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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 우연히 초등학교 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다. 요즘 초등학교 교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솔직히 그때 처음 알았다. 전화기는 물론,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이 놓여있었고, 창가 쪽에 조그만 화단이 정원처럼 예쁘게 가꿔져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환경이다. 장난감 같은 책걸상들과 어울리며, 마치 동화 속 풍경 같았다.

더욱 낯설었던 건 왁자지껄한 수업 풍경이었다. 시작하고 10분이나 지났을까.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저요, 저요'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질문에 앞 다퉈 답변하려는 경쟁이지만, 답변이 끝나도 소란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아이들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변을 해주었다. 개중에는 수업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황당한 것도 있었지만, 질문을 무지르면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아이들에게 최대한 자상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럴수록 외려 아이들의 '장난'은 짓궂어졌다. 이래서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이후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존경하게' 됐다. 그 소란스러움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고, 주도적으로 수업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마음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언뜻 보면 조금은 분위기가 산만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수업시간 40분 동안 적어도 아이들의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생기가 돌았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의 질문이 왜 사라졌을까

생뚱맞게 이태 전의 기억을 떠올린 건, 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내 수업과 자꾸만 비교가 됐기 때문이다. 확연히 다른 두 교실 분위기의 원인이 뭐냐고 굳이 묻는다면, '철부지' 초등학생의 생기발랄함과 '다 큰' 고등학생의 과묵함 차이라고 두루뭉수리 눙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의 '질문'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됐다. 초등학교에 견줘 배우는 과목이 몇 배 더 많아졌고 수업시간도 훨씬 길어졌지만, 아이들은 당최 뭘 궁금해 하질 않는다. 호기심이 사라져버린 걸까.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수업내용 중 궁금한 게 있다면 질문하라"고 말하지만, 늘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초점 없는 쾡한 눈에 심드렁한 표정, 그리고 축 처진 어깨. 누군가 요즘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도화지에 그린다면 예외 없이 이런 모습일 거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보이면 다행이지, 캔버스 앞에서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졸음에 못 이겨 고개 떨구고 말 것이다. 수업시간 '질문'이 없다는 건, 알아들은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무기력해져버렸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듯싶다.

초등학교 시절 앞 다퉈 '저요, 저요'하던 아이들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치면서 빠르게 수업시간이 '조용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말을 빌자면, 중학교 2~3학년만 돼도 수업시간 질문하는 아이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서 중학교 정도 되면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수험용 지식이 너무 많아져, 수업시간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을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더러는 수업시간 말미에 질문을 하면 짧은 쉬는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며, 다른 친구들 눈치 보느라 질문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시나브로 질문이 사라지면서 무조건 '외우고 보는' 학습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역사 과목을 '지루한' 암기 과목으로 여기는 아이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수업시수에 비해 공부할 내용과 분량이 많다보니, '한가하게' 질문이나 하면서 아까운 수업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교사 입장에서 일방적인 주입식으로 수업한다 해도 진도를 맞추기가 빠듯한 게 엄연한 현실이다.

현장을 잘 모르는 '책상머리' 관료들이야 쉽게 말한다. 교과서 내용을 교사가 수업시간에 미주알고주알 다 가르치려하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수능이든 교내평가든 미래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가당치도 않을뿐더러, 보충수업과 야자에다, 학원수업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이들에겐 그럴 시간도 없다.

공부할 분량이 많기도 하지만, 내용마저 어렵다. 그 많은 사건과 년도, 인물과 업적 등을 굳이 다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비단 역사 과목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수학이 세계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는 건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그래선지 이젠 수학 풀이 과정까지 '암기하는 비법'이 아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하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졸업 후에도 버려지지 않는 교과서를 보고 싶다

배운다는 건 그것을 통해 꿈을 키워갈 수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앎의 기쁨과 삶의 지혜를 얻어가는 과정이 곧 공부다. 그런데 별 쓸모도 없을뿐더러 잔뜩 어려운 내용만 일방적으로 읊어대는 수업과 그것을 평가하려는 시험이란 오로지 서열을 매겨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한 목적 말고는 없다. 이는 아이들도, 학부모도, 교사들조차도 두루 공감하는 바다.

아이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이구동성 첫째가 시험이고, 둘째가 공부라고 답한다. 수업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무조건 외워야 할 것들을 안내하는 시간이며, 공부를 한다는 건 그들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행위가 되고 만 현실에서 이는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질문'이 사라진 교실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예전에 굴지의 어느 대학교수가 언론에서 신입생들의 학업 수준이 낮아 강의 자체가 힘들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내용을 배우고 왔음에도 그렇다면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가 잘못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과 교사들의 무능을 넌지시 꼬집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지수가 한참 틀렸다.

심지어 초등학교의 교육과정조차 대학입시에 종속된 지 이미 오래라는 건 그도 잘 알 것이다. 또, 그 많은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누가 만들었나. '재미있는' 교과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각 과목 교과서마다 분량을 대폭 줄이고, 내용을 보다 쉽게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교과서가 오로지 변별력을 위한 입시의 도구, 곧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버려지지 않고 아이들의 책꽂이에 소중히 보관된 교과서를 보고 싶다. 이따금 다시 꺼내어 읽으며 삶의 지혜를 얻어갈 수 있는 그런 '장서'였으면 좋겠다. 교과서 저자들은 알고 있을까. 수능이 끝나면 분풀이 하듯 가장 먼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바로 교과서라는 사실을.


태그:#교과서, #암기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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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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