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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바라나시 갠지스 강의 풍경
 바라나시 갠지스 강의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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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정션 기차역에는 수십 대의 사이클 릭샤가 손님을 맞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가트(ghats, 갠지스 강가의 층계)까지 가려면 얼마죠?" 

한 아저씨를 골라잡아 물었다.

"피프티 루피! (50루피, 한화 약 천원)"

자전거로 이 무거운 두 몸뚱이와 짐을 끌고 6km가량을 가는데 천 원이라니. 완전 파격가 아닌가. 하지만 인도에 온 이후, 내 머릿속의 계산기는 인도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행서에는 역에서 가트까지 가는 데 사이클 릭샤로 25루피면 충분하다고 적혀 있었다. 무조건 깎고 보자는 한국인의 유전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여행서에서 말한 거랑 달라. 좀 흥정해볼까?" 
"무슨 흥정을 해 6km에 50루피라는데."

더스틴이 짜게 구는 나를 나무랐다. 쳇, 혼자 쿨한 척은. 나는 릭샤꾼에게 그러고마 하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릭샤에 올랐다. 릭샤는 우리의 무게를 실감한다는 듯, 둔하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릭샤가 움직임과 동시에, 우리는 바라나시의 황토색 먼지와 인파, 차의 경적 소리와 자전거들의 행렬, 배회하는 소들과 소똥, 뜬금없이 나타난 벌거벗은 아저씨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바라나시 거리의 음식점
 바라나시 거리의 음식점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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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100루피짜리 밖에 없어."
"뭐? 거스름돈도 제대로 안 줄 텐데. 타기 전에 확인했어야지!"

이미 릭샤에 올라 한참을 가고 있는데 더스틴이 잔돈이 없는 상황을 보고했다. 나는 용의주도하지 못한 더스틴을 원망하며, 안 그래도 여행서에서 말한 값보다 비싸게 주고 타는데 거기에 50루피를 더 내야 한다는 생각에 분통을 터뜨렸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릭샤꾼의 어깨가 시야에 비췄다. 그의 어깨가 오롯이 앞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 어깨로, 나와 더스틴, 그리고 짐이 가득 찬 배낭 두 개를 앞으로 천천히 이끌어 가고 있었다.

먼지를 가르며 희망에 찬 표정으로 릭샤를 끌고 있는 아저씨의 어깨를 보고 있자니, 문득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100kg은 족히 넘는 짐을 지고 6km를 달리는데, 25루피 낼 걸 50루피 내고, 50루피 낼 걸 100루피 내야 한다고 투덜대는 나. 6km를 달리는 사이클 릭샤의 공정 가격이 25루피라고 한들, 인도인이 내는 가격과 외국인이 내는 가격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들, 그게 뭐가 그리 큰 문제란 말인가.

릭샤 아저씨는 잠시 고개를 돌려 한쪽 팔이 없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우리에게 보였다.

"저는 팔이 하나밖에 없어요."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우리에게 동정표를 사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보려는 속셈이려니. 조금 전이었다면 다시 한 번 분통을 터뜨렸겠지만, 아저씨가 얄밉지 않았다. 돈을 더 뜯어내려는 속셈으로 그랬다면, 더 주면 그만이지. 팔 하나로 이 무거운 짐을 끌고 자전거를 모는게 쉽지 않은 일인 건 사실이다. 100kg이 넘는 무게를 달고 수km의 먼지 길을 달린다는 것은 막된 노동이다. 그 정도 노동에 돈 천 원 더 준다고 안타까워하고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이 못난 인간이, 진정 나란 말인가.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코브라 아저씨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코브라 아저씨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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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색 오리털 파카를 입은 청년의 저주 

가트로 가는 길목에 도착하자 결혼식을 하는 행진이 지나가는지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인도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신랑 신부의 대열을 한참 구경하다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때, 우리 곁으로 연두색 오리털 파카를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밝은 연두색이었을 파카는 때에 절어 거의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더러운 건 둘째 치고, 서울의 여름 못지않게 더운 12월 인도 날씨에 웬 파카.

"호텔?" 

인도에 대해서라면 다른 건 몰라도, 여행자들이 당하는 사기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공부하고 온 나다. 이 자는 여행자들을 호텔로 데려다 주고, 그 값으로 호텔에서 소개비를 받는 호객꾼이 분명하다. 우리는 괜찮다고 하고 청년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호텔 가시는데요? 이름만 말해주면 데려다 드릴게요."

딱히 어느 호텔로 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숙소가 많은 가트 쪽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곳에 묵기로 한 희끄무레한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요. 저희가 알아서 찾을게요."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데려다 줄게요."

말려들고 있었다. 목적지가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되면 자기가 좋은 호텔을 알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할 테고, 분명 질 안 좋고 값이 비싼 호텔로 데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호텔 이름을 아무거나 댈 수도 없고. 대체 이 청년에게 왜 취조를 당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감하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 잘 몰라요. 그냥 다니다가 찾아볼 예정이에요."

비쩍 마르고 얼굴이 검게 탄 곱슬머리 연두 파카 청년은, 기쁘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같이 가요. 제가 호텔을 많이 알고 있어요."
"괜찮다니까요."

아무리 거절해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연두 파카 청년은, 숙소가 보일 때마다 이 숙소가 좋다느니 저 숙소로 가라느니 하며 끊임없이 우리 곁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괜찮다고 좋게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참지 못한 더스틴이 연두 파카 청년을 세워놓고 말했다.

"이렇게 계속 따라다닌다고 해서 당신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오늘 숙소를 못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추천하는 숙소는 절대로 안 갈 거예요.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예요? 벌써 30분도 넘게 따라다니고 있잖아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작정이죠? 1시간? 2시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숙소를 찾아 오랫동안 헤매던 차라, 우리끼리만 있었어도 이미 짜증으로 폭발해 대판 싸우고 있었을 시점이다. 더스틴은 애꿎으면서도 애꿎지 않은 연두 파카 청년에게 화를 풀고 있었다.

"어차피 전 할 일도 없는 걸요. 혹시 알아요? 지금은 당신이 나를 싫어하지만 1시간 지나고 2시간 지나도 내가 계속 곁에 있으면,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되고, 친구가 될 수도 있겠죠.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졌다. 뭐라도 하는구나. 사람은 뭐라도 하게 되어있구나. 꼬질꼬질한 연두 파카를 입은 비쩍 마른 청년이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청년은 정말로 하루 종일이라도 우리를 쫓아다닐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떼어내지 않는다면 바라나시의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인도의 북에서 남까지, 심지어 한국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아쉬울 게 없는 자는 이래서 무섭나 보다. 우리는 연두 파카 청년이 우리 뒤로 잠자코 걷고 있는 사이 작전을 짰다.

"저기 오른쪽으로 빠지는 좁은 골목 보이지? 거기에서 저 청년이 못 보는 사이에 냅다 뛰는 거야. 알았지?"

드디어 작별이다. 나는 더스틴과 약속한 대로, 오른쪽 길로 빠지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연두 파카 청년이 "마담! 마담!" 하고 외치며 나를 뒤따라 달려왔다. 왜 하필 달리기도 하염없이 느린 나를 택하는 걸까. 이러다 잡힐 게 틀림없다. 나를 부르건 말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좁다랗고 미로 같은 바라나시의 골목길을 따라 앞으로 내달렸다.

결국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바라나시 골목의 라씨 가게
 바라나시 골목의 라씨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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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마담! 친구분은 다른 골목으로 갔어요! 다른 골목으로 뛰고 있다고요!"

뭣이라! 뒤를 돌아보니 연두 파카 청년이 옆으로 샌 길을 가리키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냅다 달리다 깨달았는지 멈춰 서서 우리 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더스틴이 저 끝으로 보였다.

이렇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연두 파카 청년과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슬프지도 않은지,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우리를 따랐다.

왠지 그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더 이상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청년을 불러 세워 얘기했다.

"호텔 구하는 거 도와준 건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다만 이런 방식이 싫을 뿐이에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계속 이렇게 있다가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제발 우리 스스로 숙소를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

청년의 저주처럼, 오랜 시간 같이 걷다 보니 청년에게 친밀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청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이 비즈니스라도 한 동료처럼 화해와 협조의 악수를 했다.

"고마워요.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길."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빨래하는 아기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빨래하는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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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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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 강가에서 맛보는 15루피의 행복

다행히 갠지스 강이 보이는 2층 숙소를 잡아 짐을 풀었다. 하룻밤 400루피인 숙박비를 깎아보려고 했으나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어쨌든 먼 길을 왔으니, 오늘의 나머지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보낼 참이다. 무지하게 더러운 강이지만, 잔잔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안해 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더럽게 평안한 강이다. 강을 바라보며 차를 한 잔 마실까 해서 호텔 주인장에게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주문했다.

"2달러요." 

2달러! 나는 엄청난 짜이 가격에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다른 손님을 받고 다시 돌아온 주인장은 15루피(한화 약 300원)니 걱정 말라며 짜이를 가져다주었다.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우."

몇 달러에 벌벌 떠는 내가 측은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나는 왜 2달러에 집착하는가. 2달러를 아껴서 따뜻하고 달달한 짜이 한 잔을 마시며 강가를 바라보는 평화 말고, 어떤 더 큰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달러는 2달러고, 사이클릭샤는 고된 노동이다. 시장가가 공정한 가격이란 법은 없다. 나보다 훨씬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하는 인도 사람들의 임금과 나의 임금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인도인들에게 부르는 가격과, 외국인들에게 부르는 가격이 다르다고 분통을 터뜨릴 일도 아니다. 시장가도 시장가지만, 정당한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내 수준에서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공정한 가격일 수도 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이끈 릭샤꾼이 가족을 위한 빵 한덩어리는 더 살 수 있겠지.

바라나시 숙소 냉장고 위에 앉아있는 원숭이
 바라나시 숙소 냉장고 위에 앉아있는 원숭이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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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바라나시, #갠지스 , #인도, #사이클 릭샤,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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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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