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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형사 사건이든 사인간의 갈등이든 법정으로 소환된 사건에 대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 내리는 판결에는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철학과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판결이 판사에 대한 내·외부적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들어 처음으로 단행한 청와대 인사에서 법무비서관에 발탁된 김종필 변호사는 법원 재직 시절 여러차례 논란의 중심에 섰던 '문제 판사'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에게 줄줄이 유죄를 선고하고 일본 정부의 훈장을 받았던 '선배 법관'에게 면죄부를 준 판결은 여전히 회자되는 '문제 판결' 중 하나다.

친일옹호 판결에 이명박 정권 손 들어준 김 변호사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내정된 김종필 변호사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내정된 김종필 변호사
2010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했던 김 변호사는, 의열단원으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이수택 등 독립운동가 54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훈장을 받은 유영 판사의 후손이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판사는 검사가 기소한 적용 법령과 공소 사실을 기초로 유무죄와 형량을 결정하는 역할만을 한다", "판사가 항일운동 관련 사안을 재판했다는 것만으로는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일제시대 사법부 행태를 친일·반민족 행위라고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을 사법부가 뒤집어 사실상 면죄부를 준 셈이었다.

결국 거센 반발이 일었고 1년 뒤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이 뒤집혀 해당 사건은 '친일 행위'로 제자리를 잡았다. 

그런가하면 김 비서관은 이명박 정권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준 판결로도 유명세를 탔다. 대표적인 게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항의해 헌법 소원을 냈다 파면 등을 당한 군 법무관들이 낸 징계 취소 청구소송이다. 재판장을 맡았던 김 변호사는 국방부의 편을 들었다. 헌법소원을 행사할 권리는 법률에 의해 보장되지만 군법무관을 비롯한 모든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명박 정부의 '진보 성향 문화계 인사 찍어내기' 논란의 한 가운데 있었던 황지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교수직 박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황 전 총장이 교수직 박탈을 취소해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1심 재판장이었던 김 변호사는 "중도에 사퇴한 경우 교수직은 당연히 상실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파기환송했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후퇴 사례로 악명이 높았던 두 사건에서 김 변호사는 정권의 편에 섰다.

이번 인사에 담긴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대통령은 인사를 통해 통치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인사에는 통치와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메시지가 담기게 마련이다.

청와대가 논란을 일으켰던 김 변호사의 판결을  인사검증 과정에서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실패로 끝난 집권 1년차 인사 이후 강화된 검증 기준이 그대로 적용 됐다면 말이다.(만약 몰랐다면 이는 더 큰 문제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문제 판결'로 악명 높았던 김 변호사를 법원 업무를 관장하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발탁했다. 

논란으로 떠오른 박 대통령의 '2014년 1호 인사'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최근 단행된 검찰 및 경찰 인사까지 함께 보면 그 의미는 분명해 진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을 이끌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을 대구고검으로, 부팀장 역할을 했던 박형철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부장을 대전고검으로 발령하고,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당시 경찰 수뇌부의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총경 승진인사에서 탈락한 일련의 흐름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정권에 충성하라, 아니면 밀려날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집권 2년차 첫 인사는 사정기관과 사법부 장악용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비판은 국내에만 한정되는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과거사 도발 등 외교 문제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한일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일본의 과거사 도발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후 첫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2년차 국정운영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 신년 기자회견하는 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후 첫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2년차 국정운영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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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6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고 일본 정부는 중·고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내용을 의무적으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통제 강화에도 나서는 등 역사 왜곡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도 지난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양국 협력이 확대되어야 할 중요한 시기인데 안타깝다"며 일본 지도자들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시절 법령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사법부의 친일을 덮으려 했던 '문제 판사'를 청와대 참모로 불러들였다. 박 대통령은 김 변호사를 고위공직자로 기용함으로써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 내부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 셈이 됐다.

일본을 향해서는 과거사 왜곡을 강도높게 비판하던 박 대통령의 자가당착을 일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부의 역사적 논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박 대통령의 대일 메시지가 일본 지도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리는 없다.

김 변호사는 법무비서관 임명장을 받기 위해 그동안 맡고 있던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나 감사위원을 모두 사임하는 등 신변 정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잘못된 인사를 철회하기는 아직 늦지 않았다.


태그:#박근혜,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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