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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폭격기 편대가 폭탄을 염소똥처럼 떨어드리고 있다.
 미 폭격기 편대가 폭탄을 염소똥처럼 떨어드리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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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부동전투

지루한 소모전

1950년 그해 여름은 예년에 보지 못한 혹심한 무더위가 계속되었다.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 낙동강 다부동전선 일대는 용광로처럼 불볕 더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야포의 포탄과 폭격기의 폭탄으로 지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장마라도 지면 더위가 한풀 수그러들 테지만 장마는커녕 시원한 소나기조차도 드물었다. 오랜 가뭄으로 낙동강 수심은 깊은 곳이 어른 가슴팍 정도로 낮아졌다. 전선은 이래저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인민군은 8월로 접어든 뒤 유엔군 측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뚫지 못한 채 더 이상 남하치 못했다. 유엔군 측이 이 '워커라인'을 마지노선으로 사활을 걸고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치고 받는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그런데 낙동강 다부동전투 초기에는 인민군 측이 유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선의 전세는 유엔군 측으로 기울어져갔다. "급히 먹는 밥은 목이 멘다"는 말처럼, 개전 후 인민군은 속전속결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내달려 왔지만 그만 낙동강에서 더 이상 남하치 못하고 그만 목이 멘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유엔군의 후퇴작전에 말려든 꼴로, 인민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진퇴양난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낙동강전선에서 양측은 한 달 남짓 서로 한 치 양보 없는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인민군은 유엔군 측의 병참선 단절 폭격으로 날이 갈수록 점차 전투력이 약해져갔다. 그런 반면에 유엔군은 병력과 각종 무기 등 보급품이 잇달아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와 전선으로 수송되어 전투력이 나날이 증강됐다.

8월 초순부터 미 제2사단, 미 제1임시해병여단 등, 새로운 전투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속속 상륙하여 전선에 배치됐다. 8월 하순에 이르자 유엔군 병력은 18만여 명, 전차 600대에 이르렀다. 유엔군은 개천 초보다 병력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한 대도 없던 전차도 신속한 배치로 인민군보다 훨씬 더 많이 보유케 되었다. 이때부터 그동안 전선에서 무소불위의 맹위를 떨쳤던 인민군 전차도 그만 위력을 잃게 되었다.

미 전투기가 야적장의 군수보급품과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에 맹렬히 폭격을 가하고 있다.
 미 전투기가 야적장의 군수보급품과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에 맹렬히 폭격을 가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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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인민군 병력은 9만8천여 명, 전차 100여 대로 개전 초에 견주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양측 전력은 날이 갈수록 유엔군 측이 더 막강해져갔다. 게다가 유엔군 측은 공군에다가 미 제7기동함대의 직접 지원을 받아, 하늘과 바다는 그들의 독무대였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투기와 미 공군의 폭격기는 한반도 전역을 자기네 안방처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인민군 전후방의 거의 모든 군수공장과 전방으로 연결된 병참선을 끊어버렸다. 미 폭격기들은 후방의 인민군 군수품 공장이나 창고도 용케 찾아 폭탄을 집중으로 마구 떨어뜨렸다. 그러자 인민군은 군수보급품을 지하나 산속에 저장해 두고, 주로 야간에 자동차나 열차로 수송을 했다. 그런데도 미 폭격기들은 이조차도 용케 추적하여 폭격했다.

그러자 인민군 전방부대에서는 모든 보급품이 달렸다. 가장 기본인 양식조차도 부족하여 하루에 한두 끼만 급식하는 비상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전방의 인민군은 또 하나의 전쟁인 보급전투까지 벌여야만 했다.

한국전쟁 전후로 빨치산이나 북한 인민군들이 사용한 원호증.
 한국전쟁 전후로 빨치산이나 북한 인민군들이 사용한 원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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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증

구미 임은동의 야전병원도 의약품 보급을 받지 못해 웬만한 부상병은 응급조치가 고작이었다. 부상자들은 치료 못지않게 영양보충을 해야 상처 회복이 빠른데, 야전병원조차도 세 끼 급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장남철 상사는 인민군 점령지에 급조된 인민위원회를 통해 곡식과 가축을 거둬들였다. 처음에는 곡식과 가축을 돈으로 샀지만, 그마저 떨어지자 후불 어음인 '원호증'을 주고 곡식이나 가축을 징발해왔다.

원호증은 인민군 제3사단장 리영호 이름으로 발행했다.

이 원호증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돼 있었다.

환산가격 백미 1두, 또는 소나 돼지 1 마리
1. 본 원호증은 적 전후방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인민군들에게 물질로써 원조한 애국인민들에게 환산가격에 의하여 수교한다.
1. 본 원호증을 소지한 자는 조국의 해방과 함께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공로자로 인정한다.
1. 본 원호증은 타인에게 넘기는 것을 금한다.

장남철 상사는 구미나 고아면 등 각 마을인민위원장을 앞세워 이 원호증을 교부하며 일대 마을에서 소나 돼지, 그리고 양곡을 거둬들였다. 장 상사가 곡식이나 가축을 거둬온 날이면 야전병원은 순식간에 도살장으로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 날은 오랫동안 굶주린 환자들이 밥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마치 시든 나무가 단비를 맞은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이나 행정요원도 마찬가지였다.

임은동 야전병원은 전투가 없는 때는 낙동강 일대는 요란한 매미소리로 예사 강마을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미군 폭격기는 강마을의 고요와 평화를 송두리째 깨트렸다.

특히 미군 폭격기의 저공비행과 기총소사는 인민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야전병원에서는 환자들을 되도록 분산 수용했다. 다행히 한여름이라 중상자가 아닌 경우는 가마니를 깐 야외 천막병동에다 띄엄띄엄 수용할 수 있었다. 낙동강 임은동 일대는 야전병동 마을로 변했다.

개전 초 김일성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전선시찰로 수안보까지 내려와 인민군 전선총사령부에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지령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조기에 참전하였고, 국군이 미군의 군비지원을 받아 낙동강 방어선에서 저항이 예상 외로 완강해지자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우선 대구만이라도 점령하라고 수정 지령을 내렸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오늘의 유학산(2011. 10.).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오늘의 유학산(2011. 1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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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

그러자 8월 15일은 인민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유엔군 진지를 대대로 공격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처절한 혈투였다. 근거리로 소총사격보다 수류탄을 던지는 혈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다부동 일대는 고지마다 양측 병사들의 시체가 쌓이고, 그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혈전이었다. 그 혈전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날 전투에서 인민군이 끝내 수암산과 유학산 839고지를 손아귀에 넣은 뒤 다부동까지 밀고 내려왔다.

유학산 정상 고지는 대구가 빤히 바라보이는 중요한 지형이라 양측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유학산 839고지 쟁탈은 곧 다부동전투의 승패를 가름했다. 왜관에서 다부동에 이르는 이 다부동전선은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려는 인민군의 주공선인 반면, 유엔군에게는 그곳을 지키려는 최후의 보루요, 주저항선이었다.

유엔군은 8월 15일 전투에서 유학산 고지를 인민군에게 빼앗기자 미8군사령부에 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유학산 고지를 빼앗기면 대구 방어가 위태했기 때문이다. 미8군사령부에서는 이 지원 요청에 따라 이튿날 정오 전후로 낙동강전선 전방지역에 융단폭격을 실시한다는 작전계획을 내려 보냈다.

한 피난민 부인이 움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1950. 8. 25).
 한 피난민 부인이 움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1950. 8. 25).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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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단폭격

이 융단폭격은 폭격 대상을 가리지 않는, 마치 물뿌리개로 꽃밭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무차별 폭격 작전이었다. 이 계획에는 유엔군 각 전방부대 병사들은 호를 깊이 파고 들어간 뒤 낮 12시 전후로 절대로 머리를 땅 위로 들지 말라는 별도 긴급 지시도 내려 보냈다. 하지만 인민군이나 약목과 구미 일대 주민, 그리고 이 지역에까지 내려온 피난민들은 이 지시를 알 리가 없었다.

1950년 8월 16일, 임은동 야전병원은 전날 치열한 전투로 후송 부상자가 예삿날보다 두어 배 더 많았다. 의료진들은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부상병들을 응급 치료했다. 인력도, 약품도 달려 정상 치료는 할 수가 없었다. 우선 부상병들의 상처를 소독한 뒤 붕대로 싸매거나, 피가 쏟아지는 상처는 지혈대를 대고 붕대로 감쌌다. 의료진들은 아침밥도 잊은 채 부상병 치료에 매달렸다. 그날 정오에 이르렀을 때야 응급 치료가 겨우 끝났다.

그날 평소보다 많은 부상병 치료로 아침밥도 먹지 못한 최순희는 의료 기구를 닦고 있는 조수 김준기를 불렀다.

"김 동무, 기구는 나중 닦고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알가시오."

준기도 아침밥을 먹지 못한지라 무척 배가 고파 하던 일을 밀쳤다. 그들이 본부 수술실에서 막 나와 취사장으로 가는데 그 순간 B-29 폭격기의 요란한 굉음이 귀를 때렸다.

"동무우!"

준기는 순희의 팔을 잡아당기고 곧장 야전병원본부 뒤 대나무 숲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사이 야전병원 일대에는 B-29 폭격기가 폭탄을 마구 쏟았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융단폭격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부터 오후 12시 24분까지 26분 동안 왜관 약목 구미 일대 너비 5~6킬로미터 거리 12킬로미터에 걸쳐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약 960톤가량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그 일대는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폭풍의 불바다로 변했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소설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작품 취재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지인 및 애독자들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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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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