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허슬>의 5명의 주역을 소개합니다.

<아메리칸 허슬>의 5명의 주역을 소개합니다. ⓒ 누리픽쳐스


데이빗 O. 러셀 감독은 명실상부 '배우를 사랑한 감독'의 현재형일지 모르겠다. 크리스찬 베일은 <파이터>에서 그를 만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무관의 제왕'의 한을 풀었고, 제니퍼 로렌스는 바로 작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22살이란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 그가 이번엔 무려 5명의 배우를 전면에 내세웠다. 올해 골든글로브 코미디/뮤지컬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아메리칸 허슬>은 에이미 아담스와 제니퍼 로렌스가 여우주·조연상을 사이 좋게 나눠 가졌다. 여기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재평가 받은 브래들리 쿠퍼까지 가세, 주요 남녀배우 네 명 모두 올 아카데미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러셀 사단'에 처음 합류한 <어벤져스>의 제레미 러너도 만만치 않은 연기를 자랑한다. 

이렇게 배우들의 향연만으로 138분이란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아메리칸 허슬>은 사기꾼 커플과 그들을 이용해 뇌물수수 정치인을 잡기위한 함정수사를 펼치는 FBI의 이야기다. 여기에 사기꾼의 진짜 아내와 청결한 시장이 얽히면서 위태로운 로맨스와 생존을 위한 극적인 사기극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는 실화"(Some of this actually happened)임을 오프닝 자막에 박아 놓고 시작하는 만큼 1970년대 후반 미국의 공기와 시대정신이 캐릭터들에 스며들어 있다. 한국영화로 따지면, <도둑들>과 <범죄와의 전쟁>을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그 캐릭터들로 완벽하게 변신한 배우들을 보는 맛이 일품인 <아메리칸 허슬>을 5명의 배우와 그들이 소화한 캐릭터들의 명장면으로 살펴보자.

크리스찬 베일
- 머리 벗겨진 배불뚝이 희대의 사기꾼 어빙

 <아메리칸 허슬>의 크리스찬 베일

<아메리칸 허슬>의 크리스찬 베일 ⓒ 누리픽쳐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뉘지 않아. 온통 회색이지"라는 대사로 대변되는 이 지극한 냉소주의자는, 그러나 '사랑'을 마음에 품은 남자다. 아내 로잘린(제니퍼 로렌스 분)에겐 이혼을 요구하면서도 아들은 지극히 아끼고, 또 운명처럼 만난 애인(?) 시드니(에이미 아담스 분)에게는 "진짜 사랑"을 읍소한다. 금융 사기가 운명이자 비즈니스인 어빙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사기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파격이란 이런 것이다. 20kg의 증량과 대머리 가발, 그리고 터질듯 한 '올챙이배'까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로 (외모만은)반듯한 백인남성의 이미지가 컸던 크리스찬 베일은 재회한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지휘 아래 인생 최대의 열연을 선보인다. 다정한 듯 신경질적이고, 냉철한 듯 인간적인 복잡다단한 인물을 연기하며 극 전체를 묵직하게 관장하는 크리스찬 베일의 명연은 따로 명장면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에이미 아담스
- '가짜'보다 '진짜'를 갈구하는 치명적 미녀 시드니

 <아메리칸 허슬> 중 시드니의 유혹의 기술이 담긴 가장 섹시한 명장면.

<아메리칸 허슬> 중 시드니의 유혹의 기술이 담긴 가장 섹시한 명장면. ⓒ 누리픽쳐스


1970년대 미국은 보잘 것 없던 바의 댄서가 뉴욕으로 건너와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이 시드니에겐 치명적인 매력과 이를 과시할 줄 아는 센스, 그리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사람은 믿는 것만 본다"던 시드니는 그래서 자신이 사랑한 어빙을 믿고 사기 사업에 빠져든다. 물론 그의 배신은 나의 배신. 어빙과의 인생을 건 사기극이 흥미로운 건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어빙과 시드니의 깊지만 시험받는 사랑 덕택이다.

영화 <다우트>의 신실한 수녀를 기억하는가. 그땐 몰랐다. 수녀복 속에 이런 매력적이고 치명적인 몸매가 숨어있을 줄은. 러셀 감독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제니퍼 로렌스가 그랬던 것처럼 에이미 아담스의 황홀한 육체를 천박하지 않게 전시한다. 깊게 파인 드레스와 몸매가 시선을 잡아끌지만, 실은 FBI 리치를 주방에서 유혹하던 '밀당'처럼 절제하는 순간이 더 짜릿하다. 그건 욕망과 생존 사이를 지혜롭게 줄타기하는 시드니를 에이미 아담스가 완벽하게 연기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허슬>의 '온리원'을 꼽으라면 단연 그녀다. 

브래들리 쿠퍼
- 정신 못 차린 공권력을 상징하는 '성공성애자' 리치

 <아메리칸 허슬>의 브래들리 쿠퍼

<아메리칸 허슬>의 브래들리 쿠퍼 ⓒ 누리픽쳐스


처음 이 사기꾼 커플을 잡았을 때 멈춰야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막히고 위대한 사기의 기술을 접하자 거물을 잡고 싶단 욕구가 꿈틀대는 것을. 사람 속이는 게 천직인 어빙 앞에서 '대장질'을 하다못해 시드니까지 넘보던 리치는 러셀 감독이 바라 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도덕성과 직업윤리는 내팽개친 채 앞만 보고 달렸던 시대를 리치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 밉지 않다. 그도 결국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했던 가난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니까.

<행오버> 시리즈나 < A-특공대 >의 섹시하고 유쾌하며 가벼운 듯한 캐릭터에 적역일 것 같던 브래들리 쿠퍼를 다시 보게 한 건 순전히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덕택이었다. 바람난 아내 덕분에 멘탈붕괴를 그럴듯하게 연기한 그에게 '성격파' 배우의 면모를 엿볼 줄이야. 특히 리치가 마지막 작전에 성공한 후 미친듯이 환호하는 장면은 브래들리 쿠퍼의 명장면이다. 코미디나 액션영화에서 소모되던 그의 재능이 러셀 감독을 만나 날개를 달았다.

제니퍼 로렌스
- 우울함과 신비로움은 한 끝 차이인 트러블 메이커 로잘린

 제니퍼 로렌스와 에이미 로렌스의 연기 대결이 빛을 발하는 장면.

제니퍼 로렌스와 에이미 로렌스의 연기 대결이 빛을 발하는 장면. ⓒ 누리픽쳐스


집에 자잘한 화재를 내는데 선수고,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으며, 걸핏하면 이혼은 안 된다고 협박하는 이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아내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이 말썽쟁이 아내가 집밖으로 나오자 어빙의 사기극을 뒤흔드는 주역이 된다. '사랑밖엔 난 몰라'를 목하 실현 중인 로잘린은 언뜻 보면 이해불가형 인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 속내에 지독한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잘린은 '현대인의 우울'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이 로잘린을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했다. 이 대체불가의 여배우는 물만난 고기마냥 스크린 위에서 펄떡거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화장실에서 맞붙어 싸우다 난데없이 키스를 날리는 장면은 오래오래 관객들의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이 어디로 튈지 모를 인물을 제니퍼 로렌스는 1990년생 배우가 연기했다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이어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까지 연달아 수상한 이 '연기 천재'는 할리우드가 발굴해 세계 관객들에게 선사한 근사한 선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제레미 러너
- <어벤져스> 호크아이가 연기한 강직한 시장 카마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레미 러너.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열연이 일품이다.

<아메리칸 허슬>의 제레미 러너.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열연이 일품이다. ⓒ 누리픽쳐스


원래 호락호락하지 않은 고기가 낚아 올릴 때 더 짜릿한 법이다. 10년 넘게 신뢰와 청렴을 바탕으로 뉴저지를 운영해 온 이 시장을 미끼로 잡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단 한 번도 죄책감을 보이지 않던 어빙은 '친구'가 되어준 이 정치인에게 가해질 타격을 근심하기 시작한다. 비록 덫에 걸려들었지만 끝까지 진심을 내보이는 이 캐릭터야말로 <아메리칸 허슬>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단단히 결합된 인물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야만 하는 가치 말이다.

<본 레거시>로 주춤했던 제레미 러너가 연기하는 이 시장 역할은 어찌 보면 평면적일 수도 있다. 자나 깨나 시를 위한 재개발 사업의 성공을 비는 강직한 시장은 그러나 제레미 러너의 깊이 있는 연기를 통해 숨결을 부여 받는다. 카마인이 이 모든 사실이 사기임을 고백하는 어빙에게 화를 내는 단순한 장면조차도 제레미 러너는 그저 격정보단 복잡다단한 감정으로 승화시킨다. 언제 어디서나, 든든한 조연은 좋은 영화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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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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