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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 하우라 기차역
 콜카타 하우라 기차역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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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 시가지에서 하우라역으로 걸어가는 4km 남짓한 길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광경으로 가득했다. 수레 두 대는 거뜬히 채울 만한 커다란 짐을 앙상한 두 어깨에 지고, 뚜벅뚜벅 걸어 하우라 대교를 건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물결. 전쟁통에 피난을 가는 난민들의 흑백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장면이었다.

마하트마 간디 거리(Mahatma Gandhi Road, M.G. Road)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검은색 타자기로 무언가를 열심히 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자물쇠와 쇠사슬을 파는 노점상, 사람 한 명 들어가면 꽉 찰 만한 작은 상점들의 나열, 차이(chai, 인도 밀크티)를 파는 주전자꾼, 노란 택시들의 경적 소리. 이런저런 사람들의 붉고 노란 그림자들이, 저마다의 색을 발하며 거리를 점점이 칠하고 있었다.

짐을 이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 강가에서 천을 염색하는 사람, 타자를 치는 사람, 의뢰를 기다리는 사람. 그 누구의 눈빛에서도 우울함이나 공허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의 절반은 멍한 상태로 지내던 서울 생활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대학교를 나오고 배운 지식을 활용해 머리를 쓰는 일을 했지만, 내 앞에 놓인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시큰둥함이었고 지루함이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는 생활이었다.

콜카타의 길거리에서 옷더미를 쌓아놓고 파는 노점상의 얼굴에는 장사를 끝내지 못할 오늘 밤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식당 밖에서 요리하는 요리사의 얼굴은 그가 요리하고 있는 눈 앞의 음식으로 충만했다. 그들은 지금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시간을 죽인다'라는 개념이 있을까. 자기 앞의 생을 부릅뜬 눈으로 헤쳐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무엇을 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불평 거리를 만들어 내고 움츠러들고 마는 작은 내가 생각났다. 나는 어디에서 온지 모를 열기를 느끼며, 말 없이 그들 옆을 지나갔다.

콜카타의 거리
 콜카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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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라역에서 만난 불가촉천민

하우라역에는 아침 8시 출근 시간 신림역은 농담으로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길을 뚫어줄 칼리 사원의 사제 아저씨가 없는 관계로, 우리는 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흐름을 쫓아 열심히 걸었다. 인도에서 처음 타는 기차를 놓치기라도 할까, 우리는 서둘러 역에 도착했다. 기차 출발까지 아직 4시간이 남아 있었다. 역 중앙 의자에 자리를 잡자, 우리 옆에 앉은 젊은 인도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어요?"
"어디로 가죠? 인도는 왜 왔어요?"
"직업은 뭐예요?"

청년이 우리의 신상명세를 조회하고 있는 사이, 한 할머니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뜻이었다. 한참을 흥미롭게 우리를 관찰하던 젊은이는 대화를 방해받자 가볍게 손을 내저어 할머니를 물리쳤다.

청년은 자기가 탈 기차의 안내 방송이 나오자 이내 우리를 떠났다. 조금 전에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할머니는 역내를 한 바퀴 다 돌았는지 다시 우리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소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할머니는 우리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힌두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앉던 자리이니 나오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인도 아주머니는 바로 옆에서 자기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할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우두커니 앉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자기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더욱 화가 난 할머니는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다. 주위 사람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할머니가 소란을 멈추지 않자 여경 두 명이 다가왔다.

경찰이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복받쳐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는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경찰은 할머니에게 윽박을 질렀다. 할머니는 질세라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기를 몇 분. 오랜 실랑이 끝에도 잦아들지 않는 할머니의 소란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경찰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채찍으로 할머니의 등을 살짝 내리쳤다.

"아아아!" 

어설프게나마 유교 문화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자란 내 눈으로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비쩍 마르고 더럽고 가난하고 비루한 늙은 할머니라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공공장소에서 경찰이 사람을 채찍으로 때릴 수 있다니. 사람들의 동정표를 얻고자 함인지 힌두어로 포효를 내뱉은 할머니는 어설프게 죽은 척을 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제 좀 조용해졌다 싶었는지 경찰이 퇴장했다. 하루 종일 죽은 척을 하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지라, 할머니도 이내 멋쩍게 일어나 자리를 떴다. 비웃음을 담은 사람들의 눈길이 할머니를 좇았다.

언터처블. 저 할머니는 아마,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도 불리는 불가촉천민이었을 거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의 계급이 있고, 제일 하위에도 속하지 못하는 무리가 이들, 불가촉천민이라고.

한국에서만 자란 내가 듣기엔, 카스트 제도라던가 불가촉천민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중국의 전족, 신라의 골품제도 같이 지금의 나와 전혀 상관없는 먼 옛날 먼 나라의 와닿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인도에 오기 전의 인도는 그렇게,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곳이었다. 그랬던 그곳이, 나와 상관없던 이 세계가, 그들의 가난과 억울함이, 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내 사람들은 평정을 되찾았다. 채찍을 맞은 할머니는 할머니고, 우리는 우리의 가야 할 길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우리 역시 배낭을 가볍게 들어 올려 기차 안내 방송을 따라 플랫폼에 올랐다.

내가 만약 인도소녀라면 

우리가 예약한 3등석 기차의 3인용 좌석에는, 6명의 승객이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었다. 여행서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좌석 아래 남는 공간에 배낭을 집어넣은 후 쇠사슬로 꽁꽁 묶어 잠가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었다.

이놈의 여행서는 도대체 남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리 사이를 뚫고 배낭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이며, 사람들이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주고 있는 사이 '자리를 비켜준 건 고맙다만, 당신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라고 소리라도 지르는 듯이, 배낭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 열쇠로 잠그란 말인가. 어설픈 조언에 익숙한 우리는 이내 체념하고 사다리를 타고 윗좌석으로 올라가 배낭을 뉘였다. 아래 좌석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자리를 떴다. 아마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모양이다.

두 명의 여학생들 옆에 내가 앉고, 그 앞으로 더스틴이 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인도의 기차 칸에도 입석이 있는지, 좌석 주위로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15시간 동안 기차에 서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불편한 마음을 꾹 참고 서 있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했다.

"익스큐즈미 써?"

머리를 야무지게 죄여맨 내 옆자리 여학생이 인도 카레처럼 톡 쏘는 인도식 영어 발음으로 말을 건넸다.

"혹시 메리랜드 대학이라고 알아요?"

기차에서 같이 앉게 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인도 소녀가 물은 건 이름도 아니고, 나이도 아닌, 미국에 있는 한 대학교의 평판이었다. 미국의 유수한 명문대에 대해 한국인인 나보다 더 무지한 더스틴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여학생은 실망한 눈초리로 "저희 사촌 언니가 그 대학에 갔는데 하도 좋은 대학이라고 자랑을 하길래 물어봤어요"라고 대꾸했다. 친구인 두 소녀는 콜카타가 고향인데 바라나시에 있는 여자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바라나시는 정말 답답해요. 저는 논베지(육식을 일컫는 말) 음식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콜카타에서는 그런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데, 바라나시는 종교적인 도시고 성스러운 곳이라서 베지테리안(채식) 음식밖에 없어요. 학교에서는 특히 더 그래요."

옆에 있던 친구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하아. 이제 자유도 다 끝이에요. 학교로 돌아가면 기숙사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사감이 얼마나 엄한지 몰라요. 학교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려고 해도 일일이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해요."

바라나시의 결혼식
 바라나시의 결혼식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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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연애결혼 하셨어요?"

연애결혼을 했느냐고? 20년 전에 사라졌을 것 같은 질문이다. 그렇다고 하자 두 여학생은 신이 나서 두 눈을 반짝였다.

"너무 로맨틱해요! 인도에서는 대개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요. 예전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 있는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요새는 그렇지는 않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사람도 소수 있어요."

내가 만약 인도에 태어난 중산층 가족의 딸이었다면 이런 모습이었겠지. 방학 후 1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생활, 엄한 사감의 감독 아래에서 지내야 하는 기숙사 생활, 고기를 좋아하지만 채식만 먹어야 하는 생활. 부모님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는 삶. 그런 것들을 재잘재잘 불평하면서, 또 그런 대로 가끔은 행복한 삶.

이 여학생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을까. 학창시절 내내 대학교 진학을 걱정해야 하는 삶, 대학교 내내 취업을 걱정하고 직장생활 내내 승진과 결혼과 육아를 걱정하는 삶. 부모님이 정해주지는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 안정된 미래에 대한 보장을 기준으로 결혼 상대방을 고르는 삶. 삶의 모든 것이 노년에 대한 두려움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

어쩌면 기숙사의 엄한 사감과의 생활 후 짧은 자유를 되찾는 것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는 삶보다 자유로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속박당했다는 의식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자유를 향한 갈구가 남아 있으니까. 인도에서 태어나 자랐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여학생들을 보니, 멀게만 생각되던 인도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저 찐득한 카레를 손으로... 

바라나시
 바라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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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생활은 어때요? 한 반에 몇 명이나 있어요?"
"음… 한 60명, 70명 정도?"
"한국은 30명, 40명 정도 되요. 미국은 20명도 안 되지?"

더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오래 해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침 7시에 등교해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있다가, 또 도서관으로 가서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곤 했어요. 물론 저는 매일 지각하고 수업 도망 다니는 불량 학생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쳐본 일이 있는 더스틴은 한국 교육에 대한 말이 나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 슬퍼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하루는 한 학생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수업에 앉아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일 주일 후에 중간고사가 있는데 그 시험이 앞으로 자기 인생의 50년을 결정할 거라고 하더군요. 고작 10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시험 한 번으로 자기 인생의 50년이 좌우될 거라고 걱정하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스트레스를 아이 스스로 자기 안에 심은 건 아닐 거예요. 부모가, 학교가, 사회가 그렇게 한 거겠죠.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수밖에 없어요. 심한 경우에는 대학교 입학시험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도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너무 슬프네요. 인도의 학교도 엄하긴 하지만 공부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시키지는 않아요."

아무리 인도가 신세계라지만 학벌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는 한국을 따라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렌지 하나 드세요."

우리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머리를 죄어맨 여학생이 오렌지를 권했다. 여행서의 충고가 또다시 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기차에서 누군가가 음식을 권하면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 음식으로 기절을 시킨 후 소지품을 가져가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 철도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 권고하는 사항이니 반드시 유념하자.

2시간이 넘게 바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이 야무진 소녀가 설마? 하지만 사기꾼이 사기꾼처럼 생기란 법은 없다 하지 않나? 나는 더스틴에게 눈빛을 한 번 건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때, 물을 파는 소년이 다가왔다. 목이 말라 물을 사려다, 여행서에서 안전한 물만 마셔야 한다며 브랜드를 보고 물을 사라던 말이 기억났다. 머뭇대다 물을 사지 않자 여학생이 다시 물을 권했다.

"목이 마르세요?"
"아니, 괜찮아요."

여학생은 알았다고 순순히 내민 손을 거두었다. 나는 화가 났다. 이 여행서 따위가 뭐길래 사람 성의를 무시하라고 조언하는 건가! 밤새 얘기를 나눈 이 여학생들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으라는 건가! 나는 여행서를 갈기갈기 찢어 창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나는 잠을 청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의 여학생들은 우리와 했던 말을 곱씹는지 아직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콜카타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하얀 밥과 노란색이 가득한 진득한 카레를, 손, 으, 로, 싹싹 비벼 먹기 시작했다.

'저 손…!'

손도 씻지 않았는데… 기찻간의 여기저기를 손으로 만지던데…. 저 찐득한 카레를 저 손으로 만지면 온갖 세균이 떡하니 달라붙을 텐데…. 나는 다시 한 번 차분히 감정이입을 해보았다. 인도에서 태어났었다면 나도, 카레를 손으로 비벼 먹고, 오렌지 껍질을 벗겨 창 밖으로 휙 하니 던져버렸을까? 이번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왔던 인도가 다시 한 번 멀어져갔다.

나는 침낭을 좁다란 선반 모양의 침대 위에 깔았다. 굼벵이처럼 침낭에 몸을 돌돌 말고, 차창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추운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인도 3등석 기차
 인도 3등석 기차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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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바라나시로 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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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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