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장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입니다.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우리에게 시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연재 '전통시장 고군분투기'는 기자를 지망하는 청년들이 시장을 직접 체험하며 느낀 점들을 다룰 것입니다. 장소는 서울의 전통시장 30곳입니다. 취재 원칙은 하나입니다. '시장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 기자 말

밤 10시, 경매를 기다리는 배추들이 트럭에 한가득이다.
 밤 10시, 경매를 기다리는 배추들이 트럭에 한가득이다.
ⓒ 임경호

관련사진보기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어스름이 깔린다. 낮 동안 내리쬐는 햇살을 거두어간 16만 평 가락시장 부지엔 가을 공기가 서늘하다. 하늘 한 귀퉁이를 새빨갛게 물들이던 해마저 고개를 숙이자 하나둘 어스름을 깨는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 지난 9일 밤 11시에 찾은 국내 최대 규모의 농수산물 공영 도매 시장은 거창한 수식어를 어둠 속에 감춘 채 치열한 삶의 현장을 상영 중이다.

"박흥수(가명) 기사. 전날 작업한 거야, 오늘 작업한 거야? 이거 똑바로 얘기해 줘야 해!"

구성진 목소리로 가락을 타던 최현근(66) 경매사가 한 배추 트럭 앞에서 멈추더니 질문을 던진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경매장이 일순간 웅성거린다. 신선도가 생명인 채소 중에서도 특히 가격 변동 폭이 큰 배추는 하루만 묵혀놔도 상당한 가격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공개경매가 이뤄지는 가락시장의 경매현장은 작은 오차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누군가는 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루 묵은 것으로 밝혀진 배추는 그날 밤 경매의 최저가로 어렵사리 낙찰됐다.

경매가 단골 고객 좌우

누군가는 최고가 7000원짜리 배추를, 누군가는 최저가 2600원짜리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을 앞에 두고 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을 그 즈음, ㈜대아청과 무·배추 경매장 배추 1매장의 한 모퉁이에 오늘의 낙찰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가락시장 경력 23년에 달하는 배추 중도매인 정자환(55)씨다. 밤 10시가 채 되기 전에 출근해 배추 트럭 위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한 시간을 물건 감정에 공을 쏟던 그는 "오늘은 괜찮은 (물건을 구한) 편"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경매 전에 (괜찮은 상품) 한 10개(트럭) 정도는 찍어놔요. 자기가 구하고 싶은 최상품을 낙찰 받으면 좋지만 그건 운이 좋아야 되고, 최악의 경우 그날 물건을 낙찰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다른 상인의 물건을 떼 와서 팔아야 하는데,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거든요."

이유는 가락시장 배추 중도매인들의 장사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가락시장 배추 중도매인의 고객은 단골이 많다. 약 30년의 역사를 이어온 가락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보면 지나온 시간만큼 꾸준히 거래한 단골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다년간 신뢰를 쌓아온 단골 고객 관리가 곧 배추 상인들의 활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물건을 구하지 못한 날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단골 고객의 수요를 맞춰준다. 단골 고객을 놓치면 한 순간의 손해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골 고객의 수는 가락시장에서의 생사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 씨는 상대적으로 쉽게 시장에 진입했다. 처음 시장에 들어오면 신뢰를 쌓아 단골을 늘려가야 하는 것과 달리 가락시장에서 일하던 누나의 단골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23년 전에 직장생활을 하던 정씨가 상인으로 진로를 변경한 데는 누나의 존재가 컸다. 하지만 정씨는 요즘도 경매 시간이 되면 긴장된다고 한다. 수십 년째 겪는 일이지만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속 곧은 배추가 좋은 배추

정자환(오른쪽) 씨가 배추를 살펴보는 손님을 지켜보고 있다.
 정자환(오른쪽) 씨가 배추를 살펴보는 손님을 지켜보고 있다.
ⓒ 임경호

관련사진보기

중도매인들의 경매가 끝난 밤 11시 반쯤부터 경매를 지켜보던 각지의 상인들이 물건 구입을 서두른다. 자신이 낙찰 받은 트럭 앞에 서 있는 중도매인에게 가서 원하는 양만큼의 배추를 구입해 차에 싣고 가는 상인들이 한 차례 빠지면 시간은 밤 12시를 훌쩍 넘긴다. 지방에서 올라온 밤손님과 새벽 일찍 물건을 구하러 오는 손님 사이에 생기는 잠시의 여유다.

분주하던 경매장에서 짐차들이 빠지자 낙찰 받은 트럭의 배추 재고량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최고가를 기록한 배추는 어느새 눈에 띄게 줄어 있다. 경매 순서와 낙찰가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낙찰에 참여해야 하는 데다 운까지 작용해야 얻을 수 있는 그날의 최상품은 아무래도 판매가 용이하다는 정씨의 증언(?)이 이어진다. 하지만 상품질보다 그날의 운이 판매량을 좌우한다는 정씨는 자신의 배추에 만족하는 눈치다.

배추 속을 볼 수 있게 쪼개놓은 배추 뒤로 팔려나간 배추의 빈자리가 휑하다.
 배추 속을 볼 수 있게 쪼개놓은 배추 뒤로 팔려나간 배추의 빈자리가 휑하다.
ⓒ 임경호

관련사진보기


정씨의 배추 트럭도 한 차례 물건이 빠져 1/3 가량이 휑하니 비어 있다. 쌓여 있는 배추들 사이로 신문지가 눈에 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크면 배추 사이에 습기가 고여 배춧잎이 물러질 수 있고, 부패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방지 차원에서 신문지를 깔아둔다는 설명이 돌아온다. 잠시의 틈을 이용한 정씨의 배추 '강의'는 계속된다.

"배추도 사람과 같아서 나이를 먹으면 병이 생겨요. 속이 휜다거나... 속이 곧은 배추가 양념 묻힐 때도 좋거든요. 트럭 위에 쪼개놓은 것은 그래서 품질을 보라고 둔 거죠."

정씨가 쪼개놓은 배추 반 포기의 알몸 속에 드러난 결은 그의 말대로 좋은 상품의 조건을 갖췄다. 곧다. 하지만 새벽 한 시 반이 지나는 시점에 "850망 (배추 3포기를 한 묶음으로 묶어놓은 것이 한 망) 구입에 380망 팔았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정씨는 "평소보다 많이 팔았지만 절반은 못 팔았다"며 농담을 던진다. 잠시의 적막 속에 정씨의 트럭 위 빈자리가 제법 넓다.

열악한 환경에 버텨온 상인들

정씨의 트럭은 다른 트럭에 비해 판매 속도가 제법 빠르다. 그러나 정씨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 초반에 빨리 물건이 나가도 후반에 고전하는 경우가 많아 배추가 완전히 팔리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당일 구입한 배추가 팔리지 않으면 중도매인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덜 팔린 물건을 다음 날 헐값으로 팔기 위해 보관할 것인지, 어떻게든 그날 처분할 것인지. 둘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손해는 중도매인의 몫이다. 그래서 중도매인들은 배추가 완전히 팔리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지 못한다.

하루 벌어 다음날 판매할 배추를 구입해야 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배추 상인들은 판매하지 못한 물건이 생기면 손해를 안고 돌아가기도 한다. 가락시장에는 배추를 보관할 저장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피해는 여름이 되면 극에 달한다. 그날 밤 경매에서 구입한 배추가 다음날 아침에 상하는 경우도 생긴다. 마땅한 점포나 저온저장창고가 없는 배추상인들은 그래서 여름에 "피가 마른다"고 한다. 세금을 내고 가락시장 내에서 장사를 하지만 판매에 용이한 기반시설은 갖춰지지 않았다. 배추 상인들이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가락시장 시설 현대화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다.

당초 2009년 시작된 가락시장 시설현대화 사업은 당초엔 2018년 완공이 목표였다. 그러나 유통환경 등 가락시장의 대내외적 여건 변화로 기본계획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는 서울시와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측의 주장에 따라 계획보다 7년 늦춰진 2025년 완공으로 사업계획 수정이 검토되고 있다.

"시설 현대화를 하면 저장 창고도 개선될 거라 기대하거든요. 과일(상인) 쪽은 자기 점포라도 있는데 우리는 차상경매(차 위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수준이니까. 예전에는 심지어 비가림막도 없어서 배추 위에 천막 쳐놓고 팔기도 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우리 세대에 (시설 현대화가) 될까 걱정하기도 해요. 국민 먹거리와 직결되는 건데 해결을 서둘러 줬으면 좋겠어요."

가락시장 안에서 장사하는 상인이라면 모두 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자신들만 난전에서 작업을 해야 하니, 그들의 불만은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겨울에도 계속된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 배추가 얼기 때문에 난로를 피워야 한다. 그러면서 그을음이나 냄새는 방지해야 하니까 상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장사해 온 상인들은 매일이 압박이다. '다 팔 수 있을까'란 생각을 안고 산다.

"새벽 5시가 넘으면 안 팔리고 남은 게 있어요. 그러면 초조해져요."

정씨도 예외는 아니다.

불경기에 언론의 뭇매까지

새벽 3시가 지나자 하나 둘 상인들이 끼니를 해결한다. 밤에는 도매상이, 낮에는 소매상이 장사를 하기 때문에 가락시장에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이 많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탓에 대체로 식사는 배달을 시킨다. 장사는 제각각의 트럭에서 하더라도 밥만은 옹기종기 모여 먹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틈틈이 생기는 공백에 배를 채운다. 꾸준히 단골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각 상인의 판매량이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1/5 가량을 남긴 차량도 있는 반면 4/5를 그대로 남겨둔 차량도 있다. 판매량에 따라 상인들의 표정에 조금씩의 여유와 초조함이 묻어나는 와중에 시간이 흘러 새벽 5시를 향한다.

경매장 밖으로 난 도로에 아침을 가르는 차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정씨의 차는 휑하니 바닥을 보이는 가운데 새벽녘 배추를 그대로 싣고 있는 트럭도 있다. 미묘한 표정을 짓는 정씨는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10년 전만 해도 굉장히 붐볐어요. 그 후로 계속 손님이 줄었어요. 옛날에는 다 김치를 담아 먹었는데 요즘은 사먹는 경향도 있으니까요. 유명 업체 것이나 수입 김치도 있고. 소비 패턴이 변한 거죠. 여긴 주로 음식점 하는 분들이나 중형 마트, 슈퍼 등 그런 분들이 주요 고객이에요."

시대가 변하며 세찬 풍파를 견뎌낸 상인들이 더불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때문인지 정씨는 배추가 많이 남은 트럭을 보고 걱정과 함께 옛날 생각이 슬며시 차오른다. 정씨도 과거 판매량이 많을 때는 하루에 트럭 두 대 분의 배추를 팔기도 했지만 요즘은 한 대도 힘들다. 경기가 나쁘니 그만두는 상인들도 생겨난다. 그럴 때면 정씨는 생각이 많아진다.

정씨 같은 상인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은 또 있다. 농산물 물가폭등 등 문제만 생기면 찾아와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일부 언론의 영향으로 한 때 소비자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그럴 때면 회의감을 느끼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

"언론은 항상 문제가 생기면 와서 이슈화를 해요. 정부도 그렇고. 물가 폭등의 원인을 상인들의 탓으로 모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신선도가 떨어지면 가격이 떨어지는데 매점매석 (같은 물가 폭등의) 주범이 상인들이라는 식(의 해석)은 곤란해요."

'채소는 하나님과 동업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환경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채소의 수요와 공급은 그해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가격선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손쉽게 상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에 번번이 상인들이 상처를 받는다. 오랜 시간을 가락시장과 함께한 최현근 경매사는 이럴 때마다 걱정이 는다.

배추 상인, 집으로

아침 6시. 아직도 어둑어둑한 밖과 달리 경매장 불빛으로 밝은 실내의 몇몇 배추 트럭은 등이 허하다. 판매량 선두그룹인 셈이다. 다행히 정씨도 그룹에 속해 있다. 이쯤 되면 다들 막바지 물량 처리에 고전한다. 대량으로 팔고 남은 배추들을 손질하며 트럭 아래 가지런히 쌓아둔다. 싼 값에라도 구입을 희망하는 소매상이나 개별 소비자 등을 기다리는 것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정산에 나선 정자환 씨.
 고된 하루를 마치고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정산에 나선 정자환 씨.
ⓒ 임경호

관련사진보기

뜨는 해에 가로등이 빛을 잃어갈 무렵 다양한 사람들이 도로를 교차한다. 주차단속차량, 손수레 짐꾼, 전동차량, 마트차량, 소매상, 일반 소비자, 주차요원, 도매상, 하역꾼, 노점상 등 신선도를 생명으로 하는 '땅 위의 생선' 배추를 싣고 저마다의 발길을 재촉한다. 저 너머 모습을 드러낸 해가 하늘을 채우고 어김없이 아침을 맞이하는 가락시장 상인들은 지난밤의 흔적을 지운다.

7시 반. 모든 중도매인의 트럭이 바닥을 보인다. 운이 좋아 단골 고객에게 일찌감치 물건을 넘긴 상인도, 마진을 줄이며 소매상에게 판매한 상인도, 모두가 집을 그리며 뒷정리에 나선다.

"8시 반이나 물건이 다 팔리면 긴장이 풀려서 졸음이 쏟아져요. 커피를 하루에 몇 잔 마시는지…"

정씨는 텅 빈 트럭을 기사에게 내어주고 인도 바닥에서 그날의 판매량을 정산한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도 9시, 기다림이 있는 이 시간이 그는 좋다. 모든 중도매인이 기다리는, 대비로 바닥 쓰는 소리만 가득한 시간, 아침 9시에 정산이 끝나면 고단한 몸을 안고 시장을 떠난다. 그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 해는 찬란하기만 하다.

김장철 배추 구입, 이렇게!
11월 김장철이 다가온다. 한 철 김장으로 온가족이 두고두고 먹을 김치를 담근다. 때문에 소홀할 수 없는 것이 주재료가 되는 배추다.

소비자 패턴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바로 먹을 배추는 속이 얇은 것이 좋다. 그러나 김장과 같이 장기간 두고 먹을 것은 속이 두꺼운 것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일수로는 70~80일이 지난 배추가 제격이다.

계절별로는 봄철에 '춘광(春光)'이란 품종이 제일 유명하다. 여름에는 대체로 강원도에서 배추가 출하된다. 경북 봉하에서 출하되는 것도 좋다. 지금 이맘때는 품종이 다양하지 않다. 곧 11월에 김장철이 되면 각 지역에서 다양한 품종이 쏟아진다. 그러나 해마다 유명한 배추는 정해져 있다. 강릉이나 해남 배추가 바로 그것이다. 김장철 최고의 품질로 취급되는 배추 품종인 이것들은 보통 출하지가 표기되어 나온다. 개중에 불량 배추를 솎아내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지만 출하지만 보고 사도 9할은 품질을 기대해도 좋다고.

덧붙이는 글 | 이 연재는 김진석 사진작가가 기획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학 중인 안형준(29), 임경호(29), 박기석(27) 3명이 취재를 진행합니다.



태그:#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가락시장, #배추, #김장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