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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愛馬)는 사랑스런 말(馬)을 일컫는 말(言)이다. 말이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을 때, 이런 애마를 가지고 위세를 떨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초입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이 애마가 자동차의 애칭쯤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 자동차 보유 수를 1.5가정 당 1대로 보고 있으니 과히 자동차 천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마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동차를 굴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사치품 중의 사치품에 속했다. 대중 교통인 버스와 기차를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때에 자동차를 굴린다는 것은 여간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많이 으스대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특권층에 속했다.

대학 시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휴학을 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충북에 위치한 대형 시멘트 회사에 부동산 등기 업무를 맡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 나이지만 회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행해 주는 만큼 근 달포의 의식주를 그 회사에서 해결해 주었다. 숙소에서 회사까지 다닐 때 쓰라며 고급 승용차를 제공해 줘서 편안하게 출퇴근할 수 있었다. 격에 맞지 않게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출근할 때마다 마음의 부담을 느껴야 했다. 당시 중년 이상의 노동자들은 도시락을 허리에 차고 작업복 차림 그대로 먼 길을 걸어서 회사에 출근하는데, 젊디 젊은 나는 중형 자동차를 타고 출근한다는 게 여간 부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회사 상무급이 타고 다니던 차를 내가 타고 다녔으니 말이다. 구름떼처럼 가고오는 노동자들 속을 자동차를 타고 표표히 드나드는 일은 서로에게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면허 취득과 동시에 새차 한 대를 뽑다

지금은 잊혀진 차가 됐지만, 나의 애마 엘란트라는 많은 일을 해냈다. 사진은 지난 2011년 4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진화, 바퀴 위의 녹색혁명'을 주제로 한 '2011서울 모터쇼' 모습.
 지금은 잊혀진 차가 됐지만, 나의 애마 엘란트라는 많은 일을 해냈다. 사진은 지난 2011년 4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진화, 바퀴 위의 녹색혁명'을 주제로 한 '2011서울 모터쇼'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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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 교통편은 대중교통이었다. 버스 기차 등을 타고 다니는 것이 속 편했다. 택시도 몹시 급한 일 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시적(斜視的)으로 보이기조차 했다. 대학 때, 한 강사가 수업에 들어와서 버스는 앞으로 타서 뒤로 내리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또 서울 시내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묻는 말에 분개하여 수업 거부를 선동하기도 했다. 민중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결혼을 하고 운전학원을 다니기까지 많은 갈등을 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특권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운전 면허증을 취득한다는 것은 특권층에 진입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나와 달리 그 일을 판단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비장애인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자동차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다녔다.

그즈음 직장을 다니던 후배가 급할 땐 나를 목적지까지 종종 수송해 주었는데, 그 때 그 후배가 끌고 다니던 차가 포니투였다. 골동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낡은 차였는데, 이 자동차는 내가 지금의 아내 친정에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갈 때 나의 발이 되어 주었다. 시골에서조차 보기 어려운 구닥다리 포니투였으니까 모르긴 해도 낡은 차를 운전하고 먼 곳까지 온 그 정성을 높이 사 결혼을 승낙해 주지 않았나 싶다.

내가 운전 면허증을 취득한 것은 1995년 가을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면허증 취득과 동시에 승용차를 한 대 뽑았다. 장애인에게 보철용 차량 구입 자금을 구청에서 대출해 준 데 힘입은 결과 같다. 주위에서 현대 엘란트라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용해서 인기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구입했다. 차를 구입하면서도 분에 넘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짙은 청색에 배기량 1450 CC 엘란트라는 그 후 줄곧 나의 발이 되어 주었다. 자동차를 이렇게 급하게 구입하게 된 것도 아이들이 태어남으로 인해 가족 수가 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자동차를 구입할 당시 두 아이가 있었는데(그 뒤 한 명 더 태어나 세 아이가 되었다), 몸이 불편한 내가 어린 아이들을 맡을 수 없어 아내가 이중의 고생을 해야 했다. 보고 있는 내 마음이 밝을 수 없었다.

하얀 선이 쫙!!!...나의 애마에 훈장을 달다 

그때 나는 입시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엘란트라를 뽑은 그 이틑날, 나는 용감하게도 차를 직접 끌고 노량진에 위치한 학원에 출근을 했다. 오후 3시쯤의 시각은 출퇴근 때가 아니어서 차량이 붐비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날 따라 몹시 밀렸다. '초보운전'이란 표지판을 뒤 차창에 부착했지만 그것을 보고 양보해 주는 착한 운전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은평구 역촌동에서 영등포구 노량진까지 자가 운전을 하고 가기는 갔는데, 어떻게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구름 위를 날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목적지엔 무사히 당도한 셈이다. 그런데 사고는 그 때 발생했다. 학원 주차장에 차를 들여 대야만 했다. 나는 생명력이 거의 다 된 학원 봉고차 옆에 나의 애마 엘란트라를 대려고 했다. 아차, 이게 웬 일인가! 주차를 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폐차 직전에 있는 학원 봉고차가 내 자동차에 깊고 긴 선을 긋고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지면 나의 운전 부주의로 봉고차가 긁게 만든 것이다. 나의 새 승용차엔 뚜렷한 자국이 길게 났지만 봉고차엔 아무 흔적도 없었다.

학원에 올라가서 동료 선생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니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선생님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이다.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고 어떻게 새 차를 뽑을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보통 중고 승용차를 몇 년 굴리다가 운전에 익숙해지고 난 뒤 새 차를 뽑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새 차에 굵고 긴 하얀 선을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양 나는 줄곧 달고 다녀야 했다.

트레일러와 부딪혀 앞 범퍼가 크게 망가졌다

그래도 엘란트라는 나의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웬만한 곳은 그것이 나 혹은 우리 가족의 이동을 책임져 주었다. 한 번은 전 가족(전 가족이라고 해 보았자 5명)을 태우고 남쪽으로 나들이를 갔다. 가족이 동승하면 내가 혼자 운전할 때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서울 시내의 도로는 시도 때도 없이 밀려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 때도 그랬다. 지하철 공사 때문에 교통난은 더 심했던 것 같다.

가능한 큰 차 뒤에 붙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지만 그날 따라 내 차 앞에 대형 트레일러가 자리를 차지하고 가다 말다를 반복했다. 은평구 신사동 오거리쯤이었던 것 같다. 파란불에 이어 빨간불로 바꾸기 전 노란불이 들어올 때였다. 내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경우 트레일러는 통과해 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대형 트레일러가 급정거를 하였다. 조심해서 운전한다고 했지만 내 차 앞 부분이 트레일러 뒤와 부딪혀 크게 망가졌다.

차끼리 추돌했으니 교통사고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앞 트레일러 운전자는 내려와 보지도 않았다. 물론 뒤에서 부딪힌 나의 잘못이 컸다. 그리고 내 차 앞 범퍼를 비롯해 심히 우그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럴 때 잘못이 없다고 해도 추돌한 차의 당사자에 속하니까 운전자가 내려와 봐야 정상이다. 그리고 대형 트레일러는 별 피해가 없다고 해도 뒤에서 박은 새 차 엘란트라가 많이 훼손되었으니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신호가 바뀌자 트레일러는 그대로 가 버렸다. 좀 서운했다.

내 애마 엘란트라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것은 내가 두메산골 교회로 부임하고 나서였다. 내가 목회를 한 곳은 외길로 들어가서 다시 들어갔던 외길로 나와야 하는 산골 마지막 마을이었다. 버스가 하루에 세 번 들어오긴 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운행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 마을에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런 터라 동네에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내 차를 찾았다. 병원엘 갈 일, 버스가 떨어진 밤 늦은 시각에 찾는 전화, 여러 사람이 오일장에 갈 때에도 내 차를 의지했다. 나는 돌발 사항이 발생할 때 찾으라고 자주 광고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급한 일은 나의 애마 엘란트라와 함께 내가 봉사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즐겁게 그 일을 감내했다.

그해 겨울, 엘란트라는 구급차가 되었다

이 일은 나의 애마 엘란트라에게도 좀 미안하다. 폐차한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아니다. 겨울이 다가올 때였다. 교회와 담을 사이에 두고 지내는 분이 있었다. 교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농촌 생활의 불편함을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준 분이다. 새벽 기도 끝나고 뒤뜰에 기르고 있는 토끼 먹이를 주고 있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오전 7시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목사님, 지금 병원 문 연데 있을까유~."

충청도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로 물어왔지만 그 시각에 토끼장까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필시 무슨 급한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글쎄요, 면 서울의원은 의사가 병원 3층에서 생활을 하니까 어떻게 급한 부탁이면 들어줄 거에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예, 저희 바깥 양반이 약을 마셨구만유.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나는 옆집으로 뛰어 갔다. 마당 한 쪽에 육중한 몸이 뒹굴고 있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고 악을 쓰며 떼굴떼굴 굴러댔다. 토한 농약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나는 차에 바깥양반을 싣고 면(面)에 있는 의원으로 달렸다. 고함은 그치지가 않았다. 면 소재지에 있는 의원에선 의사가 나와보고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이르며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옥천보다는 영동읍이 그래도 좀 가깝다. 우리 면에서 영동까지의 길 중간 쯤 왔을 때, 고함 소리도 멈춰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애마 엘란트라는 열심히 달렸다. 영동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니 마침 숙직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진맥을 짚어 보더니 '사망'이란 말 대신 영안실이 마련되어 있는 옥천의 큰 병원엘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시 농약 마신 환자를 싣고 의사가 말해 준 병원으로 달렸다.

옥천의 병원에서는 '사망했다'는 말과 동시에 그의 몸을 하얀 천으로 덮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면에서 영동으로 오는 중간 쯤, 그가 고통을 못 참겠다는 고함 소리가 멎고 몸의 움직임이 그쳤을 때, 그는 숨을 거둔 것이다. 그렇다면 시체를 싣고 영동 병원으로 또 거기서 옥천병원으로 두 시간을 달린 것이다. 내 애마 엘란트라는 억울하게 죽은 농부(그는 보증을 잘못 서 많은 재산을 잃을 지경에 와 있었다)의 시체를 싣고 병원을 전전한 것이다.

나는 이 일로 애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실은 미안하다기보다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나의 애마(愛馬) 엘란트라는 그 일로 애마(哀馬)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애마는 10년동안 나와 애환을 함께 하다가 없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가 나를 섬긴만큼 내가 그를 아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그는 사라지면서까지 그의 부품들을 필요한 다른 자동차에게 제공했다. 아낌없이 주는 애마가 된 것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나는 조애마문(弔愛馬文)이라도 써서 엘란트라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애마 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



태그:#엘란트라, #추돌 사고, #농촌 목회,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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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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