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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나에게 주방이란

농성장에서 밥이란 보약입니다. 정을 나눌 수 있고, 동지들의 대화의 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장에서 해먹는 밥은 투쟁기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전 (콜텍) 사업장을 벗어나 서울(인천) 상경 투쟁을 하면서부터 나는 밥을 하였고, 주방팀장은 2013년 2월 1일 콜트기타 공장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맡았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특별히 나만의 요리비법은 없습니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오래 끓일 뿐입니다.

희망식당 2호점 때 일이었습니다. 음식을 많이 하였는데도 예상했던 것보다 손님이 많이 와서 개점 1시간 만에 떨어져 동네 슈퍼를 뒤져 만들었던 기억입니다. 반대로 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하여 버리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땐 속상합니다. 농성장에서도 음식과 밥이 떨어졌을 때 밥 달라고 하면 속상하기도 하고, 짜증도 납니다. 음식을 실패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밥은 건강입니다. 주방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농성을 하더라도 1일 3끼는 챙겨 먹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현재는 천막 농성장에 수도시설이 없어 음식을 하지 못합니다. 저 대신 음식을 해주신 유희 선배님께는 늘 감사를 드립니다. 몰래 소리소문 없이 반찬을 해다 주시는 조혜영 시인께도 감사드립니다.

빠른 시일 내에 승리하여 농성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음식에 관한 제 꿈입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싸웁시다.

2013년 6월 7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농성장에서 밥은 보약... 열심히 먹고 열심히 싸웁시다"

임재춘 조합원은 자신에게 "밥이 보약"이고 "주방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썼지만, 내가 본 관점에서 그에게 농성장 주방은 가시밭길이다. 농성장의 밥은 그의 존재감 자체이기도 하지만, 무거운 의무이다. 전업주부의 우울함을 연상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기 임재춘 조합원은 무기력함과 심술을 동시에 불러오는 화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주방에서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 글은 복잡미묘한 감정 속에 쓰인 의무감과 같은 글이다. 거짓은 아니지만 "그래, 나는 주방팀장이니까!"라고 애써 자신을 추스르고 다짐하는 글이다.

이 글을 쓸 당시 임재춘 조합원은 밥 이외에 반찬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초 인천 콜트 공장에서 농성자들이 쫓겨난 후 벌어진 일이다. 천막 농성장에는 수도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냉장고며 각종 식기도구들은 용역에게 빼앗긴 상황이고, 농성장에 마련된 주방의 모든 것은 얼어 있었다. 그래서 연대하는 분들이 국이나 찌개, 몇 가지 기본적인 반찬들을 해다 주셨다.

날씨가 풀렸다고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수도시설은 없었고, 오히려 더운 날씨는 모든 걸 쉽게 상하게 할 뿐이었다. 전기사용을 할 수 없어 냉장고를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점점 짜졌고, 반찬 가짓수들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때 그때 필요한 반찬들을 음식 연대를 통해 조달하는 상황은 계속됐다. 이 상황은 임재춘 조합원에게 묘한 감정들을 불러오게 한다.

먼저 미안함이다. 음식을 해본 사람은 안다. 결과와 과정이 먹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누군가 음식을 대신 해다 주면 고마워하기 전에 미안해하는 게 음식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음식을 해다 주겠다는 의사를 밝혀도 쉽게 "그러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영역에 대한 불안이다. 임재춘 조합원은 힘들어도 자신이 차린 밥상에 사람들이 마주 앉아 맛나게 음식을 먹고 고마워하는 걸 많이 좋아한다. 그런데 자신이 주방팀장이면서도 반찬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 다른 이들에 의해 밥상이 채워지는 상황이 미안함과 고마움 이외의 불안함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피곤함이다.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상차림이나 설거지를 포함한 뒤처리는 늘 그의 몫이었으므로 그는 점점 부엌일을 힘들어했다.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구시렁구시렁… 그는 주방에서 혼잣말을 자주 했다. 간혹 나에게 "나, 정말 하기 싫어"라고 말하며 주부습진으로 허옇게 일어나는 손바닥의 살들을 떼어내곤 했다. 그래서 나도 반찬을 집에서 해와 나르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게 임재춘 조합원과 나 사이를 일시적으로 멀어지게 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위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인천 갈산동 콜트악기 공장 안,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농성장 식당에 쓰인 구호. 공장 안 농성장은 2013년 2월 철거당했다.
 인천 갈산동 콜트악기 공장 안,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농성장 식당에 쓰인 구호. 공장 안 농성장은 2013년 2월 철거당했다.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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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건 그는 지금도 주방팀장이다. 반찬 투정을 하는 농성자든 밥상 차리는 일에 그닥 협조적이지 않은 농성자든, 그들과의 한 끼 식사를 위해 밥을 하고 반찬을 한다. 지난해 임재춘 조합원의 '주부 우울증'은 자연적으로 치유된 것인지, 아니면 치유되지 못한 채 더 큰 의무감이 눌러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가을부터 다시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밑반찬들을 해다 주신다. 임재춘 조합원은 국이나 찌개를 끓이고, 종종 겉절이를 하고, 농성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통조림 햄을 굽는다. 또 겨울이 왔고, 식수는 얼거나 음식은 쉽게 식어가고, 설거지는 힘들다. 그런데도 "재춘 아저씨, 너무 맛있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그는 흰 치아 두 개를 수줍게 내보이며 미소 짓는다.

그의 말처럼 어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승리하여 가족에게 돌아가, 그가 애지중지하는 그의 딸들과 함께 일상의 밥상을 누렸으면 좋겠다. 가족들과 함께 밥 먹을 때가 제일 편안하고 좋다는 그의 말이 매일 매일 실현되는 날이 언제쯤 오려나. 그나저나 임재춘 주방팀장님, 고무장갑 좀 끼고 설거지 하세요.


태그:#콜트콜텍, #정리해고, #위장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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