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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도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도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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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처마 밑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남편은 노동일을 계속 하더니 천막 하나를 구해왔다.

이들은 남대문 육교 근방 천막촌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천막촌의 생활이라는 것이 빗물이나 겨우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 잠은 그대로 맨땅에서 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목이나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살던 이들 천막이나마 비를 피할 곳을 마련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내 집'을 가졌다는 생각에 비록 맨땅이었지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집 없는 서러움 속에서 거리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는데 천막집이었지만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자 생활은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나마 다행으로 이 천막집을 마련한 뒤에 이 무렵 넷째를 낳았다. 이름을 순덕이라고 지었다.

천막집으로 옮긴 이후에도 남편은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걸식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이소선은 다짐했다. 그런 생활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찾아 나선 일, 팥죽장사

뭐든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땡전 한 푼 없는 이소선이 어디 가서 돈을 벌 수가 있겠는가. 이소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장사를 하기로 했다. 장사하기로 결정했지만, 돈 드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무얼 할까 며칠 동안이나 궁리를 하다가 팥죽을 끓여서 팔기로 했다. 사실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본다면 팥죽 한 그릇 끓여서 팔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웃 천막집에서는 팥죽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땔감은 남대문시장에서 구하기로 했다. 시장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종잇조각, 아이스케키 대, 상자 찢어진 것들을 부지런히 모았다.

이소선이 시장을 돌면서 땔감 거리를 주우러 다니는 것은 괜찮지만 태일이가 문제였다. 이소선은 태일이한테만은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못 줍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가 길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줍는다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소선은 땔감거리는 무엇이든지 주워서 팥죽을 끓였다. 팥죽 끓이랴 땔감 구하러 다니랴 아이들 거두어 먹이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사를 하고 돌아와서 땔감을 구하러 나가려고 하는데 천막 밖에 나무 땔감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흔하지 않은 나무 땔감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알고 보았더니 7살 난 태일이가 동생을 업고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나무를 주어 날랐던 것이다.

'이 어린 것이 지 어미를 이토록 생각하는 것인가.'

이소선은 태일이의 마음 씀씀이가 여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줍는 것을 못하게 말렸는데도 엄마가 고생하니 훔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다. 태일이는 나무만 주워오는 것이 아니었다. 팥죽을 팔고 돌아오니 밀가루 반죽까지 해놓았다. 밀가루 반죽은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이다. 며칠 뒤에는 밀가루 반죽을 너무 잘해놓았다. 엄마가 보기에도 아이의 솜씨로는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일아, 이 반죽은 누가 해줬냐?"
"내가 했어."
"네가 어떡게?"

이소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어떻게 밀가루 반죽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보자기에 물을 적신 밀가루를 넣고 그 위에 비닐을 깔고 발로 밟았어요."

그러면서 이쪽저쪽 발로 밟았다고 한다. 식당에 있는 주방장이 한 것처럼 잘도 이겨놓았다.

태일이는 엄마를 도울 수 있는 일 등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한참이나 궁리를 하고 노력하는 습성을 어릴 때부터 가졌었다.

이소선은 어린 태일이를 바라보면 대견한 생각이 절로 났다. 태일이가 엄마를 돕겠다고 하는 것이 고마워서가 아니다. 아직 어린 것이 어쩌면 그런 궁리까지 해가며 이 어미를 도우려고 할까. 아무리 자신이 낳은 내 아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데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만큼은 잘 키워보자. 우리가 비록 지금 사는 모습이 사람 같지 않더라도 이 모든 어려움을 겪어나간다면 나중에 큰 인물이 되겠지,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좀 더 나은 생활을 꾸려야 한다.'

살아보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자식들한테 자상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식이니만큼 아내가 하는 것처럼 늘 관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관심과 교육 방식은 엄마와는 딴판이었다.

태일이가 남편한테 얻어맞고 있는 것을 이소선이 본 적이 있었다. 태일이가 시장바닥에서 아이스케키 대 등 나무 조각을 주워오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남편은 어린 아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어린 것을 세워놓고 야단을 치더니, 나중에는 심하게 매질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되어서 어린 아들을 저렇게까지 때려야 했을까. 비록 가난하고 못살지만 자식들은 잘 키워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지만,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 남편과 다투기도 했다.

이소선의 가족이 모두 나서서 살아보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살아보려고 무슨 일을 벌여놨는지 이제는 천막집까지 남에게 넘어가게 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답답한 나머지 천막집을 저당 잡히고 돈을 쓴 모양이었다.

하루는 팥죽장사를 나가려 하는데 어떤 사내가 오더니 이 천막집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소선은 이 뜬금없는 소리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사내는 남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었다. 친막집이나마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 집을 비우라니 날벼락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사내는 막무가내로 집을 비우라고 하지, 남편은 나타나지도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돈 빌려준 일을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빌려 썼다는 말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 사내가 윽박지르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분명 남편이 빌려 쓴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사내는 이들의 사정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집만 비우라는 것이었다. 불을 보듯 뻔한 형편 아닌가. 여기서 쫓겨나가면 어디로 간 단 말인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 사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돈이 원수다.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소선은 생각을 곱씹어 봐도 그 자리에서 천막을 비워줄 수는 없었다.

"태일이 아버지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빌려 썼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어요? 당사자가 없는 판인데 함부로 집을 내줄 수는 없잖아요. 지금 당장 집을 비워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워준다면 당장 어디로 간 단 말이에요?"

이웃 천막에 사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들고 일어나서 이 집 편을 들어주었다. 이소선은 이웃들의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내 사정을 알아주는구나.'

"천막을 비워줘야 해요"... 아버지의 책임 품어 안자는 태일이

이소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빌려 쓴 돈에 대해 책임을 안 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장 거리로 나설 수도 없는 형편이다.

"엄마, 우리 천막 저 아저씨한테 내줘요. 우리 아버지가 돈을 빌려 쓰고 이 천막을 주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안 주면 어떻게 해요?"

태일이는 천막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어린 것의 의견이 그러하니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다 놀라는 눈치다. 이소선은 아들의 의견을 듣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태일이었지만 무슨 까닭에서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나 싶었다.

"태일아, 그럼 이 천막을 비워주면 우리는 또 어디서 잔단 말이냐?"
"아무 데서나 잘 수 있어요. 아버지가 천막을 비워준다고 약속했으니 천막을 비워줘야 해요."

이소선은 태일이의 결심을 듣고 용기를 냈다.

"그래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어찌할 수 없지. 설마 죽기야 하겠냐. 이것 없이도 우리는 여태껏 잘도 살아왔는데."

그렇게 해서 이들은 천막을 비워주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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