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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친할머니가 큰아들인 아버지의 집을 40년 만에 방문하셨다. 할머니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 알츠하이머라는 병까지 앓고 계셨다. 할머니는 큰아들 차에 몸을 싣고 200킬로미터 거리를 달려오셨다.

할머니는 '큰아들'이 둘이다. 1번 큰아들은 여순사건 때 돌아가셨을 것이라 추측되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2번 큰아들은 그 후 새로운 인연으로 만난 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1번 큰아들이다.

1번 큰아들인 내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이다. 특히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버지와는 공유라는 게 벌로 없었다. IMF 시절 사업이 망하고 난 뒤 아버지의 '긴 외박' 때문에 어색해서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할머니의 방문 이후 말이 없던 아버지와 꽤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6월의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한 통 거셨다. "너희 할머니가 갑자기 오셨다"고. 나는 그 전화를 받고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짧은 통화였지만, 아들인 내가 고향집에 다녀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제가 가볼까요?"
"바쁜데 그럴 수 있겠냐?"
"정리하고 금방 갈게요."

세 살 때 혼자가 된 아버지

내가 일곱 살 때 할머니 집인 김해 가는 길. 그때는 앞으로 펼쳐진 급커브가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칠 줄 몰랐다.
 내가 일곱 살 때 할머니 집인 김해 가는 길. 그때는 앞으로 펼쳐진 급커브가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칠 줄 몰랐다.
ⓒ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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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김해로 가는 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김해는 2번 큰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매해 명절마다 찾아갔지만, 분위기가 어색해 선물만 두고 밥 한 끼 먹지 않고 다시 집으로 오는 게 전부였다. 어색했지만, 해마다 찾아간 김해행 발길을 끊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추석 당일, 짐을 싣고 김해로 가던 도중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와 큰 사고가 났다.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아버지는 1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나도 두세 달씩 입원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아버지는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다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김해에 가지 않았다. 아마 할머니에게 또 버림받았을 것이란 생각에 무섭고 억울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세 살 때 혼자가 됐어. 할머니는 새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고, 기억은 없지만 육촌당숙이 세 살 때부터 나를 키웠다고 했지. 육촌당숙이 나를 받아줬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풀을 몇 지게씩 해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어. 사실 초등학교를 온전히 다니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지.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새경을 받으며 남의 집 일을 했어. 1년 간 하루 4시간씩 자고 일을 해도 쌀 세 가마니가 전부였지. 그렇게 2년 동안 일을 했더니 돈이 조금 모였지. 새경을 모으고, 나무를 조금씩 팔아 돈을 모았어. 그랬더니 너희 할머니가 찾아오신 거야. 학교를 보내준다고 남원으로 데리고 가셨지. 남원에서는 버림받기 전에 내가 그곳을 떠났어."

"나는 엄마 아빠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라"

나는 어렸을 때 키가 작은 아버지를 부끄럽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내 키가 꼭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운동회에 오지 않길 바랐고, 비가 오는 날에 걱정스러워 데리러 오는 날에는 아버지를 멀리서 보고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보다 키가 작았다. 그게 마냥 부끄러웠다. 그런데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키가 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4시간씩 자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일했던 나이 때 나는 매일 늦잠을 자며 어머니를 괴롭혔고 매일 우유를 독차지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아버지>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이 시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아무런 이유 없이 비난했다. 친구들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나는 열을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앞에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기 민망해진다.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것 같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내 삶에 대입해 본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어릴 적 나는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몹시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원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할머니를 만난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는 10년을 떨어져 지낸 어머니와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게 좋았을까. 학교를 보내준다는 말보다 분명 엄마의 냄새가 그리워서 따라갔을 것이다.

"엄마…? 사실 나는 엄마 아빠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몰라. 경험해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어서 너희들에게는 무심한 아빠 못난 아빠였을 게다. 그렇지? 내가 16살 때였을 거야. 한 아주머니가 엄마라면서 나를 남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지.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엄마라니? 그때 내게도 엄마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냥 엄마라는 말이 좋았고, 냄새가 좋았어.

그런데 남원에 갔을 때 너희 할머니는 나무를 해오라고 시켰어. 3년 동안 실컷 일을 시켰지. 40리 길을 걸어가 나무를 하고 돌아와 저녁에는 나무를 팼지.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3시에 15리 길을 걸어 남원 장에 가서 나무를 팔고, 집에 와서 아침 먹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갔어. 그렇게 나무를 한 지게를 팔면 200원씩 받았어. 그 돈을 조금씩 모았지. 그리고 나무를 하러 가지 않은 날에는 논일을 했어. 새 아버지는 너희 할머니보다 25살이나 많은 사람이었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나한테만 일을 시켰지.

'엄마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이럴 거면 엄마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다시 순천으로 내려왔지. 남원에서 모아둔 돈으로 학교를 다녀볼까 생각했는데 쉽지 않더라고. 차라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밭을 샀지. 밭일도 하고, 소 한 마리를 사서 달구지에 똥장군 10개를 들고 다녔어.

그때만 하더라도 똥장군 지고 다니는 일이 꽤 쏠쏠했지. 한 통에 50원씩 받았으니 하루에 500원씩 벌었지. 꽤 큰돈이었어. 그때 쌀 한 가마니가 1500원 정도 했을 거야. 엄청 열심히 일했어. 몇 년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등에 똥냄새가 가시지 않도록 했지. 꽤 돈을 많이 모았어. 밭을 더 샀지. 그 밭만 떼이지 않았어도…."

아버지 다른 동생까지 남겨두고 다시 떠난 할머니

내가 태어나서 보고 느낀 우리 집은 '부자'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자였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차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 차가 있었고, 차 속에는 전화기도 있었다. 집에는 일하는 이모도 있었다. 그 모든 풍요로움이 일상이었기에 고마운지 몰랐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건축일을 하셨는데, IMF 전까지 상당히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지은 집
▲ 손수 지은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지은 집
ⓒ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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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IMF 때 아버지도 유행처럼 번지던 유행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3년 동안 '긴 외박'을 했다. 빚쟁이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긴 외박에서 돌아왔을 때 막내인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시작했고, 힘에 부치자 다단계 사업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건강기구 납품사업에 뛰어들어 2년 만에 또 사기를 당했다. 집안 살림은 엄마의 식당일과 상고를 졸업한 작은 누나의 취업으로 꾸려나갔다. 그렇게 사기를 당하고, 고꾸라지기를 여러 번 하고 나니 우리 삼남매는 어느새 커 있었다.

우리는 돈을 모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골로 보내드렸다. 더 이상 사람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시골에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시골에 값이 싼 땅을 사서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집을 지었다. 주말에는 나와 매형이 가서 집 짓는 일을 도왔다. 7개월 동안 아버지는 쪽방에 살면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다. 그리고 밭을 사드렸다. 밭에 마늘·고추·상추·감나무 등을 심게 도왔다. 밭이라고 해봐야 300평 남짓한 작은 밭이지만 아버지는 그 밭을 사랑했다.

"사실 내가 우리 아들 딸에게 풍족하게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어. 아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열심히 닥치는 대로 했는데, 배우지 못해서 번번이 사기를 당했어. 일도 못하고 너희들에게 잘하지도 못했는데, 너희들이 커서 집을 짓게 해주고, 밭을 사주니까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고, 물도 제대로 끌어다 쓸 수 없는 밭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그래서 마늘을 심어놓고 물통을 수백 번 이고 다녔어. 마늘을 심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바로 줘야 하거든. 어릴 적 똥장군을 들고 다닐 때는 무겁고 힘들었는데, 이 물통은 왜 이렇게 가볍던지….

어릴 적 내가 똥장군 짊어지고 샀던 밭 소문을 들었는지 할머니는 2번 큰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내려왔어. 아마 그때가 내가 스물 셋 나이였을 거야. 1970년쯤이었으니까. 그렇게 몇 달 너희 할머니가 밥도 해주고, 챙겨주시더니 나 몰래 밭을 잡아놓고 돈을 빌린 다음 떠나더라. 그때만 하더라도 땅문서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던 때였거든. 땅도 땅인데…. 두 번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힘들었어. 그래도 방황하지 말라고 한 건지 외롭지 말라고 한 건지 10살밖에 안 된 2번 큰아들을 내게 놓고 간 거야. 막막했지. 어린 꼬맹이를 놓고 가니까 내가 어떻게 해? 버릴 수는 없잖아?

빚쟁이는 땅을 가져가면서 5만 원을 주더라. 78만 원짜리 땅을 결국 5만 원에 판 꼴이지. 그래도 5만 원도 적은 돈은 아니었어.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부산에 갔어. 부산에서 막일을 시작했지. 2번 큰아들은 학교에 보냈어. 학교 파하면 우리 집 옆 공장에서 놀았지. 그렇게 벌어 먹고살았지….(깊은 한숨)

오늘처럼 엄청 더웠던 여름이었을 거야. 일을 끝내고 집에 와보니 2번 큰아들이 없는 거야. 공장에 물어보니 어떤 아줌마가 데려갔다고 하더라고. 너희 할머니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아버지

어떻게 이런 엄마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서 어떻게 아들을 만나겠다고 찾아올 수 있는 걸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달랐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원초적인 생각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원초적으로 자신의 1번 큰아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40년 만에 1번 큰아들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모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을 한 번 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두 번, 세 번 버리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버지는 어릴 적 일만 생각하면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여태껏 한 번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이름만 가족일 뿐이었다. 어릴 적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고, 나의 사춘기 시절 집을 비웠던 아버지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 아팠던 상처와 어려웠던 시절을 알게 된 지금,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뒷모습이 보이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라고. 아버지가 나를 낳고 30년이 지나서야 사랑이 시작되려나 보다.

"정말 미웠다. 너희 할머니…. 하지만 어쩔 수 없더라. 내 어머니더라. 내가 태어났으니까 우리 아들 딸을 키울 수 있었잖아? 너희들을 키우니까 우리 손주 유찬이 하윤이를 볼 수 있잖아. 그저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련다. 사실 너희를 낳고서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데, 첫 손주를 보고 너희 할머니가 생각났어. 처음으로 너희 할머니가 고마웠어."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  두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사리시랴 /  하늘갓튼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정철이 지은 <훈민가>의 한 부분이다. 이 시조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참 많았다. 당시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낳으실 거며, 낳아준 게 그렇게 큰 은혜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답을 찾지 못했던 고등학생 시절 풀지 못한 숙제를 오늘에서야 해결한다. 나의 대답을 글로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야구라는 운동에서 선발투수의 조건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내세운다. 6이닝 동안 3자책점을 하면 선발투수로서 제몫을 다한 것으로 평가한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자신을 낳아주신 것만으로 퀄리티 스타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게 아버지는 어떤 선발투수일까. 완봉승은 아니더라도 공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해 던졌을 것이다. 상대에게 점수를 내줬어도 끝까지 팀을 위해 던져 완투승을 하는 선발투수처럼, 아버지는 점수를 내줬지만 내게는 완투를 하는 아버지다. 

퍼펙트게임 투수가 아니어도 좋다. 완봉승 투수가 아니어도 좋다. 아무리 점수를 많이 내주더라도 나는 투수를 강판(降板)시키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우리 가족 마운드에 서서 던지는 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공모-가족인터뷰>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아버지, #가족,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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