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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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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윽……, 윽, ……으음,

모충연(模忠然)은 혈도를 봉쇄당한 채 터져나오는 신음을 안으로 삭이며 온몸을 뒤틀었다. 무림의 전설로 숭앙받는 태허진인(太虛眞人) 경록인(景祿靷)인의 제자인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자가 미혼(迷魂)약이라도 쓴 걸까.

모충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새벽빛이 창을 희부윰하게 비추며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문살이 물에 젖은 것처럼 또렷하게 보이는 것을 보니 오늘도 안개가 세상의 담을 넘어오는 모양이다. 침입자도 안개처럼 스며들어 잠에 빠져 있는 모충연의 혈도를 짚어나갔다. 암흑 속에서 깨어나니 그는 온몸이 묶인 채 나무욕조 속에 잠겨 있는 것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마 한 시진은 족히 흘렀을 것이다.

침입자의 손에 들린 유엽도(柳葉刀)는 장강의 메기를 가르는 회칼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그 칼로 곳곳의 혈을 찌를 때마다 모충연은 극심한 고통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침입자는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아 새벽빛에 번득이는 유엽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어나갔다. 이번에 찔린 운해혈에서 흘러나온 피가 실처럼 흘러나와 이미 불그스레해진 욕조물에 풀릴 땐 제 아무리 수련의 경지가 높은 고수라 하더라도 공포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진홍색으로 변해가는 욕조의 물을 바라보는 것은 요혈이 칼에 찔리는 고통보다 더한 공포였다.

침입자는 아무리 혈관을 쥐어짜도 뜨거운 피라고는 한 방울도 없을 것 같은 냉혈한의 모습이었다. 그는 일흔두 살의 노구(老軀) 모충연에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칼끝을 조율했다. 모충연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이것은 그 자체로 예인(藝人)의 경지라고 생각했다. 칼을 아는 자만이 다룰 수 있는 깊이와 감각을 가진 자이다. 그것은 단순한 수련의 결과가 아니다. 실전과 경험 속에서 배어나온, 살아있는 피육(皮肉)을 찔러본 자만이 본능적으로 새겨질 수 있는 감각이었다. 아, 내 칠십 평생 강호에 그리 큰 원한을 남긴 일이 없건만 노년에 어찌 이런 불상사를 맞이한단 말인가. 모충연은 저며지는 고통 속에서도 솟아오르는 회한에 진저리를 쳤다.

인생 육십갑자, 환갑을 맞이한 후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하고 강호를 떠나 이곳 한갓진 고을에 정착한 지도 어언 십년이 흘렀다. 끝을 알 수 없는 무(武)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한가롭게 여생을 마치려고 숨어들어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평생 추구해왔던 무예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정신의 경지를 추구해 유학과 도학의 경서에 몰두했다.

경서를 접하다보니 예(藝)라는 것이 궁극에는 학(學)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예는 개인의 몸에서 발현되어 일 개인에 한정되지만, 학은 개별 기능을 넘어 보편적 경지를 추구한다. 따라서 무예(武藝)도 무학(武學)으로 그 자취를 공고히 함으로써 그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스승 태허진인도 그래서 무예의 궁극을 학으로 정리해 책으로 남겨놓으시려 했던 것 아닌가. 아하, 그래서 스승님도 말년에 무학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저술에 그리 심혈을 기울였구나.

"정신 차려, 천하의 일운상인(一雲上人) 모충연이 이 정도에 정신을 놓다니."

침입자의 일갈이 찬물처럼 모충연의 의식에 쏴하고 끼얹져졌다. 모충연은 강호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의 별호가 괴한의 입에서 나오자 갑자기 옛 시절의 호기가 안에서 꿈틀했다. 그는 침입자를 살폈다. 암행하는 자의 전형적인 복장인 몸에 착 붙는 경장차림이다. 새벽빛에 어깨 근육이 검은 형체로 우람하게 드러났다. 흔히 살수(殺手)들이 그러하듯 검은 옷차림을 했지만, 복면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를 드러낸다는 건 표적을 현장에서 제거하거나 아니면 잡을 테면 잡아봐라 하는 자신감이 넘칠 때이다.

이 자는 나를 살려두지 않을 모양이구나. 모충연은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각오가 솟아났다. 살수와 눈을 맞췄다. 생각보다 눈빛이 고요했다. 어떤 분노도 탐욕도 어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정체를 알 수 없다. 각진 얼굴이긴 하지만, 이목구비는 사납지 않았다. 다만 굳게 다문 입에서 냉정한 살수의 기가 뭉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이 벌어지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울철 깊은 계곡의 바람처럼 스산한 목소리다.

"정신 차려야 해. 아직 갈 길이 멀어."

아무런 음조의 기복이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바람이 무엇을 스치느냐에 따라 그 울림이 달라지듯 듣는 자의 귀에는 천둥처럼 울렸다. 모충연의 눈에 살수의 구렛나루에서 턱 밑까지 죽 그어진 칼자국이 보였다. 자로 재고 그은 듯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이루어진 상처였다. 그 칼자국은 옷깃에 가려져 어디까지 베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가슴 앞에서 사선으로 길게 흘러갔을 것이다. 예리하면서도 깔끔한 자국으로 보아 그를 벤 자는 검술의 경지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칼날을 받고도 살아난 자라면 그 자체로 이미 고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강호를 떠난지 십여 년이 지났건만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상처 하나로 상대를 파악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모충연은 스스로 뼛속까지 무인(武人)이라는 걸 새삼 떠올렸다. 그러나 곧 이어 등줄기를 타고 지르르 올라오는 고통이 모충연의 생각을 여지없이 잘라버렸다. 살수가 다시 어딘가의 혈을 건드렸는가보다.

"잠시 대화를 나눠 볼까. 모 대협, 나를 굳이 부르고 싶다면 무영객이라고 불러줘."

대협의 칭호를 붙이며 예의를 갖추었지만, 눈앞에 겨눈 칼날의 번득임만은 조금도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다. 무영객(無影客). 그림자가 없는 손님이라, 살수다운 별호를 붙였군. 물론 본명은 아닐 것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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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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