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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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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에 있는 아는 사람 집으로 옮겼다. 지붕과 지붕 사이에 두어 평 정도로 비닐을 덮어서 비를 막고 바닥에는 나무판자를 깔았다. 방이나 부엌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저 밤이면 식구들끼리 살을 맞대고 잠이나 겨우 잘 정도였다.

이소선의 남편은 눈만 뜨면 밖으로 나돌았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는 것 같았지만 집에는 돈 한 푼 가져 오지 않았다.

이소선은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서 장사조차 할 수 없었다. 태일이마저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겠다고 집을 나간 뒤여서 마음고생까지 겹쳐 있었다.

용두동에서 이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안 시동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무조건 대구로 내려와서 함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시동생은 남편이 돈을 잘 벌 때 사준 미싱 1대로 열심히 일을 해서 제법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소선은 시동생의 제의를 끝내 거절했다.

'형제라도 잘살 때가 피붙이지 이렇게 지지리 못사는데 만나면 뭘 하냐. 공연히 형제간의 의마저 상하게 할 뿐이지 어렵더라도 우리가 고생하면서 헤쳐 나가는 게 낫겠지.'

이소선은 시동생의 도타운 정을 물리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대구의 시동생한테서 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아이들하고 꼭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시동생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을 내려오게 하려고 거짓 전보까지 치다니. 하지만 부모가 위독하다는 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찾아가서 뵙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소선은 혼자 대구로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과연 그가 예상한 대로 시어머니는 멀쩡하게 살아계셨다. 시동생은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더니 온 가족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대구에서 살게 되었다. 시동생은 남편한테 미싱 1대를 사주었다. 남편은 미싱에 매달렸다. 이소선은 남편이 만든 것들을 내다 팔아서 겨우 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이의 앙상한 몰골 보니 어미 가슴 미어져

대구로 다시 내려가 이소선의 식구들이 살던 집 이 집 곁방에서 이소선의 식구들이 살았다{지금은 허물어진 터)
▲ 대구로 다시 내려가 이소선의 식구들이 살던 집 이 집 곁방에서 이소선의 식구들이 살았다{지금은 허물어진 터)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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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어느 날 태일이가 돌아왔다. 공부하겠다고 부산께서 떠돌다가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했던지 아이의 얼굴이 반쪽이었다. 자식 하나 제대로 못 먹이는 부모를 어떻게 부모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돌아온 아이의 앙상한 몰골을 보니 어미의 가슴이 미어졌다.

태일이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게 기쁜지 아버지를 거들며 열심히 일을 했다. 태일이는 중단했던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집안일을 도우면서도 시간이 나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부모로서 무슨 염치로 자식이 하겠다는 공부를 막을 수 있겠는가.

태일이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했으니 정식 중학교는 갈 수가 없었다. 이들 형편에 중학교에 보낼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태일이는 사범대학 학생들이 선생님으로 있다는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청옥고등공민학교다. 전태일의 짧은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이때였다.

전태일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집안일을 하느라고 피곤할 텐데 학교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태일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이소선의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하던 사업이 잘 되지 않자 남편은 느닷없이 태일이한테 학교에 나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이가 그토록 배우고 싶어 하는 데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하니 그게 어디 부모로서 할 말인가. 이소선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남편은 매일 술에 절어서 살았다. 술만 먹었다 하면 아이들을 구박하고 매질까지 했다. 이소선은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남편의 손찌검을 막아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술기운만 돌았다 하면 사람이 짐승처럼 돌변했다. 집안이 평안한 날이 없었다. 허리를 졸라매고 아둥바둥거려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판인데 허구한 날 술타령이니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굶는 날이 늘어만 갔다. 집안 꼴이 이 지경이니 큰 집,작은집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남편은 이소선에게 여자가 통이 커서 집안 말아먹게 생겼다는 등 심지어는 애들을 때리지 않는 것까지 트집을 잡으면서 아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소선은 태일이와 태삼이를 부등켜 안고 밤마다 울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큰집이나 작은집에 부끄러웠다.

살아가면서 이소선 혼자 고생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도 못하면서 자식들에게 어떻게 매질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이소선은 자식들을 때려가면서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들으니 매를 들어야 할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소선은 태일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도리어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배워야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직 어린 것이 그토록 배우고 싶어 하는 게 뭐가 그리 나쁘단 말인가.'

이소선은 남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도 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소선은 남편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식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키워나갈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형편은 기울어 미싱마저 팔아야 했다. 이들은 다시 내당동 단칸방으로 옮겨 거기에 주저앉았다. 남편 전상수는 집을 나가 버렸다. 엄마인 이소선마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제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린 것들이 방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굶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먹을 것만 없는 게 아니었다. 굶주린 배에 파고드는 추위가 더 무서웠다. 어느 날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태일이와 태삼이가 공장 근방에서 숯을 주워 와 방안에 피우고 잠이 들었다.

몽땅 굶어 죽을 판... 서울 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소선이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네 명이 방바닥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이소선은 하마터면 자식 넷을 한꺼 번에 다 죽일 뻔했다.

'인간이 굶어죽으란 법은 없다. 명이 다할 때까지는 살 수 있겠지. 이대로 지낼 수는 없어. 서울로 가자. 죽었다 생각하고 앞으로 5년간 돈을 벌자. 서울 가서 정 안되면 식모라도 하면 될 게 아닌가.'

이소선은 아무리 처참하게 살아도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서울로 떠나려니 지식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 어린 것들을 남겨두고 어찌 혼자서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없다고 설마 큰집이나 작은집에서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오죽했으면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던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까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이소선은 무수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몽땅 굶어죽을 판이었다. 서울에 가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자식들이 어미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어린것들이 굶주림에 떨면서 어미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해봐도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끝내 서울로 갈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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