대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때는 압박을 하면서 생긴 빈 공간을 이용해 골대로 전진한다. 사키의 축구 철학은 모든 것이 공간과 압박이라는 테마로 수렴됐다. 미헬스의 토털 사커는 사키의 압박을 만나 비로소 완전해졌다. 하지만 이론을 실전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수준의 체력이 필요했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선수들의 강력한 체력은 필수적인 요소로 부상했다.

1980년대, 감독에겐 축구의 완성·선수들에겐 지옥의 시작

두 차례에 걸친 전술 혁명으로 축구는 더 치밀하고 역동적인 스포츠가 됐다. 관객들은 즐거웠다. 선수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대의 개막이었다. 1965년 잉글랜드의 미드필더들은 경기 중 평균 7km를 뛰었다. 2008년 유럽선수권대회선 14km를 뛴 선수가 등장했다. 남아공 월드컵을 기준으로 선수 1명의 경기당 전력질주 횟수는 평균 50회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패스 횟수는 작년 유럽리그 기준으로 600회, 10년 전에 비해 약 100회 가량이 늘었다. 축구는 이제 많이 뛸수록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는 스포츠가 됐다. 영국의 레전드 폴 게스코인처럼 술과 담배, 번뜩이는 재능으로 축구판을 바꾸는 선수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전술의 발전에 비해 신체 능력의 향상은 언제나 더뎠다. 2000년대 중반 골든골이 실버골로 바뀌고 오프사이드 규정이 개편되면서 선수들의 체력적 부담은 더 가중됐다. 세계 곳곳에서 선수들이 돌연사로 쓰러졌고 당시 가장 강력한 압박을 자랑했던 팀 도르트문트는 이 무렵 줄부상이 이어지기도 했다. 90분 내내 압박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미헬스와 사키의 제자들은 '압박의 분배'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첫 번째 대안인 스페인의 패스축구(티키타카)는 요한 크루이프의 극단적인 점유율 축구를 유산삼아 6년 간 세계를 지배했다. 그 영광도 지금은 몰락의 끝에 도달해 있다.

스페인 티키타카 몰락의 중심에는 AT마드리드의 시메오네 감독과 레알 마드리드 안젤로티 감독이 선보인 전방압박과 역습의 적절한 분배가 있었다. 두 팀 모두 하프라인 위에서는 전방압박을 가하다 상대가 1차 저지선을 무너뜨리면 신속히 수비라인을 내려 4-4-2, 또는 5-4-1 형태의 두 줄 수비로 맞섰다.

역습 시에는 순간적으로 공격 가능한 모든 선수가 뛰어나가 역습 확률을 극대화했다. 네덜란드의 반 할 감독과 코스타리카의 호르헤 루이스 핀투 감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월드컵에서 3백을 이용한 수비와 역습을 앞세워 파괴력을 극대화했다. 이제는 자기 진영에서 마음대로 공을 돌릴 기회마저 쉽게 주어지지 시대다.

과부하 걸린 선수들, 더 많은 신을 원하는 전술

지금까지의 트렌드 변화는 '압박의 분배'라는 화두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이다. 하지만 현재의 흐름이 선수들의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낮춰준다 표현하기엔 의문이 남는다. 티키타카가 몰락하면서 선수들은 역설적으로 더 바빠졌다. 전방압박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수비형 미드필더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역할의 임무까지 소화하는 처지가 됐다.

최후방의 수비라인을 보조하는 기존의 능력과는 별개로 전방압박을 풀어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다부진 신체, 높은 패스 정확도가 필요해졌다. 이탈리아의 안드레 피를로, 스페인의 사비 알론소를 필두로 하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deep-lying playmaker)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포지션보다도 할 일이 많아진 보직은 공격수다. 올해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의 만주키치, AT마드리드의 디에고 코스타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광범위한 활동량과 수비가담이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선 세트피스에서 다부진 신체조건으로 공을 따내고 공격전개 시 2선과의 유기적인 위치 전환과 몸싸움으로 공간을 확보했다. 쉽게 말해 만능 공격수가 필요한 시대.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 전술이다. 헝가리의 레전드 산도르 코치슈가 현재로 환생했다면 지금 축구계는 어땠을까. 120년의 축구사를 다 뒤져야 할 만큼 이 역할에 완벽히 부합하는 공격수는 흔치 않다.

산도르 코치슈, 디에고 마라도나, 칼 하인츠 루마니게. 돌이켜보면 만능형 플레이어에 대한 전술적 욕구는 현대 축구가 확립되기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당시의 흐름상 반드시 필요하진 않지만 귀하게 쓰였을 선수들. 그 필요성이 절대적 가치가 된 현재의 흐름은 1950년대를 관통해 디디에 드록바와 즐라탄 이브라모비치가 신으로 추앙받던 2000년대 말에 도달하기까지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축구는 선수들에게 더 과중한 짐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 신으로 불리는 사나이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이 순간에도. 하지만 축구광들은 갈수록 더 많은 신들을 원한다. 그들 앞에서 신과 제물의 경계는 언제나 날카롭고 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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