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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들이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1950. 9. 20).
 유엔군들이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1950. 9. 2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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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유언

대부분 작가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쓰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예순이 넘도록 고향 이야기는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탓이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

"서울로 대구로 간 너들, 황금어장은 고향에 있는데 백지로(괜스레) 낯설고 물선 타관에 가서 산다고 욕 마이 본데이. 내는 마 아침마다 우리 모교에 세워진 박정희 대통령 동상에 가서 절을 한다 아이가. 보리 딩기죽(겨죽)도 배불리 몬 먹던 우리가 다 그 어른 때문에 요새 세 끼 밥 먹고 이래 포시랍게 잘 산다 아이가."

한 고향친구가 나를 비롯한 타향에 사는 친구들에게 고생한다는 우정 어린 위로의 말을 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향을 지킨 친구들은 해마다 물난리를 겪던 낙동강 갯땅 일대와 금오천 자갈 논밭이나 광평 신평 들판과 금오산 기슭 형곡동 송정동 사곡동 야산 임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라 대부분 부자가 됐다. 그런 반면 도시로 나간 친구들은 여태 집 한 채 지니지 못한 채 허덕이는 녀석들이 많았다.

"어이, 박 선생! 내 니가 쓴 책 대충 봤다. 사쿠라 꽃이 만발한 세상에 갈게(가을에) 서리 맞고 핀 국화 얘기는 이 시대에 개 발에 편자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기라."
"의병이나 독립군 이야기, 하기사 좋은 이야기지. 근데 요새 그런 책 누가 보나?"
"그라이 마. 자네 요즘 강원도 산골째기에 산다며. 활딱 벗은 얘기를 써든지, 돈 놓고 돈 먹는 얘기를 써야지 대박난다."
"참 자네 할배 억시기 깐깐했지. 늘 두루매기에 갓을 쓰고 다니셨지."

몇몇 고향 친구들은 술기운을 빌어 나에게 뼈있는 말을 뱉었다. 그날 밤 구미에서 원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차창에 문득 조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아홉 살 소년이었다. 내 또래 악동들은 구미 역 앞 마루보시(통운) 옆 빈터에 새로 생긴 미군부대 퀀셋 부근을 어정거리거나 경부선 철길에서 미군열차가 지날 때 손을 흔들면 미군들이 던져준 초콜릿이나 씨레이션 깡통을 줍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에게 그런 곳은 얼씬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랑방에 끓어 앉히고는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을 펴고는'공자 왈 맹자 왈'을 가르쳤다.

"군자는 식무구포(食無求飽)요, 거무구안(居無求安)이라"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글의 뜻도 모른 채 할아버지가 강독한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웠다. 그런 가운데 할아버지의 폭음은 날로달로 늘어갔다.

"지난 10·1사건 때와 6·25 때 같은 조선사람끼리 서로 총질한 걸 보고 상심이 커서 그런 모양이데이."

할머니는 폭음으로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사랑으로 모신 뒤 나에게 할아버지를 두둔하며 하신 말씀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이었다.

"상민아."
"예."

"니는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마는 이번 전쟁은 이승만이와 김일성이 때문에 일어났다. 어째든동(어쨌든), 둘이 손잡고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합칠 생각은 안 하고, 서로 미제 소련제 무기 마구잽이로 끌어다가 애꿎은 백성들 마이 죽였다."
"…."

"우리 집은 자고로 문인 집안이데이." 
"…."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가족(경북 영덕, 1950. 7. 29.)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가족(경북 영덕, 1950. 7. 2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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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004년 2월 나는 정년을 5년 남긴 채 조기 퇴직한 뒤 강원도 두메마을로 내려와 얼치기 농사꾼이 됐다. 어느 날 한 월간잡지사로부터 '내가 겪은 한국전쟁'이라는 글을 청탁받았다. 나는 유년시절에 겪은 한국전쟁의 기억을 더듬어 그때 이야기를 한 편의 동화처럼 써서 보냈다. 이 글을 본 한 출판사 대표가 뜻밖에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오랜만에 서울로 가서 그가 가르쳐준 홍대 앞 출판사로 찾아갔다. 그는 사진전문출판사 대표 이호선씨로 특히 근현대사 사진 마니아였다. 그는 나에게 아주 엉뚱한 제의를 했다. 자기가 들은 정보로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곧 내셔널아카이브(NARA)에는 한국전쟁 사진자료가 대단히 많이 소장돼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 사진을 수집해 올 수 없느냐는 의사를 타진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체험한 이들이 대부분 60~70대 이상인데다가 그 시절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는 이를 찾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런 터에 내 글을 보니까 문득 자기가 찾던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기는 출판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비 일부는 출판사 측에서 선인세로 부담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의 뜻밖 제의에 황당했지만 딱 끊지 않고 생각해 보자고 대답했다.

나는 집에 돌아온 뒤 마침 같은 학교에서 동료로 근무하다가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간 고동우 선배에게 공동작업 의사를 메일로 타진했다. 물론 하루에 일백 달러 정도의 일급을 드리겠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자 곧 그는 자기가 마침 내셔널아카이브와 그리 멀지 않는 메릴랜드주 락 빌에 살고 있으며, 이즈음은 가게 일을 부인에게 맡긴 채 별일이 없다고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고 선배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이호선 대표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 일감에 아내는 나보다 더 좋아했다. 내가 체험하고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늘그막 부부의 적당한 별거는 부부해로의 보약이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들

부산 임시포로수용소의 여자 포로(1951. 1. 12.)
 부산 임시포로수용소의 여자 포로(1951. 1. 12.)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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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에 본 사진은 RG(Record Group·문서군) 186·192·195 문서상자로 거의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 사진이었다.

이곳 자료실에 소장된 한국전쟁 사진들은 대부분 흑백으로 현상한 지 50년이 넘어 빛깔이 바랬고, 동그랗게 오그라져 있었다. 이들 사진은 검색자들이 반드시 흰 장갑을 낀 뒤에야 만질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일일이 들추며 쓸 만한 사진을 골랐다.

오전에 살펴본 수천 장 사진 가운데 내가 골라 스캔한 것은 모두 22장이었다. 이 가운데는 미군이 총을 겨누자 인민군 셋이 손을 번쩍 들고 투항하는 장면(12. Aug. 1950.), 옥수수 밭 길옆 빈터에서 아홉 명의 인민군들이 일렬로 벌거벗긴 채 검색당하고 있는 장면(20. Sep. 1950.),

팬티만 입은 인민군이 서너 명씩 열을 지어 임시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22. Sep. 1950.), 부산 임시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여자포로(12. Jan. 1951) 등이 있었다. 이런 사진에는 대부분 사진모서리에 'CONFIDENTIAL' 또는 'SECRET'라는 미국정부의 기밀문서 분류 등급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우리는 아카이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정원을 산책한 다음 곧장 오후 작업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에 스캔한 사진은 모두 21장이었다. 이 가운데는 부산 포로수용소 사진(18. Aug. 1950.)과 거제포로수용소 천막막사 사진(7. May. 1951.)도 볼 수 있었다.

거제포로수용소 사진 위에는 보도제한이라는 'RESTRICTED'라는 미국정부의 기밀문서 분류 등급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고동우 선배가 이곳 아키비스트에게 물어본 바, 미 정부의 기밀문서 등급은 Top Secret(1급), Secret(2급), Confidential(3급)으로 분류하는데, 이밖에도 대외비 정도의 'Restricted', 또는 기밀로 분류되지 않는 'Unclassified' 등으로도 분류한다고 했다.

이날 본 수천 장의 사진들은 날짜나 장소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여러 상자의 사진을 종합해 보니까 한국전쟁 당시 포로들의 수용소생활 전모가 거의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들 사진은 포로의 투항에서 검문 검색·인솔·포로수용소 입소·증명사진 촬영·포로수용소 내무반·포로들이 'PW(Prisoner of War·포로)'라고 페인트로 쓴 옷을 입고 배식 받는 장면, 심지어 유엔군 포로감시병이 대형 분무기로 포로들의 온 몸에 디디티(DDT)를 뿌리는 장면 등이었다.

이날 작업량은 모두 43장으로 사진의 해상도도 1·2차 검색 때보다 훨씬 더 좋아 나는 사진파일을 노트북에 저장할 때마다 마치 월척을 낚은 낚시꾼처럼 짜릿한 기쁨을 맛봤다.

고동우 선배는 내 숙소를 이전 방미 때처럼 내셔널아카이브에서 가까운 곳에다 구해놨다.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 볼티모어 가(街) '데이즈인(Days Inn)'이라는 이 대학촌 모텔은 비교적 값이 싼 모텔로 바로 옆에 '이조'라는 한국식당이 있기에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퇴근길에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당신 집으로 떠나려는 고동우를 붙잡았다. 우리는 밥집 '이조'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18개월 만에 다시 만난 회포를 풀었다.

'릿츠'와 '허쉬'  

나는 그가 떠난 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음날을 위하여 곧장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몸은 몹시 피로했지만 시차 부적응으로 눈은 말똥말똥한 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서울과 메릴랜드 주는 14시간 시차 탓으로 밤낮이 정반대였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그날 입력한 사진 설명글을 가다듬었다. 그 일을 다 마무리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메일함에 도착한 사연들을 읽고 답장을 한 뒤 이런저런 뉴스를 살폈다. 이상하게도 국내뉴스는 해외에 나가면 시들했다. 여야 정객들이 여태껏 서로 친일파 후손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제3자가 보면 둘 다 친일파 자손끼리 서로 상대를 손가락질을 했고,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직 한 대통령은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똘마니들을 데리고 전국 골프장을 누비며 잘 살고 있다는 보도들이었다.

나는 그런 뉴스에 식상하여 노트북을 끈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말똥말똥한 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술기운을 빌려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제 허쉬 초콜릿
 미제 허쉬 초콜릿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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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숙소 건너편 슈퍼에서는 다행히 와인을 팔았다. 나는 먼저 와인 한 병을 집은 뒤 안줏감을 찾는데, 유독 '릿츠(RITZ)' 비스킷과 '허쉬(HERSHEY'S)' 초콜릿이 눈에 번쩍 띄었다.

나는 어린 시절 미군들이 던져 준 초콜릿과 비스킷에서 이들 상표를 처음 보았는데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무척 반가운 마음에 릿츠 비스킷 한 상자와 허쉬 초콜릿 세 개를 샀다.

우리 악동들은 그 시절 미제 비스킷과 초콜릿 맛을 못 잊어 미군 지프차나 군용트럭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미군열차가 지나는 시간에 맞춰 경부선 철길로 달려가 미군들에게 손을 흔들곤 했다. 나도 이따금 할아버지 몰래 악동들 대열에 꼈다.

"헬로우, 기브 미 초콜릿!"
"씨레이션(전투비상 식량), 츄잉 껌 기브 미!"

어떤 운수 좋은 날은 미군들이 우리 악동들에게 소리치며 초콜릿이나 비스킷 또는 껌이나 깡통을 던져주었다. 

"헬로우 보이즈!"

그러면 우리 악동들은 길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줍고는 흙먼지와 함께 사라지는 차를 향해 의미도 잘 모른 채 주워들은 말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댕큐, 베리 마치."
"베리 굿."
"예스, 오케이!" 

하지만 미군 트럭이나 지프차가 흙먼지만 뿌옇게 날리며 입술 연지를 새빨갛게 칠한 누이들을 껴안은 채 씽씽 그냥 지나가면 우리 악동들은 손짓이나 발짓으로 욕을 하곤 역시 주워들은 말이나 쌍욕을 뱉었다.

"양키, 갓 댐!"
"니 에미 X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온 뒤 와인을 조금씩 마시면서 비스킷과 초콜릿을 씹었다. 그새 5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옛 맛 그대로였다. 나는 그 맛과 함께 한국전쟁 피난시절 추억들이 미군 쌕쌕이의 요란한 굉음과 함께 되새겨졌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큰고모 아들 정길 고종형이 무슨 비밀 이야기처럼 들려준 준기 아저씨의 인생유전 이야기도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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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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