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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주변 전형적인 어촌마을의 모습.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주변 전형적인 어촌마을의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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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엔 한국 경상북도만 한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티베트 히말라야 산자락인 탕그라산에서 발원해 중국본토와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 장장 4200km를 관통해 흐르는 메콩강과 직접 연결돼 있다.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호수이기도 하다.

크메르인들은 이 호수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통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왔고, 우기 때 범람을 통해 만들어진 기름진 땅을 일구어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과거 12세기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부강하고 화려한 앙코르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톤레삽'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호수 덕분이었다. 지금도 수십 만명에 이르는 어촌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 시내에서 차로 대략 1시간 30분쯤 걸리는 캄퐁플럭이란 작은 어촌마을을 찾았다. 친구인 폴라가 모는 트럭을 타고 붉은 황토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5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평소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총크니어보다 시내에서 멀다. 주로 유럽출신 배낭여행객들이 입소문을 듣고 찾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민물고기를 잡거나, 가두리양식장에서 메기나 가물치, 민물새우 등을 기르며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높은 나무 기둥 위에 집을 짓는다. 이 지역은 건기와 우기의 수심이 무려 20m 이상 차이가 나 집을 높게 지을 수밖에 없다. 우기가 한창일 때인 8~9월엔 호수의 물이 범람해 집 앞까지 차오를 때도 많다. 하지만 11월부터 시작된 건기가 그 이듬해인 3~4월 정점에 이르면, 마을에는 캄보디아 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갑자기 집 앞에 너른 공터가 생기고, 반쯤 물에 잠겨 있던 거대한 망그로브 나무숲 사이로 작은 오솔길도 생긴다. 배가 드나들던 좁은 강은 어느새 트럭이 다녀도 괜찮은 신작로로 변신한다.

20m 위에 지은 수상가옥, 직접 올라가봤더니...

 마을 동력선 선착장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는 나릇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다.
 마을 동력선 선착장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는 나릇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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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력선을 빌려서 타기 위해 선착장에 갔다가 조수로 일하는 8살 남짓한 어린 소년과 마주쳤다. 이름은 나릇이었고 나이는 11살이었다. 사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강 건너 먼발치로 보이는 높은 나무기둥 위 집들 중 가장 남루해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이 소년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릇은 아무 망설임 없이 우리 일행을 자신이 사는 집으로 안내했다.

20m 위에 있는 집을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네 아이의 엄마인 따은(35)은 현재 나릇을 포함한 3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15살인 큰딸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고 했다. 따은의 남편 소큰의 직업은 어부다. 하지만 직접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은 그런 어부는 아니고 남의 고깃배에서 일한다고 했다. 남편은 하루에 1만 리엘 정도를 버는데,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700원 정도다. 가끔 고기가 많이 잡히는 날에는 덤으로 잡은 민물고기를 공짜로 얻기도 한다고.

부부는 둘 다 20살이 채 되기 전에 만났다. 따은은 남편보다 4살 연상이다. 이들 부부의 부모들은 1970년대 중반 크메르루즈군의 의해 인근 읍내에서 쫓겨나 이곳 수상촌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크메르루즈군이 물러난 후 다시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마땅히 장사할 밑천도, 농사를 지을 땅도 없던 터라 그냥 이 어촌 마을에 눌러 살게 되었다. 여기서 자란 따은과 다른 형제들도 이웃동네 출신 짝들과 만나 결혼했다.

1975년부터 79년까지 약 4년간 이어진 크메르루즈 정권시절 전체 인구중 1/4에 해당되는 양민 2백만 명이 죽은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수도 프놈펜을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유토피아 건설을 추진하던 폴포트 정권에 의해 강제로 농촌에 보내졌다.

도시에서 쫓겨 온 이들은 '신(新)인민'이라 불리며, 시골 원주민들보다 더한 차별을 받았다. 원래부터 농촌에서 살던 따은의 가족들은 '구(舊)인민'으로 분류되었다. 덕분에 신 인민들처럼 협동농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지는 않는 대신, 주거지 내에서 고기를 잡거나 작은 텃밭을 만들 수는 있었다. 따은이 태어난 시기는 크메르루즈가 베트남군에 패해 정글로 숨어들어간 후인 지난 1980년 무렵이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그녀보다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 3명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매년 1~2월, 캄보디아 어촌에서 벌어지는 풍경

 캄보디아 민물고기 젓갈 '프라혹'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인 어민들
 캄보디아 민물고기 젓갈 '프라혹'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인 어민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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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물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마을 주민 대여섯 명이 모여 프라혹이라 불리는 민물고기를 이용해 젓갈을 만들고 있었다. 캄보디아 어촌에선 해마다 1~2월에 젓갈을 만든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민물생선젓갈이다. 캄보디아 대표음식으로 알려진 이 젓갈은 19세기에 캄보디아를 찾은 유럽인들에게 '악마의 냄새'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작고 가난한 어촌마을이었지만, 형편이 좀 나은 집들은 크고 작은 나룻배를 최소 두 척 이상 가지고 있었다. 가장이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나가면, 남은 배들은 남은 가족들의 몫이 되어, 시장을 가거나 학교를 갈 때 요긴하게 쓴다. 이날 오후에 잠시 들른 교장 선생님댁은 부잣집이라 그런지 배를 다섯 척이나 가지고 있었다.

정오 무렵, 따은의 집을 나와 마을 노천식당에서 파리들과 한바탕 일전을 벌이며, 돼지고기볶음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는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더 둘러 보았다. 이 마을 수상촌에는 현지 원주민인 크메르인에 비해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조금은 달라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상당수는 캄보디아인이 아닌 베트남 사람들이다. 톤레삽 호수에 사는 사람들 중 최소 15~20만명 이상이 베트남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 80년대 초 베트남 공산화과정에서 당시 메콩강줄기를 타고 도망 나온 일명 '보트피플'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그들끼리는 여전히 베트남어를 사용하지만, 자식들은 캄보디아 말을 쓴다.

오후 2시쯤 되자,  따은의 두 아이도 점심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서둘렀다. 기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나릇과 두 동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강 건너편에 있었다. 불과 10여 년 전에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작은 나룻배를 타야만 했지만, 지금은 학교까지 다리가 놓여 더 이상 배를 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재미삼아 양은 대야로 만든 배를 타고 학교에 갈 때도 있다고 한다. 마침 양은 대야 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몇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양손을 노로 삼아 저어 나아가는데 속도가 빨라 놀랐다.

대야배를 이용해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

 강 건너 학교가는 길에 몇 년 전 새로 다리가 놓였는데도 간혹 재미삼아 양은 대야를 타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
 강 건너 학교가는 길에 몇 년 전 새로 다리가 놓였는데도 간혹 재미삼아 양은 대야를 타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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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모래 둔덕에 양은 대야 배들이 무사히 정박하자, 아이들은 물을 건너기 위해 벗어서 비닐봉지 속에 넣어둔 옷을 꺼내 갈아입고 각자의 대야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이 초등학교에는 300여 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다. 학생 수에 비해 교실이 부족해 오후반과 오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벽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낙서로 지저분했다. 책상과 걸상도 60년대 우리나라 교실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창문 틈으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대부분 아이들이 열심히 뭔가를 받아쓰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장난치며 딴짓하는 녀석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상급학교 진학률은 매우 낮다. 교사들도 박봉에 시달리다보니 교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적은 편이다. 나릇이 다니는 학교 교장에 따르면, 이 학교 아이들 중 중학교로 진학하는 확률은 대략 50~60% 수준이라고 한다. 이는 전국 평균보다도 낮은 수치다. 남자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률이 여자아이들보다 더 높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과거 모계사회였던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캄보디아 시골마을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울 경우 딸보다는 아들을 상급학교에 보낸다. '아들선호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의 돈벌이가 낫다는 근대 산업화시대의 경제논리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듯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마을 여자아이들 중 절반 이상은 최종학력이 초졸일 확률이 높다. 결혼 전까지는 집안일을 돕는데, 최근엔 도시 봉제공장에 취직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이 강화돼 미성년자들은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지만, 간혹 신분증과 서류를 위조해서 불법취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3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별부패지수에서 전체 조사국 177개국 중 160위를 차지한 캄보디아에선 간단한 출생관련 공문서 조작이나 위조가 쉽다. 공장업주들도 서류 등이 위조됐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손이 부족할 때는 미성년자를 일꾼으로 받기도 한다.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틈을 타 이 학교 운동장과 교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아이들이 먹을 물이 있는지 확인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옆에도 손을 씻을 물조차 없었다. 최근 캄보디아 교육부 담당자가 현지신문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1만1000여개에 달하는 전체 학교 중 식수시설을 갖춘 학교는 전체 59% 정도다. 2013년 동안 깨끗하지 못한 물을 마셨거나, 위생 문제로 사망한 어린이 수가 무려 2000여 명이나 됐다. 하루 최소 5~6명 정도가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돼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작년 한해 이 나라에서 사망한 교통사고 사망자수 1912명보다 더 많은 수치다. 

쌀이 남아돌지만, 쌀값은 싸지 않았다

 이 어촌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
 이 어촌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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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남짓한 오후수업이 끝나자, 교장선생님이 직접 나와 종을 쳤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릇은 여전히 쉴 틈이 없다. 아침에는 관광용 동력선 조수로 일을 하고, 학교수업을 마친 오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장작배달에 나선다. 동력선 조수로 일하면 하루 1000리엘(한화 260원)정도를 받는다고 나릇은 말해주었다.

나릇의 엄마 따은은 남편이 고기 잡으러 나간 사이 마을 주변 언덕을 돌아다니며, 썩은 나무 등걸이나 잡나무 가지를 모아 장작을 만든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그런지 장작을 다루는 모습이 웬만한 장정 못지않다. 학교에서 돌아온 시나가 어린 막내를 돌보며 집을 지키는 대신, 큰 아들 나릇은 엄마 뒤를 따라 집을 나선다.

톤레삽 수상가옥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을 짓기 위해 매일 장작을 사용한다. 석유곤로를 쓰는 집도 간혹 있지만 화재 위험이 높고, 기름도 비싸 잘 쓰지 않는다. 따은은 오늘도장작을 팔기 위해 작은 나룻배를 타고 수상촌 마을을 돌아다닌다. 기자가 염치없이 작은 나룻배 뒷자리에 얻어 타고 망망대해처럼 드넓게 펼쳐진 톤레삽호수로 나섰다.

먼발치에서 누군가 부르자 따은은 그쪽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었다. 배에 작은 모터가 달려 있지만, 파도가 일거나 물살이 세지 않으면 가급적 노를 저어 간다. 팔뚝이 얇은 나릇도 엄마를 도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젓는다. 1kg 남짓한 장작 한 묶음의 가격은 500리엘이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130원 정도 된다. 장작을 건네준 따은은 꼬질꼬질한 지폐를 누가 볼까 싶어 허리춤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는다.

 나릇의 엄마 따은은 오전 내내 모은 나무가지를 연료용 장작으로 판다.
 나릇의 엄마 따은은 오전 내내 모은 나무가지를 연료용 장작으로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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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은이 번 돈을 계산해보니, 대략 4000리엘쯤 된다. 한화로 대략 1100원 정도 되는 돈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한 달 동안 열심히 벌어도 30달러가 안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우기철이 되면 그나마 마른 나무장작을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장작을 찾는 사람들도 줄어든다고 했다. 열심히 벌어야 먹을 쌀을 살 수 있다고도 했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물이 풍부하고 햇볕은 뜨거우며 국토의 80% 가량이 지평선이 내다보이는 너른 평야지대라, 쌀농사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관계수로가 있는 지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1년 3모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쌀 만큼은 풍족한 나라다. 작년 정부발표로는 무려 300만톤이나 되는 쌀이 남아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 쌀값은 그리 싼 편이 아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질이 낮은 쌀 50kg 한가마니도 대략 25~30달러 정도나 된다.

이들 가족은 평소 동네 재래시장에서 kg 단위로 파는 돌이 섞인 묵은 봉지쌀을 사먹는다. '자스민'이라 불리는 캄보디아 품종 쌀이 세계 쌀품평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난 적 있지만, 나릇의 엄마 따은은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런 쌀은 먹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하수구 한쪽에 마련된 30cm짜리 구멍의 용도

 이 어촌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최소 1대 이상의 작은 나룻배를 가지고 있다.
 이 어촌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최소 1대 이상의 작은 나룻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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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쯤 되자, 톤레삽 호수에도 시원한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간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따은과 함께 동네 재래시장을 찾았다. 따은 가족을 따라 나선 재래시장은 우리네 60년대 시골장터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이었다.

따은이 처음 발길을 멈춘 곳은 돼지고기를 파는 식육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300그램 정도의 비곗덩어리나 다름없는 돼지고기를 5000리엘(한화 약 1300원)에 샀다. 그리고 야채가게를 들러 이름 모를 야채 약간과 당근, 그리고 수박도 두덩어리를 샀다. 나릇은 큰아들답게 의젓한 모습으로 엄마의 뒤를 따르며 장바구니를 대신 들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창밖으로 톤레삽 호수에 펼쳐진 노을이 장관이었다. 따은의 남편 소큰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왔다. 역시 오늘도 빈손이었다.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았나보다. 따은은 빈손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니 속이 상했는지 별 말이 없다. 따은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아이들은 학교숙제를 시작한다. 시나는 몽당연필을 손에 쥐고 열심히 공책에 뭔가를 적는다. 하지만 큰오빠 나릇은 그나마도 건성으로 흉내만 내고 책가방을 팽개친다. 따은도 아이들 숙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화롯불을 지피고 있는 따은 곁으로 슬쩍 다가가 혹시 글자를 아냐고 물으니, 모른다는 답이 바로 나왔다.

캄보디아는 문맹률이 높다. 글을 아는 사람들 중에는 읽을 줄만 알지 쓸 줄 모르는 반쪽짜리 문맹자도 상당수다. 크메르어 문자는 산스크리트어를 변형시켜 만든 글자로 기본 자음과 모음 수만 50여개가 넘어 습득이 쉽지 않다. 더욱이 실제발음과 문자 사이의 차이도 많아 일일이 암기를 해야 하는 단어도 많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글자만 읽고 쓸 줄 알아도 나름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자체계가 캄보디아 국가경제발전에 또 다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어촌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재래시장의 모습. 망고같은 열대과일은 물론이고, 메뚜기나 땅강아지, 귀뚜라미와 물장구벌레 같은 벌레 튀김도 현지인들의 즐기는 대표적인 간식거리다.
 이 어촌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재래시장의 모습. 망고같은 열대과일은 물론이고, 메뚜기나 땅강아지, 귀뚜라미와 물장구벌레 같은 벌레 튀김도 현지인들의 즐기는 대표적인 간식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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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은네 다섯 가족이 사는 집은 방과 거실, 부엌이나 화장실 같은 구분은 따로 없었다. 대나무와 열대 야자나무를 엮어 만든 10평 남짓한 집에서 안방과 아이들이 자는 작은방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방 중앙을 가로질러 걸쳐놓은 '끄로마'라고 불리는 천 조각 덕분이다. 부엌엔 찌그러진 양은그릇 몇 개와 식기, 그리고 음식조리를 위한 화로 한 개가 전부다. 설거지물을 버리는 하수구 한쪽에 직경 30cm쯤 되는 작은 구멍이 보였다. 물어보니, '화장실'이라고 했다. 따은은 주로 밤에 급할 때 쓴다고 말했다.

방 벽에는 금빛도금을 한 플라스틱 사진액자들이 몇 개 걸려 있었다. 도시로 돈을 벌러 나갔다는 15살 큰딸의 모습도 보였다.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캄보디아 정장을 입은 채 누군가와 사진을 찍은 따은의 사진도 있었다. 친척 결혼식 때 사진인 듯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결혼식은 화려한 편이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도 꼬박 2~3일간 결혼식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친구나 친지 결혼식 때 이들이 내는 축의금은 통상 10~20달러 정도 수준이다. 결혼을 할 때도 지참금이 필요하다. 주로 신랑이 신부측에 전달하는데 지참금 규모가 통상 서민가정 기준 2000~3000달러 수준이다.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못 하는 시골 노총각들도 의외로 많다. 참고로 훈센정부가 합의한 캄보디아 봉제근로자 최저임금은 2014년 2월부터 미화 100달러이다.

"아이들이 무사히 졸업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캄퐁프록 마을 전경 비교적 지대가 높은 좌측 언덕은 일년내내 우기철에도 물이 차지 않는 곳이다. 이곳엔 작은 불교사원과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흰소 두마리가 끄는 수레가 건기에 접어들어면서 생긴 황톳길을 지나가고 있다.
▲ 캄퐁프록 마을 전경 비교적 지대가 높은 좌측 언덕은 일년내내 우기철에도 물이 차지 않는 곳이다. 이곳엔 작은 불교사원과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흰소 두마리가 끄는 수레가 건기에 접어들어면서 생긴 황톳길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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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설거지를 한 뒤 잠시 쉬고 있던 따은에게 뜬금없이 소원이 뭐냐고 물어봤다. "아이들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해서 육지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따은은 기자 손에 들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마도 따은의 눈에는 비싼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은 돈도 많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이들 다섯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외국인 손님이 있어서인지 따은은 꽤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방바닥에 펼쳐놓은 음식 중 먹을거리는 조금 전에 산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구은 것과 야채랑 당근을 기름에 데친 게 전부였다. 자동차 배터리로 켠 50촉짜리 백열등 아래서 식사를 마쳤다.

창밖을 보니 해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7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떠나기 전 함께 기념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그만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 버려, 아쉽게도 가족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이었지만, 헤어짐이 아쉬운가보다. 그중 따은이 제일 아쉬워했다. 따은의 남편 소큰과 나릇도 선한 미소로 배웅을 해주었다. 이날 따은네 가족과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더듬으며 간신히 내려와 폴라가 대신 끌고 온 트럭 앞자리에 몸을 실었다. 전조등을 켰는데도 어두워서 도로가 잘 보이지 않았다. 경적을 울려 따은과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사이드미러로 손을 흔드는 따은 가족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시야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둘째 딸 시나는 하루종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어린 막내 여동생을 안고 다닌다.
 둘째 딸 시나는 하루종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어린 막내 여동생을 안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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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프라자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