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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델리 빠하르간지 밤거리
 인도 델리 빠하르간지 밤거리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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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늦은 시간 인도 밤거리를 다니지 마라'라는 인도 여행서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 불안감을 감추고 웃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쪼르르 앉아 있는 세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고 애써 웃음을 내보인다.

승객들이 어떤 심정인지, 그러거나 말거나 오토릭샤 기사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의 비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잘도 피해가며 달린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뱀장어 머리통처럼 생긴 오토릭샤의 앞머리를 들이민다. 차선이 따로 없다. 우리가 타고 있는 오토릭샤뿐만 아니라 모든 자동차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달린다.

4차선에 다섯 대의 차량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접촉 사고 없이 잘도 빠져 나간다. 자동차라는 무지막지한 칼날에 스치지도 베이지도 않고 휙휙 날아다니며 잘도 헤쳐 나가는 무림의 고수들이다.

4차선에 다섯 대의 차량이 휙휙... '무림의 고수들'

10여 년 전 가족과 함께 조랑말이나 다름없는 소형 자동차를 끌고 서울로 기어 들어갔다가 혼쭐이 난 경험이 있다.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어 한강 다리를 건너 다시 되돌아와야 했던 뼈아픈 기억.

이제까지 나는 서울의 운전자들이야말로 끼어들기의 최고 고수들인 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불과 몇 센티 간격으로 거침없이 빠져나가고 들어서는 인도의 운전자들에 비하면 서울의 운전자들은 하수에 불과하다.

나는 엉뚱한 곳에 하차해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인도 여행서의 경고장을 머릿속에 새기고, 여전히 오토릭샤 기사의 표정을 예의 주시한다. 그는 이따금 하품을 하거나 졸음을 참기 위해 두 눈을 꿈벅꿈벅 거린다. 때로는 고개를 흔들고 눈꺼풀이 내려앉고 있는 두 눈을 비벼 가며 여전히 무표정으로 달린다.

졸음을 쫓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인상은 험악한 수준이었지만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문득 델리 공항에서 출발할 때 오토릭샤에 시동을 걸면서 했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인도 택시는 아주 빠르다. 걱정하지 마라."

그 말을 다시 떠올리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쁜 짓을 할 사람 같으며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젊은 운전자가 안쓰럽게 다가왔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이 늦은 시간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운전을 해야만 하는 그에게는 어떤 가족들이 있을까? 무사고 운전을 빌고 있을 그의 가족이 떠올랐다.

여행자들의 거리, 빠하르간지(아래 빠간) 바자르 앞에는 뉴델리 역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빠간 바자르 사이트는 혼잡했다. 사람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자동차들로 빼곡하다. 우리가 빠간 바자르 코앞에서 내리려 하자 오토릭샤 기사는 혼잡한 도로에서 비껴난 다소 여유 있는 장소에 안전하게 내려준다.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는 생각에 뻔뻔한 낯짝으로 그와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웠다. 나는 배낭을 챙기면서 그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당신의 신에게 경배를 드린다'는 '나마스테'라는 인도식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를 의심했던 미안한 마음에 택시 요금표와 함께 40루피 정도를 얹어 주었다.

팁을 받아든 그는 입 꼬리를 올려 슬며시 웃더니 이내 무표정이다. 그만큼 그는 그 복잡한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틈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우리를 안전한 목적지까지 인도하기 위해 피곤한 운전을 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인도에 도착해 처음으로 만난 인도 사람이었고 내가 겪은 인도의 첫 인상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 나는 이 길을 걷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예약되지 않은 낯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야 한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이 시간에 문을 연 숙소가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숙소를 찾지 못하면 큰 낭패다. 이 세 여자를 데리고 어디서 날밤을 샌단 말인가. 나는 그 불안감을 감추고 애써 웃는 표정으로 세 여자들에게 다짐을 놓듯 말했다.

"이제부터가 문제여, 내가 앞장 설테니께 내 뒤를 바싹 따라와, 따로 떨어져 오지 말고 잉."
"예!"

오리무중의 정글 숲을 헤쳐 나가는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하자 세 여자들이 배시시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사람 사는 곳이 뭐 다를 게 있겠는가'라는 배짱으로 번뜩이는 눈빛들을 피해 앞만 보고 똑바로 걸었다(아마 내 눈빛이 거리의 눈빛들보다 더 번들거렸을 것이다). 유흥가가 즐비한 새벽 두 시가 넘은 한국의 거리 또한 위험하다면 더 위험한 거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위풍당당하게 앞장서 걸으며 세 여자에게 거듭 강조했다.

"누가 말 걸고 그래도 그냥 앞만 보고 걸어 잉."
"정말로 인도에 처음 오시는 거예요?"
"인도에 아주 익숙하신 거 같은데…"

"정말로 인도에 처음 오시는 거냐"며 거듭 물어오자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친김에 폼 나게 '어쩌면 전생에 왔을 수도 있지'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사실 이 길이 처음이 아닌 듯싶을 정도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20여 년 전 나는 이 길을 걷고자 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새로운 시대의 변혁을 꿈꾸며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해 나갔고 그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거나 앞서간 일부 사람들은 마음 공부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의 마음 공부에는 먼저 자기 자신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중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더러는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그 무렵 나는 2년도 채 못 버티고 문을 닫곤 했던 영세한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여기저기 산사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산문 앞에 서성거리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 물음을 풀기 위해 좀 더 깊이 있게 붓다를 만나고 싶었다. 승려가 되기 전에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나를 송두리째 발가벗겨 내던져 놓고 싶었다. 그 길목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무런 대책 없이 떠나는 인도 고행 길이었다.

인도 고행 길을 작정하고 비행기 표를 구하려 할 무렵 선배의 소개로 인도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여자를 만났다. 그림을 전공한 그녀는 인도에서 만다라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인도 행을 위한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그 준비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급기야 큰 아이가 생겼다.

그녀의 뱃속에서는 신의 선물처럼 큰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우리는 인도행 대신 결혼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부부 생활이 그렇듯이 연애 공간이 아닌 생활 공간으로 접어들자 살아온 이력이 너무나 달랐던 만큼 서로 다른 성품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인도 고행 길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20여 년 전 나는 이 길, 인도 델리 여행자들의 거리 빠하르간지 바자르를 지금처럼 배낭을 걸쳐 메고 똑같이 걷고 있을 것이었다. 뒤따라오던 누군가가 "인도에 아주 익숙하신 거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20여 년 전 젊은 청춘으로 되돌아가 그 젊은 혈기로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 자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변하지 않는 마음 자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묶어 놓는다. 나는 20여 년 전 그때와 똑같은 물음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실체는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고통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헤매고 있단 말인가."

세 여자가 가장 불안해했던 존재는 바로...

올해 열아홉 가장 나이가 어린 조탄선(가운데).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홀로 배낭을 꾸린 부산 출신의 머슴아 같은 당찬 아이.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라는 대구 출신의 나지희와 황현정. 둘 다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는데 황현정(왼쪽)은 이번에 졸업했고 나지희(오른쪽)는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계를 낸 상태.
 올해 열아홉 가장 나이가 어린 조탄선(가운데).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홀로 배낭을 꾸린 부산 출신의 머슴아 같은 당찬 아이.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라는 대구 출신의 나지희와 황현정. 둘 다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는데 황현정(왼쪽)은 이번에 졸업했고 나지희(오른쪽)는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계를 낸 상태.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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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자리는 그때와 다를 바 없지만 몸은 더 이상 패기 넘치는 젊은 청춘이 아니다. 이런저런 가식이나 사회적 규범 따위를 훌훌 벗어던지고 인도의 구루들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내겐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는 소중한 두 아들이 있다. 그 '사랑'이라는 책임감은 나를 강하게 담금질 시켜 왔지만 때론 나약하게 만들고 거침없었던 내 젊은 시절의 혈기를 졸아 붙게 한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온갖 험악한 소문에 대한 방패막이가 돼 줘야 할 세 명의 여자들이 내 뒤를 따르고 있다. 그렇게 순간순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늦은 시간이지만 빠간 거리에는 간간이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삼삼오오 짝 지어 다니고 있다.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숙소가 많다는 곳으로 곧장 진격해 들어갔다.

얼마쯤 걸어가자 씨티은행 ATM(현금인출기) 박스가 보였다. 현금인출기가 이토록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세 여자는 현금인출기 건물 옆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고 그 주변에 숙소가 많다는 정보를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비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자 다행히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숙소들이 보인다. 1970~1980년대 역 근처에 즐비했던 한국의 옛 여인숙 같은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그 맨 끝에 위치한 숙소로 찾아들었다. 우리들 일행 중에 가장 나이 어린 여자 아이가 인도 여행 안내서를 통해 습득한 숙소였다.

드디어 내 임무는 끝나고 여자 셋이 여행 안내서를 통해 습득된 지식을 발휘를 해 숙소를 예약을 했다. 여권을 내밀어 복잡한 숙박계를 썼다. 내가 지갑을 꺼내자 미리 돈을 지불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이다. 인도 여행 안내서에 의하면 미리 지불하면 나중에 딴 소리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빼놓은 돈을 다시 집어 넣었다. 여자 셋이 쓰는 방을 650루피에, 나 홀로 쓰는 방을 550루피에 쓰기로 했다. 세 여자들 말로는 비수기에는 300~400루피면 된다는데 물가가 올랐거나 아무래도 바가지를 쓴 듯하지만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에 방을 잡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숙소를 잡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올해 열아홉 가장 나이가 어린 조탄선은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홀로 배낭을 꾸린 부산 출신의 머슴아 같은 당찬 아이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라는 대구 출신의 나지희와 황현정. 둘 다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는데 황현정은 이번에 졸업했고 나지희는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계를 낸 상태라고 한다.

나는 농사를 지어가며 <오마이뉴스>에 오랫동안 글을 써온 반쯤은 글쟁이라고 소개했다. 후에 알게 된 것인데 이들은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쓴다는 것에 안심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마이뉴스>가 젊은 층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간단하게 신상파악을 할 무렵에도 다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거운 배낭과 오랜 비행시간으로 지쳐 있는 탓도 있지만 낯선 거리의 험악한 소문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세 여자들이 가장 불안해했던 존재는 따로 있었다. 그 존재는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델리 공항을 빠져나와 머뭇거림 없이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빠간 밤거리를 대책 없이 헤쳐 나갔던 사람,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 인도 여행이 처음이라고 말한 것이 믿기지 않았고 생김새 또한 인도 밤거리에서 조심해야 된다는 그런 인도 현지인처럼 생겨 먹지 않았던가.

그 험악하다는 빠간 바자르 밤거리(인도 여행서와는 달리 험악하지 않다)에서조차 아무도 옷소매를 잡아끌지 않았던, 그런 정체 불명의 사내 뒤를 졸졸 따라왔으니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그 사실을 정작 나만 몰랐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떠들썩하게 웃어 제꼈지만 대책 없이 앞만 보고 걸어왔을 뿐, 대체 인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적어도 인도의 첫날밤, 우리가 스스로 긴장하고 두려워했을 뿐이지 우리를 위협한 인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태그:#인도의 고수들, #라마스테, #빠하르간지 밤길, #인도의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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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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