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수

SBS <황금의 제국>에서 장태주를 연기했던 배우 고수 ⓒ BH엔터테인먼트


|오마이스타 ■취재/이미나 기자| "잘못은요, 아버지가 판단하는 게 아니고 이긴 놈이 판단하는 게 세상이에요." 강제 철거의 위기에서 평생을 땀 흘려 살아온 아버지가 한탄하듯 내뱉은 말에 아들은 이렇게 일갈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고 싶어 악을 썼던 그 아들은, 죽음을 앞둔 순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은 죄, 내가 벌도 줄랍니다."

그리하여 SBS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고수 분)는 '이긴 놈'에게 자신의 죄를 판단하게 맡기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바다를 향해 걸어감으로써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게 만들었다. 최서윤(이요원 분)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최동성 회장이 만든 세상에서 어떻게 당신을 이깁니까"라고 고백했던 장태주지만, 철저히 혼자가 된 자신의 모습에 오열하고 만 '승자' 최서윤에 비해 '패자' 장태주의 마지막은 당당했다. 어쩌면 장태주의 죽음은 마지막까지 세상에 맞섰던 그가 진정한 승리를 얻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장태주를 연기했던 배우 고수는 24부작 내내 '고비드'라 불릴 정도로 깎은 듯한 얼굴에 분노, 욕망, 냉혹함, 절망까지 장태주가 겪어야 했던 감정을 덧씌웠다. 다소 꺼칠한 얼굴로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 고수는 "6부부터 거의 생방송 수준으로 찍은 것 같다"면서도 "그래도 이게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장태주처럼, 고수 또한 24시간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치열하게 달렸다.

"주인공은 꼭 착해야만 하나요?…선악은 누구에게나 있죠"

 배우 고수

"아쉬운 점도 있어요. 김 의원을 살해하는 신을 초반에 찍었거든요. 마음의 변화가 어느 정도였을지를 상상하고 계산하고 찍었어야 했어요. (시간) 순서대로 찍었다면 좀 더 잘했을 텐데…싶죠." ⓒ BH엔터테인먼트


장태주는 박경수 작가가 처음부터 고수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인물이었다. 그간 멜로에서 주로 활약해 왔던 고수는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덥석 <황금의 제국>을 택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년을 단위로 총 8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황금의 제국>은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고수는 "박경수 작가님의 대본에는 지문이 많지 않고 대사만 있어 알아서 표현을 해야 한다"며 "그 표현의 폭도 좁고 깊어서, 일정한 선을 넘어 가면 다른 인물이 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모든 인물이 속에 다 뭔가를 갖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서, 꼬아서 이야기하고. 그런 걸 연기자들도 힘들어했어요. 또 극중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인간적으로 피곤하잖아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슬펐어요. '그래도 해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래도 좁은 (표현의) 범위 안에서 연기를 하려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새로운 연기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연기하는) 사람을 쪼는 연기였지만요. (웃음)"

지금이야 여유를 갖고 말할 수 있지만, 위기가 닥친 순간도 있었다. "한 4~5부를 촬영하고 있을 때 작가님이 '지금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 새벽 촬영이 끝나고 한강에서 만났다"는 고수는 "캔 커피를 마시면서 작가님과 함께 장태주를 두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고수 또한 평범하지는 않은 장태주의 캐릭터에 고심하고 있던 차였다.

"'태주가 악인으로만 보이지 않을까', 갑자기 고민이 확 드는 거예요. 저와 비슷한 걸 느끼셨는지 작가님도 절 부르셨더라고요. 별 말씀은 안 하셨지만 표정과 눈빛, 분위기로 알 수 있었죠. (웃음) 그런데 어떻게 선악이 구분돼 있겠어요. 한 사람 안에 선악은 다 있는 거 아니겠어요. 드라마 주인공은 꼭 착해야만 하나, 뻔한 성공 스토리를 연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작품에 임했어요. 주인공이라고 늘 환하고 선한 일만 하고…그러진 않을 거다, 이 사람도 분명 나쁜 면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이야기가 시작된 거니까요."

 배우 고수

"태주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인물이에요. 태주의 입장을 이해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야망의 끝'은 뭔지. (성진그룹 일가가) 가족이라고 같이 한 밥상을 받으면서 매일 다투고 싸우는데, 그걸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극중 서윤에게 '성진그룹과 따뜻한 밥상은 동시에 가질 수 없다'고 하는데) 실제 저였다면 당연히 '따뜻한 밥상'을 택했을 거예요." ⓒ BH엔터테인먼트


그 후로 이야기는 간단해졌다.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장태주는 야합의 주인공이 되거나 술수를 꾸며대며 '왜 성진그룹은 최씨 일가의 것이어야만 하느냐'고 되물어 댔다. 순수했던 법대생 장태주는, 어느새 유들유들한 웃음을 입 꼬리에 매달고는 "아이고~"라며 짐짓 능청을 떨 줄 아는 인물이 됐다. 고수는 "'아이고~'는 나에겐 추억이 담긴 대사"라고 설명했다.

"<피아노>(2001)에서 어린 재수가 아버지를 업고 가면서 '아이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오종록 감독님이 제게 그 한 마디에 버러지 같은 아버지에 대한 속상함, 미안함, 연민 같은 것들을 다 담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피아노>가 제 미니시리즈 데뷔작인데, 그 짧은 순간을 찍으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몰라요. (웃음) 이번에 그 때의 한을 풀듯 '아이고~'라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대본에 있기도 했어요. 무겁고 진지한 내용이지만 태주는 진지해지면 안 된다는 작가님의 의도가 담긴 표현이에요."

<황금의 제국>은 러브라인 또한 남달랐다. 여주인공 최서윤이 아니라, 처음부터 장태주와 함께 했던 윤설희(장신영 분)가 마지막까지 괴물이 될 뻔했던 그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은 것. "태주와 설희가 멜로로 엮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고수는 "'태주가 연기를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멜로가 굉장히 임팩트 있더라. 다음에 박경수 작가님이 멜로를 하신다면 어떨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며 "생각해 보니 태주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갈 곳은 설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렇게 배우들조차 쉽사리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는 살얼음판 같았던 <황금의 제국> 속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몫을 했다. "반전이 계속되다 보니 오히려 현장은 더 생동감이 있었다"고 평한 고수는 "(성진그룹 사람들이) 식탁에서 밥을 먹는 신을 찍으면, '그 다음엔 누가 사라질까?'를 생각하곤 했다"며 "우리끼리는 '나중엔 서윤이 혼자 밥 먹게 되는 거 아냐?'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황금의 제국',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이예요"

 배우 고수

"손현주 형은 되게 인간적인 분이에요. 저도 형 작품을 좋아하고, 재밌게 봤죠. 처음 함께 한 작품이었는데, 집이 가까워서 이번에 많이 친해졌어요. 몇 번 잔도 꺾었고. (웃음)" ⓒ BH엔터테인먼트


"촬영하며 살이 4kg정도 빠졌다"고 말할 정도로 고생을 했지만, 고수에게 <황금의 제국>은 배우로서의 자아를 좀 더 탐색할 수 있게 도와준 소중한 작품이다. "사랑에 죽고 살고, 사랑에 모든 걸 바치는 역할을 주로 하다 장태주를 연기하니 '나에게도 또 이런 모습이 있구나' 싶었다"는 그는 "뭐가 부족한지도 알게 됐고, 또 뭐든지 작품을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예전엔 자꾸 바깥에서만 캐릭터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캐릭터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내 안에서 찾아나가야 되는 거지. 그런 점에서 장태주를 연기하면서 '나에게 또 이런 모습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또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있어서 두려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왜 지금까지 그렇게 조심스러워 했나,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았나' 싶었어요. 내가 못하는 게 뭔지를 알아야 했던 건데….

 '연기가 뭘까',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까'라고 고민하던 시기에 만난 작품이 <황금의 제국>이에요. 힘을 줄 땐 주고, 과장된 게 필요할 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그림도  사실적으로만 그리기보다는 뺄 건 빼거나 어느 한 부분을 과장되게 표현할 때 더 좋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잖아요. <황금의 제국>을 하면서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스스로 정리가 됐죠."

 배우 고수

"인간 고수는 소박하고 욕심이 적어요. 일에 대한 욕심은 많지만. (웃음) 몇 년간 생각이 많았던 때가 있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현재 내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BH엔터테인먼트


마지막으로 "<황금의 제국>과 장태주는 언젠가는 해야 했을 작품이고 캐릭터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황금의 제국>은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한 과정인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어느덧 데뷔 16년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일 욕심이 많다"고 고백하는 고수의 열정은 성진그룹의 주인이 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장태주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고수의 장태주에 시청자가 환호했던 건, 바로 두 사람이 '절실함'으로 통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때는 사방이 막혀있는 곳에선 잠을 잘 못 잤어요. 가방 하나 들고 산에 올라서 몇날며칠 야영하며 지내기도 했고요. 속에 열이 많다고 해야 할까요. 태주도 속에 야망이 컸잖아요.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버럭'하기도 하는, 감정의 기복도 큰 인물이었고요. 실제 저도 그런 면이 있어요. 앞으로도 연기에 대해서는 그런 '열' 같은 게 늘 있을 것 같아요."

고수 황금의 제국 박경수 이요원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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