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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은 격리와 유폐가 아니다. 참된 힐링은 상처 있는 것들끼리의 위로와 공존이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에는 수려한 자연풍광과 노동하는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잔파도처럼 함께 넘실대는 많은 섬길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보석처럼 나 있는 '힐링 섬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오늘은 그 열네번째로 흑산도 힐링 섬길이다. - 편집자 말

쾌속여객선이 다시 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싣고 흑산바다를 가르며 흑산도를 떠나고 있다.
 쾌속여객선이 다시 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싣고 흑산바다를 가르며 흑산도를 떠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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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36노트로 다도해를 가르는 쾌속선의 해상 질주는 경쾌했다. 비금·도초도까지 한 시간, 그러나 쾌속선의 경쾌한 질주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섬사람들은 "이제 큰바다로 접어들었다"며 서둘러 억지 잠을 청했다.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자동차 같았던 배는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정 모르는 관광객들이 "놀이기구 탄 것 같아"하며 내지르던 즐거운 비명은 이내 멀미를 참아내는 신음소리로 바뀌고 말았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쾌속선 주위로 그 흔한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막막한 바다뿐.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리자 저 멀리서 입술 굳게 다문 사내 같은 섬이 보인다. 흑산도다. 바다와 산이 푸르다 못해 검다는 그 섬, 흑산도(黑山島)란다.

목포에서 약 50해리(92.7km)나 떨어진 섬에 한때 2만 명이 넘게 살았다. 파시(波市)가 한창일 때 얘기다. 파시는 바다에 서는 장으로, 흑산도 파시는 위도·연평도 파시와 함께 서해안 3대 파시로 꼽혔다. 이 파시는 이동하는 조기를 따라 서는 조기 파시였다.

하지만 흑산도에 조기 파시만 선 것은 아니었다. 1월부터 4월까지는 한국에서 제일 먼저 조기 파시가 섰다. 2월부터 5월에는 고래 파시가 섰는데 고래 고기는 쇠고기 값의 세 배였다. 6월부터 10월에는 고등어 파시가 섰으니 흑산도는 쉬지 않고 바다의 장, 파시가 서는 '파시의 섬'이었다.

상라봉에서 바라본 흑산도 예리항 전경.
 상라봉에서 바라본 흑산도 예리항 전경.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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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는 사시사철 파시가 성행이었다. 2월부터 5월에는 흑산도에 고래 파시가 섰을 정도다. 옛 고래 어판장 자리에 고래공원이 들어섰다.
 흑산도는 사시사철 파시가 성행이었다. 2월부터 5월에는 흑산도에 고래 파시가 섰을 정도다. 옛 고래 어판장 자리에 고래공원이 들어섰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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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흑산도 바다, 고래 번식장이었다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 가는 길에 고래 파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 고래공원이다. 고래 파시가 성행할 때 고래 위판장과 고래 해체장이 있던 곳이다. 흑산도 예리 몰랑길은 여기 고래공원에서 시작해 흑산도 기상관측대까지 약 1.5km 이어진다. 흑산도 말로 몰랑길은 산이나 밭으로 가는 좁은 길을 뜻한다.

흑산도 고래공원에서 고래 파시를 생생하게 연상해내기는 힘들다. 군내버스 승강장 한 쪽 벽에 타일로 복사된 사진 몇 장과 '고래공원'이 적힌 안내표지판 하나가 고래공원을 꾸미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200년 전 흑산도 바다는 전 세계 백여 종의 고래 중 10%가 새끼를 낳는 번식장이었다고 한다. 특히 세계적으로 희귀성을 인정받는 귀신고래도 흑산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고. 귀신고래는 오오츠크해에서 흑산도까지 회유하는 대형 고래다.

흑산바다에서 뛰놀던 그 많던 고래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포획으로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만 1300마리 이상의 고래가 포획되어 희생당했다. 그럼에도 고래잡이는 계속됐고, 고래 파시는 1960년대 후반을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흑산도 조기 파시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파시와 함께 흑산도 예리항은 요리집, 술집, 색시집에서 흘러나오는 '니나노 장단'으로 밤마다 들썩거렸다. 이미자가 노래한 <흑산도 아가씨>가 크게 유행을 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 가는 길 입구에 서 있는 흑산도 아가씨 상.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 가는 길 입구에 서 있는 흑산도 아가씨 상.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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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 버린
검게 타 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 버린
검게 타 버린 흑산도 아가씨"

-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 노래 1절에서는 흑산도가 고향인 '진짜' 흑산도 아가씨의 뭍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함께 아파했다. 2절을 부를 때는 이른바 '색시'라 불리며 육지에서 흑산도까지 팔려온 작부(酌婦)들의 귀양살이와 다를 바 없는 얄팍한 운명에 함께 울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러저런 흑산도 아가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흑산도 어린이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1965년 서울 인현동의 한 다방. 작사가 정두수는 여느 때처럼 석간신문을 읽으며 작곡가 박춘석과 함께 다음 음반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신문에 실린 한 기사에 눈이 꽂혔다.

해무에 허리가 가린 섬 사이로 조업을 마친 어선이 흑산도 예리항으로 돌아오고 있다.
 해무에 허리가 가린 섬 사이로 조업을 마친 어선이 흑산도 예리항으로 돌아오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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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장도 너머 홍도가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장도 너머 홍도가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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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와 흑산도에 얽힌 이야기


흑산도 어린이들이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고 싶어도 거센 풍랑 때문에 자유롭게 못 온다고. 이 사연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해군 함정을 보내 낙도 어린이들의 서울 방문을 도와준 것은 물론 어린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를 베풀고 선물까지 나눠줬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은 그는 흑산도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섬이라는 이미지와 유배지 흑산도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썼다. 그 가사에 작곡가 박춘석씨가 곡을 붙이고,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1967년 음반을 통해 세상에 발표했다.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크게 유행했다. <흑산도 아가씨>의 정한과 당시 시대의 애환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고래공원 옆 방파제 가는 길 초입에 '흑산도 아가씨' 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엔 가수 이미자씨의 핸드프린팅이 노랫말과 함께 서있다. <흑산도 아가씨>를 발표한지 45년 만에 직접 흑산도를 방문해 공연한 기념으로 만든 것이다.

방파제 너머 쾌속여객선이 다시 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싣고 파도를 가른다. 2018년 이후엔 오로지 흑산도만이 섬다운 섬으로 남을 것이다. 신안군 14개 읍면 가운데 흑산도를 제외한 모든 섬에는 다리가 놓아져 연륙되기 때문이다.

끝내 섬으로만 남을 섬, 흑산도. 수줍게 서서 흑산바다를 응시하는 흑산도 아가씨의 눈도 푸르다 못해 검다.

흑산도 예리 몰랑길은 고래공원에서 흑산도 아가씨 상(방파제)를 지나 흑산도 기상관측대까지 이어진 길이다. 기상관측대 가는 길에서 바라본 흑산바다 풍경.
 흑산도 예리 몰랑길은 고래공원에서 흑산도 아가씨 상(방파제)를 지나 흑산도 기상관측대까지 이어진 길이다. 기상관측대 가는 길에서 바라본 흑산바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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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흑산도 심리.
 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흑산도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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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안군 힐링섬길, #육영수, #흑산도, #이미자, #고래 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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