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 더블 앤조이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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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릴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데뷔 이후 범상치 않은 작품들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력 가운데서도 특이한 위치를 점하는 영화로 남을 듯하다. 강렬하며 기괴한 인상의 컬트영화를 만들던 초·중기 경력을 지나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 등의 고전풍 서사물로 노선을 변경한 크로넨버그는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촉발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묵시론적 어조로 예견한 돈 드릴로의 장편소설 <코스모폴리스>를 영화화하였다.

20대 나이의 젊은 억만장자 에릭 파커(로버트 패틴슨 분)의 하루를 쫓는 영화의 구성은 굉장히 단출하다. 경제공황을 맞이하여 혼란에 처한 가상의 미국을 가정한 이 영화의 배경을 가늠케 하는 것은 리무진에서 이루어지는 에릭 파커와 임원들과의 대화, 그리고 각지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극렬시위를 묘사한 짧은 장면들을 통해서다.

에릭 파커는 파멸을 맞이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으니, 회사의 전 자산을 내걸었던 위안화의 가치가 회사의 예측과는 다르게 폭등함으로써 수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된 리무진을 타고 각 분야의 임원들과 함께 거대 자본의 흐름을 논하거나, 찰나의 섹스를 즐기고, 왕진 의사의 건강 검진을 받는 등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지만 차창 밖의 세상은 이미 너무도 달라져 있다. 에릭 파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 더블 앤조이 픽쳐스


그의 리무진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으며, 차량의 엔진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마치 진공 속을 부유하는 우주선의 내부를 보는 듯하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일체 허하지 않는 에릭 파커의 세계는 '들쥐'를 앞세운 시위대의 공격(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를 인용한 '들쥐를 화폐로 쓰리니')에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노예상태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대중들의 결집은 카오스에 가까운 무정부상태를 재현하며, 걷잡을 수 없는 거리의 혼란은 리무진 내부의 고요함과 대비되어 기괴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그의 동선은 추락을 예감한 이카로스의 몰락을 무던히 묘사한 듯하다. 그에게 반감을 품은 시위대의 공격과 과격분자의 난동은 에릭 파커에게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자본계급의 총아에 해당하는 에릭 파커와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계급적 간극 이외에 물리적 장벽이 존재했으니, 난공불락의 리무진과 노련한 경호원의 존재가 그것이다.

에릭 파커는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지켜줌과 동시에, 외부세계와 자신을 명백히 구획 짓는 이들 조력물들을 자신의 의지로 제거해 버린다. 혈혈단신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대면하는 에릭 파커. 그는 이미 파산한 억만장자이자,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남자로 몰락한 처지였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베노 레빈(폴 지아매티 분)에 대해 느끼는 일말의 심리적 우월감만은 버리지 못한다.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한 장면 ⓒ 더블 앤조이 픽쳐스


자본주의 시스템을 온전히 파악하고 이를 장악한 것이 자신의 성공비결이었음을 오만하게 천명하던 에릭 파커의 환상은 사회에 의해 무능력한 실패자로 낙인찍힌 베노 레빈의 존재에 의해 여지없이 와해되고 만다. 자본을 수단으로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이는 빼어난 수완은 일련의 정확성에 기반한 수학적 통계에 힘입은 바 클 것인데, 이러한 통계의 정확성에 관한 맹신은 자본의 예측할 수 없는 유동성에 의해 배신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전립선의 불균등한 크기에 신경쓰던 에릭 파커에게 있어 좌우의 완벽한 대칭은 세상만사를 관통하는 진리에 해당한다. <코스모폴리스>에서 그려지는 에릭 파커의 하루는 곧 이러한 좌우대칭-완벽한 균형에 관한 믿음이 해체되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본이 수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에릭 파커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배하에 놓인 또 다른 베노 레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를 두고 보자면 에릭 파커와 베노 레빈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마지막 시퀀스는 아이러니하다.

베노 레빈이 에릭 파커를 죽인다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산한 에릭 파커의 빈자리는 또 다른 자본가가 영악한 수완을 발휘해 차지하고 말 것이고, 그를 증오하게 된 또 다른 베노 레빈이 그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끝없이 되풀이되지 않겠는가. 이는 에릭 파커가 스스로의 손에 총을 쏴 피를 흘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자기 파괴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돈 드릴로의 원작소설이 발표된 것은 2003년으로, <코스모폴리스> 속 이야기가 아직 현실의 무게를 획득하기 이전의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이를 영화화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기로, 그간의 세상은 에릭 파커와 베노 레빈을 둘러싼 이야기가 단순한 픽션 이상의 울림을 지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인용한 듯한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으니...') 영화 속 문구-"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는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19세기의 시점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공산주의라는 유령, 이미 세상의 질서를 공고히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유령. 유령이라는 말이 어폐라 느껴질 만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뚜렷한 실체를 지닌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실상 영화 속 시위대나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억만장자조차 자본의 정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옥죄는 거대한 시스템, 그 속에서 사랑과 실존의 환희를 잊어버린 채 부유하는 인간군상. 영화 <코스모폴리스> 속 유령의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코스모폴리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로버트 패틴슨 마르크스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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