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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좋아서 미치겠어! 나 어쩌면 좋아! 정말 감사해!"

지난 연말, 서해안에서 합숙 연수를 하고 있는데 아이에게서 카톡으로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 한 장이 날라왔다. 자세히 보니 170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당당히  평소 가고 싶었던 회사의 본사 기획마케팅부 취업이 최종확정된 통지서이다. 나도 덩달아 좋아서 옆의 동료들과 신부님께 보여주었고 동료들도 모두 박수치며 반겨주었다.

170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취업한 아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재작년에도 합숙 연수 중에 아이에게서 서울에 있는 학교에 붙었다고 좋아서 미치겠다는 문자가 왔다. 그때도 옆에 있던 동료들과 신부님과 기쁨을 나누었다.
통지서에는 일 주일후 정장으로 첫 OT에 참석하라는 내용과 함께 한 달간 합숙 연수가 공지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제대로 된 정장이 없다는 것이 퍼뜩 머리를 스쳐 얼른 카톡으로 "당장 가서 비싸지 않은 아울렛에 가서  정장 한 벌 사 입어!"하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요즘은 내 둥지를 떠나 독립할 아이의 둥지를 마련해주느라 틈틈이 서울의 역세권 방을 알아본다. 회사 근처의 강남의 방값은 너무 비싸서 쳐다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기도 한다.

지방에서 학부를 3년 만에 전체 톱으로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긴 했지만, 그 뒷바라지가 지난 2년 동안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세상의 여자는 약할지언정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과 한때 어쩔 수 없이 6년 간 떨어져 살아야 했던 아이에 대한 간절한 모정으로 잘 감당해내었다.

어떤 때 새벽 1시까지 야근을 할 때는 나이는 못 속인다는 속담이 육체적으로도 실증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천직으로 여기는 예술 작업을 할 때는 새벽 한 시가 아니라 두 세시까지 하더라도 창의성이 샘솟듯 했지만 계산기를 두드리며 컴퓨터 앞에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하는 작업은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그 선택의 근원은 객지의 기숙사에서 때로는 찬 밥을 먹으며 역시 밤새도록 공부하는 딸의 대한 뒷바라지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한 바탕이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세간의 말처럼 이왕 하는 김에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가지고 일하는 내 낙천적인 성격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단함 특히 내 몸의 취약한 구석구석의 통증을 참아내는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더 쉽지가 않다.

그 무거운 무게가 갑자기 홀홀히 날개를 달아 지는 석양처럼 넘어가 버린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내가 몰두 하고 싶은 일들에 좀 더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 든다. 아이가 새출발을 하지만 나 역시 새출발이 되는 셈이다.

8개월도 안 됐는데, 아이 발 하나가 보였다

8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병원에 가니 8개월이면 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이의 발 하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를 준비하고 언제든 제왕절개를 할 준비를 해놓고 출산을 멈추는 주사를 투여했다.
 8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병원에 가니 8개월이면 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이의 발 하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를 준비하고 언제든 제왕절개를 할 준비를 해놓고 출산을 멈추는 주사를 투여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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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내 배 안에서 유달리 조용했다. 익숙하지 않은 않은 결혼 생활과 첫 애기의 육아가
참으로 어려웠던 어느 날. 둘째 아이는 조용히 그렇게 내 배 안에 들어섰고 몇 달 동안 조용히 있었다. 가만히 있어서 잘 자라고 있는 줄 알았던 아이가 말복 즈음에 친정에 갔다 오던 전철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말복이라 먹은 음식이 잘 못내려가나 싶어서 계속 밤새 배를 어루만졌는데 양수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상해서 병원에 갔다. 그때는 8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병원에 가니 8개월이면 아이의 머리가 밑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이의 발 하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를 준비하고 언제든 제왕절개를 할 준비를 해놓고 출산을 멈추는 주사를 투여했다.

그렇게 나는 분만 대기실에서 사흘 밤낮을 규칙적인 진통 속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약이 들어가면 자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사에 내 좌. 우 옆에는 참 많은 산모들이 빠르면 한 시간 만에, 분만실로 들어가고 아무리 늦어도 반나절, 또는 하루만 대기실에 있다가 출산 분만실에 들어갔다.

친정과 시댁에는 비상이 걸렸다. 팔삭둥이도 어렵다는데 팔삭이 되지 않았고 유달리 입덧이 심해서 내 몸무게가 40kg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정에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가 나처럼 장애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다행히 분만 진정제를 맞고 가만히 누웠있었더니 사흘이 지나자 진통은 가라앉았다. 나는 엠뷸런스를 타고 누운 채로 병실에 일 주일 간 있다가 친정으로 왔다. 그리고 친정에서 한 달 동안 정말 시체처럼 소변도 누운 채로 보면서 가만히 가만히 내 배 안의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게 하는 데 집중하였다.

내 옆에는 시집온 지 일년이 채 안 된 셋째 올케가 첫 아이를 출산을 해서 누워있었다. 친정엄마는 막내딸 출산 억제를 위해 간호를 하고, 셋째 며느리 산후 조리를 하는 친정엄마와 시엄마의 두 가지 역할을 하느라 무척 분주하셨다.

사무친 외로움과 간절한 소망, 잊지 말길

채 아홉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의사선생님께서 지금부터 아이의 머리가  더 크면  내 몸이 작아서 자연분만을 하기가 어려우니, 지금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자랐으니 자연분만유도를 하자고 하셨다. 제왕수술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마취를 할 경우 진통제 한 알에도 파르르 떨고 항생제 하나에도 약물에 취약한 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채 구개월을 간신히 채운 어느 날, 나는 사촌오빠가 근무하는 심장수술병원으로 유명한 부천의 세종병원으로 실려왔다. 사촌오빠는 내과의였지만 절친한 친구가 산부인과의사라 내 신체상황을 잘 설명해주어 유도분만을 하게 하였다.

보통의 일반병원에서는 아이가 거꾸로 섰을 경우 제왕절개를 많이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 꼭 수술하지 않아도 자연분만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인턴과 레지턴트에게 학습시켜 주기 위해서 내가 아이를 분만하는 날은 수십 명의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도열해서 겸자를비롯한 몇 개의 간단한 보조기구를 활용하여 아이를 낳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2.6kg으로 거꾸로지만 무사히 나왔다. 아이가 무사히 나오는 순간 양쪽에 도열했있던 인턴과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이 함성과 함께 박수를 치던 게 선명하다, 아름다운 출산은 아니지만 분명 엄청 고맙고 다행스러운 출산이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우연인지 모르지만 아이는 종종 생활용품을 못쓰게 거꾸로 망가뜨렸다. 밥솥구멍은 젓가락이나 날카로운 것으로 쑤셔서  꺼내고, 카세트는 던지거나 해서 분해하고 젓가락이나 연필도 이상하게 잡았다.

타고난 청개구리 기질로 어릴 때는 유달리 말을 안 들었으나 신통하게 잠만은 깊이 자고 식성 또한 참 좋았다. 기어다닐 때는 내가 재워주지 않아도 포근한 감촉만 있으면 기어가서 잠들곤 했는데 어떤 때는 화장실 앞 발을 닦는 매트에서도 깊이 잠들었다.

한창 뇌세포가 세분화 된 사춘기 6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나와 떨어져 살았던 아이. 엄마집이 아닌 친척집으로 떠돌면서 사무친 외로움과 현실에 대한 혼란과 마음안의 어떤 간절함의 파도로 크게 힘들었을 터였다. 여고졸업을 채 하지 않은 채로 수능을 보자 마자 맨손으로 내게 달려왔던 구삭둥이 아이.

그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기도하고 듬뿍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가난한 장애엄마였지만 그저 매일 웃겨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웃을 일이 없어도 잘 웃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무척 바쁘고 고달픈 객지생활에서도 아이는 학교 근처의 복지관에 매주 봉사를 가서 자기처럼 외로운 사춘기 아이들에게 영어 자원봉사를 하였다. 나는 그것이 참 고맙다. 주변에 좋은 마음을 나눠주는 것이 백만 원, 천만 원 저금하는 것 보다 아이가 더 행복하게 살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아무리 고단하여도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거꾸로 나왔던 아이! 작게 낳았지만 알게 모르게 노력해서 지금은 또래보다 조금은 커진 아이! 아이의 마음 그릇이 제 하나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가 겪었던 그 사무친 외로움과 간절한 소망을 잊지 말고 가슴에 따스한 포용력을 가진 질그릇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출산이야기 공모



태그:#출산이야기, #모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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