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금메달리스트 조해리가 5일 목동아이스링크에서 기자와 인터뷰 후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금메달리스트 조해리가 5일 목동아이스링크에서 기자와 인터뷰 후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박영진


"오늘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왔어요! 하하!"

소치올림픽에서 감동의 질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조해리(고양시청)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조해리는 지난 2월에 막을 내린 2014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4년 전 밴쿠버에서 겪었던 '계주 실격의 악몽'을 씻어냈다.

2002년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해 어느덧 12년 차 국가대표가 된 그녀는 이제 명예로운 은퇴를 앞두고 있다. 지난 5일 시합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다시 찾은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그녀를 만나봤다.

소치, 어느 때보다 부담감 없이 편했다

조해리에게 지난 소치 올림픽은 두 번째로 출전한 올림픽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올림픽을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부터다. 당시 주니어 국가대표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나이 제한 때문에 솔트레이크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4년 뒤, 2006년 토리노 올림픽 당시에는 최종 선발전을 앞두고 불의의 부상을 당해 올림픽 참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출전한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석연찮은 심판 판정으로 계주 5연패를 눈앞에서 놓쳤다. 올림픽 도전만 무려 네 번. 여자선수로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마지막으로 도전한 소치올림픽은 그녀에게 마지막 도전이자 꿈의 무대였다.

"어느 시합이든지 조금씩 떨리지만, 오히려 이번에는 조금 더 편했어요. 뭔가 자신이 있었나 봐요. 계주도 그동안 정말 잘 맞아왔고 시합 때 성적도 좋았고요. 밴쿠버 때는 긴장을 많이 했는데, 이번(소치 올림픽)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계주 경기가 열리던 날. 한국 여자 쇼트트랙 계주팀 멤버 5명은 경기에 앞서 손을 모으며 "파이팅"을 외쳤다. 힘을 모아 최고의 레이스를 펼치기 위한 이들의 각오는 특별했다. 리더 조해리는 남몰래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웃었다.

"그 '파이팅'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신경 쓰였어요. 저는 짧으면서도 편한 말 한마디를 항상 준비해놨었어요. 특히 올림픽에서는 신경이 더 쓰였어요. 제가 첫 올림픽 출전 당시 실력 발휘를 다 못 했기 때문에 이번 계주 만큼은 죽기 살기로 울며불며했어요. 이번 계주 전에는 '하던 대로만 하자, 더 잘하려고도 하지 말자'라고 마음먹었어요. 너무 잘해왔기에 개개인이 최선을 다하고, 우리를 믿는 게 중요했죠."

소치에서도 그들의 작전은 다를 게 없었다. 조해리는 "준결승에서 최대 속도로 빠르게 타서 결승에서 레인 1번을 배정받으려고 했다"라면서 "결승에서는 뒤에서 추월해 나오는 것보다 처음부터 우리가 앞에서 이끄는 레이스를 하고자 했다"라고 회상했다. 자신들의 계획대로 딱딱 맞아떨어졌던 계주 결승전, 막내 심석희가 폭풍 같은 추월을 하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감격의 눈물바다를 이뤘다.

맏언니 리더, 부담감은 말할 수 없는 '짐'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조해리가 5일 오후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쇼트트랙 선발전에 출전한 후배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조해리가 5일 오후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쇼트트랙 선발전에 출전한 후배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박영진


조해리에게는 그동안 '맏언니'라는 타이틀이 항상 따라붙었다. 팀 내에서 가장 어린 심석희(세화여고)와 11살 차이가 나는 그녀는 후배들을 다독여주고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남모를 부담감이 있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조해리는 지난 시간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놨다.

"저도 힘들고, 쉬고 싶고…, 모든 것들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팀 내에서는 맏언니이기 때문에 운동뿐만 아니라 뭐든 잘해야 후배들이 잘 따라올 수 있잖아요. 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선수들도 흔들릴까봐 걱정이 됐어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고 혼자 넘겼죠. 나이 차가 나다보니 '이게 너무 힘들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힘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털어놓고 편하게 기대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그녀의 리더십은 소치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계주 결승전에서 1위로 들어오고 난 뒤 태극기를 흔들며 링크장을 돌 때 그녀는 후배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잡으며 연신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

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스위트 리더'(Sweet leader)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조해리는 "후배들에게 가끔씩 채찍질도 하면서 힘들게 맞춰왔고, 후배들이 잘 따라와 줬다"라면서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꿔온 올림픽 시상대에 선 순간 조해리는 다섯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플라워 세러모니 때 눈물이 많이 났어요. 많은 분들이 환호해주시고 태극기를 흔들어주셨어요. 단상에 다함께 올라가니 더 좋더라고요. 저는 시상식을 제 추억 속에 남기고 싶어서 오랫동안 천천히 봤어요. 잊기 싫었죠. 항상 보다 보니 옛 생각도 나면서 무척 많이 울었어요."

쇼트트랙, 얼음위의 희열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조해리의 경기 모습. 사진은 지난해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현장이다.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조해리의 경기 모습. 사진은 지난해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현장이다. ⓒ 박영진


이제 은퇴를 앞둔 조해리. 긴 시간동안 정상을 지켜오며 태극마크를 단 그녀는 모든 쇼트트랙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의 전성기는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변수가 많고 부상이 잦은 쇼트트랙에서 혹독한 훈련까지 감당해야 하기에 여자 선수들의 수명은 매우 짧은 편이다. 하지만 조해리는 그런 틀을 당당히 깼다. 그녀는 밴쿠버 올림픽 이후 오히려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으며 대기만성을 이뤄냈다.

"저는 밴쿠버 올림픽 때도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기(소치 올림픽)까지 올 줄은 생각 못 했어요. 여자 선수가 이 나이까지 빙판 위에서 뛰는 경우는 국제대회에서는 별로 없거든요. 하지만 밴쿠버 올림픽이 있었기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준비해온 모든 것을 큰 시합에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하는 징크스도 깨고 싶었어요.

오히려 멀리 생각하지 않았어요. 즐기면서 하니 밴쿠버 다음 시즌에 세계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을 하고 아시안게임에서 최고 성적을 거둘 수 있었어요. 제가 언젠가 석희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었어요. '멀리 보지 않고 매 시즌 최선을 다하면 평창은 금방 올 거'라고요."

그녀는 자신에게 혹독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철저히 했던 것은 체중관리였다. 조해리는 "체중이 늘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힘들어진다"라면서 "원심력이 센 쇼트트랙 경기에서 스피드는 무게와 힘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종목을 다해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 갈수록 다리가 무거워지고 힘이 들기 때문"이라고 몸 관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한편, 조해리는 은퇴 이후 행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입장이다. 내년에 소속팀 고양시청과의 계약이 만료되기 전까지 국내대회 출전은 계속 할 예정인 가운데, 그녀는 현재 자신의 팀에서 여자 후배들 틈틈이 도와주고 있다. 조해리는 4년 뒤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준비하는 후배들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금 여자 선수 중에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요. 소치올림픽에서 심석희 선수를 비롯해 평창에 출전할 선수들이 많은데 올림픽 경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지만,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 크거든요."

아름다운 청춘을 하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와 보낸 지난 세월. 그녀는 오랜 시간 쇼트트랙을 했기에 추억도 많았다. 그녀는 왕멍(중국)과 캐서린 로이터(미국·은퇴)가 가장 까다로웠던 상대라고 평했다. 개인적으로는 캐서린과는 친하기도 하다고.

조해리는 스케이트를 벗은 뒤 공부와 함께 스케이트 위주가 아닌 제2의 인생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배우지 못했던 것을 공부하고 사소한 것들을 해보고 싶다고. 그녀가 지금까지 모든 것을 걸었던 쇼트트랙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얼음에서 느끼는 희열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커요. 특히 쇼트트랙은 발 내밀기 전까지 모르는 것인데다가 변수도 많아 재미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1등으로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잖아요. 이런 느낌은 이젠 정말 끝난 것 같아요. 마치 책을 읽다가 마지막에 마침표에서 끝나고 더 이상의 페이지가 없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느낌이랄까요. 지금부터 내년까지는 못다 한 이야기 중 한 페이지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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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조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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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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