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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이런 퀴즈가 나왔다고 한다. "'예닐곱'과 '대여섯'과 '여남은' 중 숫자가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몇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정답은 '여남은'이다. '예닐곱'은 대략 일곱이나 여덟, '대여섯'은 다섯이나 여섯을 가리킨다.

그럼 '여남은'은? 열 하고도 조금 남는 수, 그러니까 '열을 조금 넘는 열하나나 열둘 정도의 수'를 뜻하는 말이다. '한두', '두세', '서너', '네다섯', '일고여덟'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예능보다 수준이 좀 높은 <도전 골든벨>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문제가 나온다. "다음에서 말하는 숫자의 합은 얼마일까요? 고등어 두 손과 오징어 한 축…." 정답은 '24'다. '고등어 한 손'은 두 마리고, '오징어 한 축'은 스무 마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퀴즈를 사오정한테 낼 때는 조금 꼬아서, "고등어 세 손, 오징어 두 축을 합치면 숫자가 얼마일까요?" 아무래도 사오정이 풀기는 꾀까다롭겠다.

퀴즈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짚고 넘어가자. 정답은 '맞추는' 걸까, '맞히는' 걸까. '맞히는' 것이다. '맞추다'는 '맞게 하다', '마주 대다'다. '양복을 맞추다', '성격을 맞추다', '입을 맞추다'가 그 예다. 맞추기가 꾀까다로운 것은 나와 크게 다른 남편(아내)의 '성격'이고, 꾀까다롭기는커녕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하는 그(녀)의 '입술'이다.

이제 <우리말 겨루기> 수준으로 퀴즈의 난이도를 좀 높여보자. "북어 두 쾌와 달걀 다섯 꾸러미와 청어 네 두름과 장작 한 강다리와 바늘 세 쌈 중에서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장작 한 강다리'다. '쾌'는 숫자로 20, '꾸러미'는 10, '두름'은 20, '강다리'는 100, '쌈'은 24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골 식당의 할머니가 쓴 것으로 보이는 그림 속의 '5섯명'이 정감 있다. 거기 적힌 숫자 '5' 때문일까.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떠오른다. '난쟁이' 하면 뭐니뭐니해도 일곱이다. 그렇다면 우리말에는 숫자 '5'를 묶음의 단위로 쓰는 말은 뭐 없나?

있다. '도둑' 혹은 '도적'을 세는 단위가 바로 '5'다. 아, 그러고 보니 도둑들을 묶어 말할 때는 '5섯명'이 제격이겠다. 도둑 5섯명….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냐고? 당연하다.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賊)'이다. 을사조약 체결에 참가한 '5섯명'의 매국노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였지 않은가. 

도적을 세는 단위로 숫자 '5'를 계승한 이가 바로 시인 김지하다. 1970년 5월에 <사상계>를 통해 삽화와 함께 발표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비판한 다섯 부류의 도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다.

시인은 당시 사회 지도층의 부패상을 '을사오적'에 풍자적으로 비유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 일로 <사상계>는 강제로 폐간되었다. 시인을 비롯한 출판 관계자들도 반공법 위반에 반 군가단체 찬양 고무 동조죄로 엮여 줄줄이 구속되었다. 이른바 '사상계 필화사건'이다.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은 당시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는 '변절' 논란을 스스로 불러왔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총기가 흐려지는 법인가. 아니면 세월의 무상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 퀴즈를 풀어볼 차례다.

"다음은 우리 사회를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모습으로 바꿔가는 데 크게 방해되는 인사들의 대략적인 수를 가려서 나열한 것이다. 그 수를 바리바리 엮어서 오랏줄로 꽁꽁 묶으면 모두 얼마일까?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재벌과 고위 공무원 마흔 두 쾌, 여의도에 주로 서식하면서 국민은 안중에 없는 금배지 약 스물세 꾸러미,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걸핏하면 '종북'과 '빨갱이'를 들먹거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천오백이십팔 두름, 저 하나 살자고 생떼같은 목숨들을 차가운 바닷속에 수장시킨 인간들 너댓 손, 단 하나의 인명도 구조하지 못했으면서도 국민 앞에 진심으로 머리숙여 사죄할 줄 모르는…."

일일이 헤아리자면 한도 끝도 없겠다.



태그:#숫자, #단위, #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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