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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사항은 존중하고 수용하겠다.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안에 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책임을 물을 일에 응분의 조치를 할 것이다. 정치권은 대립과 갈등을 멈추고, 사법부와 정부의 의지를 믿고 기다려 달라."

18일 국회에서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 연설 중,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된 발언이다. 첫 문장만 봐서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 관련한 소위 '양특'(특검과 특위) 문제를 국회에 일임하고 원내 여야간의 합의를 중시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법부와 정부의 진실규명 의지를 믿어달라는 다음 말을 들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특검이든 특위든 국회에서 합의했다면 수용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일단은 정부와 사법부를 믿어줬으면 좋겠다'는 셈이다. 특검에 관한 불편함을 굳이 숨기지 않은 대통령의 이 연설이 끝난 뒤, 새누리당은 야당의 요구사항 중 국정원 개혁 특위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은 "특검 없는 특위는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국회 정상화는 다시 요원해졌다.

때문에 이날 박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당의 요구를 다시 거부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한국경제>는 지난 18일자 보도에서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도 특검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고 분석했다. <한겨레>는 이날 시정 연설이 기존의 입장을 그대로 반복한 수준이라고 비판하며 "(박 대통령이) 야당의 '원샷 특검'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11월 18일자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11월 18일자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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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언론들이 '가렸으되 굳이 숨기지 않은' 대통령의 속뜻 분석에 열을 올렸지만, 지상파 뉴스들만은 '수용과 존중'에 중점을 두고 박 대통령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내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몸싸움', '앉아서 악수'에 더 집중

이날 방송 3사는 모두 박 대통령의 시정 연설을 톱 뉴스로 다뤘다. SBS <8시 뉴스>가 3꼭지, KBS <뉴스 9>와 MBC <뉴스데스크>는 각각 4꼭지씩을 관련 보도에 할애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개 지극히 표면적이었다.

3사 모두 대통령의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관련 발언을 다뤘지만, "국회의 뜻을 존중하고 수용하겠다"는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췄다. 바로 이어진, "정부의 의지와 사법부의 판단을 믿어달라"는 발언은 보도에 인용되긴 했으나, 단순히 그 내용만을 받아 적기 식으로 내보냈을 뿐이다. 그 안에 담긴 자기모순은 3사 중 어디에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11월 18일자 KBS <뉴스 9> 화면 갈무리
 11월 18일자 KBS <뉴스 9> 화면 갈무리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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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KBS와 SBS는 연설 직후 여야의 상반된 입장을 정리해 별도의 꼭지로 보도했다. SBS <8시 뉴스>는 양당이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와 이후 행보에 관한 전망을 함께 묶어 내보냈다. KBS <뉴스 9>의 내용도 비슷했다. 다만 양당의 입장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균형이 약간 어그러졌다.

11월 18일자 SBS <8시 뉴스> 화면 갈무리
 11월 18일자 SBS <8시 뉴스> 화면 갈무리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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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측의 입장표명에서는 "현재 재판 중인 사안이며 군사 재판에 관여할 수 없고 또 다른 정쟁의 소지가 있다는 점"이라는 핵심 주장을 인용했지만, 민주당 측 브리핑에서는 "새누리당이 특검 수용 불가사유로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요인은 국민과 민주당이 요구해온 여러 사항을 무시하는 궁색한 변명"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발언을 뽑아왔다.

민주당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가 해당 브리핑에서 "민주당이 그동안 일관되게 요구해 온 것은 특검과 특위를 통한 문제 해결이었고, 특검에 의한 진상규명과 특위를 통한 재발방지 대책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도 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표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11월 18일자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11월 18일자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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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는 양당의 입장표명 보도 자체에 인색했다. 총 네 꼭지의 보도 중 두 꼭지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중계'한 것이다. 보도 안에는 어떤 분석이나 비판, 의문점도 없었다. 나머지 두 꼭지는 '연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의 침묵'과 '연설 이후 원외에서의 몸싸움' 등 야당 의원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왜 야당 의원들이 냉담한 태도를 보였는지, 본질적인 원인은 외면한 채 회의장 내의 분위기만을 표면적으로 보도했다. 정작 민주당의 반발이나 새누리당의 입장표명은 박 대통령의 발언을 정리한 보도 한 꼭지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모든 말은 속에 뜻을 담고 있다. 말은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뜻은 놓치기 쉽다. 더구나 한 마디 한 마디가 국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들의 말이라면, 그 속뜻을 제대로 아는 일이 어려우면서도 중요하다. 이 때, 언론이 할 일은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뜻을 밝히는 데 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 의무를 더 이상 망각하지 않기를, 뜻을 밝히는 일에 좀더 치열해지기를 바란다.


태그:#방송 3사, #MBC, #KBS, #SBS, #시정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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