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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말썽 없이 17년간 우리 가족의 발이 돼준 든든한 친구이다.
▲ 17년 된 나의 애마, 프라이드 왜건 별 말썽 없이 17년간 우리 가족의 발이 돼준 든든한 친구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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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잘 나가는 나의 애마, 프라이드. 1996년산이니 올해로 만 17년째 우리 집의 발이 돼주고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다. 웬만한 짐은 거뜬히 실을 수 있는 왜건 형태라, 결혼 전 자취방 옮겨 다닐 때마다 짐꾼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지금도 짐 바리바리 챙겨 며칠 동안 가족여행이라도 떠날라치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오래되긴 했어도 지금껏 잔 고장 거의 없었고 연비 또한 그런대로 괜찮아 큰 불편함 없이 잘 타고 다닌다. 도드라진 팥색이어서 그런지, 어딜 가나 눈에 확 띄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주변 지인들과 간만에 전화로 안부를 묻다보면 늘 맨 처음 나오는 얘기가 언제 어디서 내 차 지나가는 걸 봤다는 거다. 이 근방에 오로지 딱 한 대뿐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오늘도 거리를 나선다.

그런데,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긴 하다. 오래되다보니 생긴 문제인데, 새 차로 바꾸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 성능도 외관도 다 괜찮은데, 그 좋아하는 음악을 운전 중에는 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음질이 좋지 않다는 그런 사치스런 불만이 아니라,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수많은 MP3는커녕 그 흔한 CD 음악조차 들을 수 없어서다.

차에는 오로지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만 장착돼 있다. 17년 전 출고 당시, MP3는 말할 것도 없고 CD 플레이어는 '감히' 소형 차량에 장착할 수 없는 값비싼 최첨단 기기였다. 음악은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게 그땐 일반적이었고, 이른바 '마니아'들은 그조차 기계음이라 싫다며 커다란 LP 판을 틀어놓고 음악 감상을 하곤 했다.

그 흔한 CDP도 없는 17년 된 내 차

대학 시절 한때 음악에 빠져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모은 적이 있었다. 용돈을 아껴가며 그때그때 구입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는 사연을 적어 곱게 포장한 책이나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주고받는 게 유행이었다. 지금도 거실 수납장에는 그때의 '추억'들 족히 수백 개가 먼지 수북한 채 모셔져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집안에서는 그것들을 꺼내 들을 수 없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에 있던 건 몇 해 전 낡아서 버렸고, 새로 산 것에는 아예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없었다. CD가 동시에 몇 장 들어가고, 한쪽에는 MP3을 저장한 외부저장장치(USB)를 꽂도록 제작돼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와 CD가 병존하던 틀에서, 카세트테이프 자리에 외부저장장치가 들어선 것이다.

거실 수납장을 여니 핑크 플로이드, 너바나, 레드 제플린, 메탈리카 등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던 것들이다. 요즘에야 컴퓨터만 켜면 언제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굳이 이것을 꺼내 들어보려면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지금 우리 집의 유일한 카세트 플레이어는 차에만 있기 때문이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더 이상 만들지 않으니 이제는 어디서도 카세트테이프를 구할 수 없다.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는 알 길 없지만, 카세트 플레이어와 카세트테이프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고물'을 넘어 어느덧 '유물'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CD로 굽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오로지 얼마 간 추억으로 남았다가 버려질 일만 남은 셈이다.

'공동운명체'가 돼버린 차와 카세트테이프

수납장을 차지하고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하나둘씩 차로 옮기고 있다. 조만간 차 뒤 넓은 짐칸은 카세트테이프를 담은 상자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시 그것들을 거실로 들고 올라올 일은 없을 것이다. 다가올 여름철 차 안이 뜨거워 테이프가 손상이 가는 경우가 더러 있겠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가져와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장착한 내 차는 카세트테이프가 분리수거함에 버려지기 전 마지막 거처다. 모르긴 해도 17년 된 차와 수많은 카세트테이프는 동시에 운명을 맞게 될 듯하다. 우연히 열어본 한 카세트테이프의 케이스에 발매일이 1996년으로 적혀있었다. 차가 아니면 이것을 틀 수 없고, 이것 아니면 차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이른바 '공동운명체'다.

요즘에도 종종 음악을 선물 받는다. 스마트폰 메신저로 건네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정성스럽게 포장한 CD다. 휴일 집에서 틀어보거나 출근해 짬을 내 컴퓨터를 통해 듣게 되는데, 출퇴근 시간 차 안에서 여유롭게 들을 수 없어서 못내 아쉽다. 얼마 전 MP3와 CD 플레이어를 차에 따로 장착하려고도 했지만, 되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비아냥 거리는 소리만 들었다.

간혹 지인들이 차에라도 탈라치면 어김없이 신기한 듯 카세트 플레이어를 쳐다보며 제대로 작동은 되는지 묻곤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골동품'이 차에 달려있는 것 자체를 신기해한다. 심지어는 요즘에 내비게이션 없는 차도 찾아보기 힘든데, CD조차도 들을 수 없는 차는 이게 유일할 거라면서 조만간 박물관에 기증될지도 모르니 차를 소중히 다루라며 조롱해댄다.

새차를 구입하게 된다면, 음악 때문일 듯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려면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 우리집의 유일한 카세트 플레이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려면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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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내 차는 '탈'거리가 아닌, '볼'거리가 돼버렸다.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마저 차에 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 처음엔 등교할 때 엄마나 아빠더러 교문까지 태워달라고 그렇게 떼를 쓰더니 이젠 아무리 늦어도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이유를 몰랐을 때는 무척 대견했는데, 알고 보니 친구들이 하도 놀려대서 싫단다. 문제는 낡은 차에 있었던 거다.

온갖 자동차에 관심이 많고 웬만한 외제차 이름까지도 줄줄 꿰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17년 된 구형 프라이드는 낯설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럭저럭 잘 관리하며 타서 외관이 녹슬거나 찌그러지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조차 아직도 이런 게 굴러다니느냐며 의아해 하는 것이다. 물론,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고 하면 무슨 석기시대 얘기쯤으로 받아들일 아이들이다.

수리하기 힘든 고장이 나거나 성능이 떨어져서 새 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듣자니까 자가용 운전자 중 새 차를 사서 주행거리가 10만 킬로미터 넘게 운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고 한다. 신차의 교체 주기가 7년도 안 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나라가 이른바 '세계 5대 자동차 강국'이라는데, 분명 기술력이 부족한 탓은 아닐 것이다.

외려 눈부신 기술력으로 인해 자동차의 교체 주기가 빨라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첨단 기기를 장착한 차가 앞 다퉈 출시되다보니 신차의 '수명'이 해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요즘에는 편의 장치와 첨단 기기 장착 유무는 연비나 디자인 못지않게 새 차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만약 조만간 새 차를 구입하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차 안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CD마저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시대에 MP3 너머에는 어떤 게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기술의 발전 속도라면 얼마 안 있어 CD도 카세트테이프마냥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는 흡사 17년 간 박동해온 차의 익숙한 엔진소리처럼 여전히 살갑다.

<워낭소리> 할아버지의 소 같은 존재, 프라이드

사족 하나. 내 차는 '오토'가 아니라 당연히 '수동'이다. 그땐 장애인용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수동 변속기어 차량이었다. 페달이 두 개뿐인 자동차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신기했으니까. 그런데 요즘엔 수동 변속기어 차량이라는 이유로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차량의 폭증으로 교통체증이 일상화해 도로 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하는 고통이 우선 그렇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불편함도 경험했다. 어느 눈 내리던 추운 겨울날 밤,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후 대리운전을 불렀다. 갑작스럽게 마련된 술자리여서 차를 가져온 탓이다. 10여 분 뒤 바로 운전자가 왔지만, 운전석에 앉더니 다짜고짜 미안하다면서 다른 운전자를 불러주겠다면서 잠깐 기다리라고만 말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불렀다는 운전자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말만 없었어도 곧장 다른 대리운전을 불렀을 터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그제야 두툼한 점퍼 차림을 한 중년의 운전자가 나타났다. 조수석에 탄 후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리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이 잘못 하신 거예요. 대리운전을 부르실 때 수동 차량이라고 먼저 말씀하셨어야죠. 수동 차량에 익숙지 않은 대리기사들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저 역시 수동 차량 손님 모셔본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더구나 그 흔한 CD 플레이어도 없는 차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운전 중 좋아하는 음악도 못 듣고, 술 마신 후 마음 놓고 대리운전도 못 부르는 낡은 차지만, 그래도 17년 간 아무런 말썽 피우지 않고 우리 가족의 발이 돼 준 든든한 친구다. 몇 해 전 상영된 영화 <워낭소리>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소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태그:#나의 애마, #카세트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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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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