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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과 일본제국 천황 메이지(1852~1912). 두 사람은 태어난 해가 같다. 왕위에 오른 해도 비슷하다. 고종은 1863년, 메이지는 1867년이다. 권좌에 오른 때 그리고 죽은 해도 엇비슷한 두 사람, 하지만 통치행위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나라가 망했고, 메이지는 그 망한 나라를 차지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역사가 거꾸로 진행돼 고종이 일본을 차지하고, 메이지가 쓸쓸하게 권좌에서 내려왔다면 2013년 한반도는 적어도 허리가 잘린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궁금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 개항했다. 일본은 23년 후인 1876년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선에 개항(강화도조약)을 요구한다. 일본이 미국과 강제조항을 맺었지만, 메이지를 중심으로 유신을 단행해 아시아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의 못난 개항
 조선의 못난 개항
ⓒ 역사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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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제개항 후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34년 동안 제대로 된 개혁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34년 동안 조선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서울신문> 문화부 학술담당 문소영 기자가 쓴 <조선의 못난 개항>(역사의아침)은 그 작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책 제목에 쓰인 단어 '못난 개항'은 독자의 입장에서 불편하다. 하지만, 저자 문소영이 이 책을 통해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이 결합해 구체제를 해체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며 역사자료와 문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 앞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중심에는 고종이 있다. 사람들은 을사늑약 당시 '옥쇄'를 숨기고.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에 보낸 것 등을 예로 들면서 고종이 나름대로 대한제국(조선)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소영은 이렇게 묻는다.

고종에 대한 우호적 평가 있을 수 없는 일

"대한민국의 어떤 대통령이 만약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독도를 포기하고 일본에 넘겨준다고 선언했다고 가정해보자.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리해야 한다는 결정을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5000만 명은 그 '어떤' 대통령의 결정을 따를 수 있을까? 아마도 탄핵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결사대를 구성해서 극단적이 행동을 할지로 모를 일이다."(본문 20쪽)

그런데 고종은 아예 '삼천리금수강산'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줬다. 35년 일제식민지배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깊고도 넓다. 아직도 상처는 낫지 않고 있다. 일본 극우만 아니라 역사교과서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극우 성향의 총리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한다. 심지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에 비유하고, 말뚝을 우리 사법부에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 근원은 고종에게 있는 것 아닐까.

문소영은 "최근 고종의 일가나 조선 말기에 대한 대단히 우호적인 시선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며 "정책적인 결정이었기에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데, 책임을 물을 일은 묻고 단죄할 일은 단죄를 하는 것이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고종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반박한다.

일본 '교육개혁'할 때, 조선은 망한 명나라 숭배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 섭정기간 10년(1863~1873)을 빼고, 1907년까지 34년을 권좌에 있었다. 3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세대다. 충분히 한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시킬 수 있는 시기였다. 고종이 통치한 대한제국을 삼킨 메이지는 달랐다. 메이지는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는 바람에 1867년 1월 열다섯 살 나이로 즉위한다. 새 천황은 "죠수 출신 이토 히로부미와 사쓰마와 조슈·도사·에치젠 번 등이 연합해 막부를 제치고, 신지 개혁세력"과 함께 개혁을 단행했다. 무엇보다 메이지는 교육제도 개혁을 통해 유신을 성공적 안착시킨다.

"근대화 정신과 서양문화·제도 등 서양문명의 전국민적인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교육 제대의 개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 프랑스 교육제도를 모방해 학제를 공포했다. '학제명령서'는 신분에 의한 취학의 차별을 철폐했다. 신분이 세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은 입신 출세할 수 있는 자산으로 떠올랐다."(본문 174쪽)

하지만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원철폐'를 단행하자 최익현은 1873년 서원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또 명나라 신종을 위해 세운 '만동묘' 폐지를 결정하자 "유생들은 통문을 내 사람들을 모았고 검은 두건과 가죽 허리띠를 한 사람들이 한성에 1만 명이 모여들어" 원상 복구를 주장한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자 다음해 고종은 만동묘를 부활시킨다.

일본 메이지와 신진개혁세력들이 프랑스식 교육개혁을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조선 고종과 지도자들은 400년 전 망한 명나라와 죽은 황제를 숭배하는 데 급급했다. 조선과 일본의 미래는 이미 결정난 것 아니었을까.

물론 조선도 서양 문물을 처음으로 접한 유길준, 1905년 '을사오적'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지만 처음이는 반일파였던 이완용처럼 미국을 다녀온 이도 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같은 개혁파가 있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냈다. 왜 실패했을까? 문소영은 "김옥균의 실패는 고종만 바라보고, 고종의 결단으로 대부분이 결정되는 왕조국가의 한계 때문이"이라며 "고종이 변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못했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조선을 선도해야 할 지식인인 선비들이 주자학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치인이 조선에 있었다면

무엇보다 조선에는 우리에게는 민족원흉이지만 "영국 유학을 다녀와 '근대화론자'가 돼 메이지 천황 신정부가 들어선 뒤 유럽에서 배은 의회제도와 헌법제정 등 각종 제도를 일본에 이식시키며 급속하게 발전시킨 이토 히로부미"같은 이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독자적으로 '조선의 길'을 제시해줄 만한 조선의 사상가가 부재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지식층인 양반과 선비들이 받아들이고, 선비와 양반들의 각성이 백성들에게 스며들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만약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유럽과 미국을 주유했더라면, 최소한 1847년에 예정대로 중국에 사신으로라도 다녀왔더라면, 그의 대외정책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본문 113쪽)

조선 지식인 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였다가 친청파가 되고, 친청파였다가 친러파가 됐다. 그리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가 됐다. 주류기득권이 자리만 바꿨을 뿐 조선사회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에서 천황제로 권력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도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발탁"함으로써 정치지형만 아니라 일본사회 전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게 됐다.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본... 무능한 주류가 존속한 조선

그럼 조선에서는 언제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을까. 1862년 진주농민전쟁과 1894년 동학항쟁은 비주류가 주류에 저항한 사건이다. 하지만 조선 기득권은 이를 강경진압했다. "조선 고급관리 사교모임 같았던 독립협회"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활동을 폄훼했고 자주의식은 없었다. 강만길은 <고쳐 쓴 한국근현대사>(창비·2006)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은 세계 만국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 사람이 어떤 나라에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않으면 차지할 나라가 없을지라. 그런 고로 조선에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나라에 해육군이 조금만 있어 동학이나 의병 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하면 넉넉할지라."(본문 207쪽에서 재인용)

자신들 동학과 의병들에게 자신들 기득권만 보호해주는 군대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조선 관리들이었다. 일본과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자체가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무능한 주류 때문에 나라를 잃고 많다. 문제는 이후에도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 "한반도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경험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김대중 대통령이 호남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나, 2002년 민주당 내에서 소수이자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처럼 비주류가 주류를 이기고 권력을 잡은 적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12월 10일 대선후보 출마 연설을 통해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며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고 꼬집었다.

일본 극우 비난보다 조선 개항 실패를 직시해야

주류는 이런 노무현을 가만두지 않았다. 비주류 중 비주류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지만, 기득권은 5년 내내 노무현을 비난했고, 심지어 1년 만에 탄핵을 시도했다. <조선의 못난 개항>을 읽으면서 노무현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한편으로 불편했다. 이른바 '자학사관'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종과 메이지가 같은 시기에 태어나고, 권좌에 오르고, 죽었다. 결과는 고종은 메이지에게 폐위당하고 자신의 나라는 망했다는 점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이라 모독할 때 우리가 일본대사관에서 일장기만 불태운다면 어떻게 될까. 113년 전 대한제국 멸망의 교훈을 체득하지 못했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불편하지만 냉정하게 그 시대를 평가하고 분석해 다시는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의 못난 개항>(문소영 | 역사의아침 펴냄 | 2013.02. | 1만4000원)



조선의 못난 개항 -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

문소영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3)


태그:#고종, #조선, #개항, #일본, #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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