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가 예술영화관에서만 상영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과정' 또는 '21세기 마녀사냥'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읽히며 집단의 폭력에 대한 반성을 일으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수많은 리뷰에서 말하는 집단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제하고, 의문을 일으켰던 한 지점을 들여다보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까 한다.

영화는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루카스와 친구의 딸이자 유치원 원생인 클라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루카스는 클라라를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다정하게 놀아주면서 친한 사이가 된다. 어느날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하트 모양의 선물을 건네는데 루카스는 받아주지 않는다. 그날 저녁, 클라라는 유치원에 혼자 남아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묘사하는 말을 하며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추행했다는 오해를 낳게 한다. 원장과 유치원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서 루카스는 꼼짝없이 소아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하며 폭력을 겪게 된다.

거짓말을 퍼트리는 소녀 한 소녀의 거짓말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오랜 친구들로부터 폭력을 겪기 시작한다.

▲ 거짓말을 퍼트리는 소녀 한 소녀의 거짓말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오랜 친구들로부터 폭력을 겪기 시작한다. ⓒ 엣나인필름


영화는 전반적으로 담담하게 상황을 그려가면서 갈등의 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감독은 처음부터 클라라의 내면을 드러내고 아이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객에게 모두 보여주고서 집단(사실 이들은 평범한 무리들이다)과 개인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확산되어가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는 존재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인물들 간의 대화와 행동을 과장없이 보여주며 모든 판단을 관객에게 떠넘기는데, 예술영화들이 그렇듯이 감동을 자아내는 배경 음악이나 촬영 기법은 극히 절제되어 있다. 감동이나 충격을 주는 기법들이 절제된 가운데 감독은 주인공 루카스의 눈빛을 관객의 눈 앞으로 자주 끌어당기면서 루카스의 태도와 선택을 주시하도록 한다. 이 지점에서 감독이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루카스를 둘러싸고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아니라 폭력 가운데 처한 루카스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가운데 나의 의아함도 루카스에 대한 것이었다. 집단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폭력의 양상 역시 어느 동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정도의 것이었다. 집단의 폭력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를 그린 영화들보다 더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온 문제는 루카스였다. 루카스가 친구들의 폭력을 견디며 1년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들을 데리고서 친구들 무리 속으로 들어온다. 영화에서는 루카스가 친구들과 오해를 푸는 계기와 화해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채 돌아오는데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화해의 계기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루카스는 왜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까? 왜 감독은 화해의 장면, 친구들의 오해가 풀리는 극적인 장면을 덜어냈을까?' 이 부분에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의아함의 줄기를 따라가다보면 이 영화의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루카스의 마을을 확대해서 결혼으로, 종교로, 국가로, 자본주의로 생각해보자. 나는 이 제도들의 그림자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화해의 계기도 없이 머물러 있는지, 화해하지 않고서도 나는 화해한 것처럼 살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넌 왜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니? 왜 우리와 다르게 살려고 하는거야?'라는 질문은, 사실은 무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무리 지으려는 속성은 무리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헌트>의 주인공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리 바깥에 있을 때 얼마나 쉽게 폭력에 노출되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화해의 계기 없이도 다시 마을로 돌아와 무리 속에 아들까지 넣으며 속하려고 한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을 흔들어놓는 장치를 둔다. 루카스는 마을로 돌아온 직후, 친구들과 사냥을 나가서 친구들 중 한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로부터 겨냥을 당한다. 관객은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줄 알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이 반전에서 인간에 대한 실망에 치를 떤다. 반면 루카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한 눈빛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루카스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과연 마을을 떠났을까? 관객의 반응이 정직한 반응이라면, 루카스는 마을을 떠나는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루카스의 눈빛을 보면, 마을을 떠날 의지가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담담함과 실망이 뒤섞인 눈빛에서 루카스가 그동안 폭력에 대응했던 소극적인 태도가 겹쳐보인다.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 루카스의 눈빛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 루카스의 눈빛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엣나인필름


영화를 생각하며 김수영의 시를 읽다가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김수영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밖으로 걸어나가 듯이 자기 바깥으로 걸어나가고 싶었다. 아니, 자기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세계의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세계를 무수한 간단(間斷, 계속되던 것이 한동안 끊김)의 시간으로 인식했다. 세계는 눈깜짝임으로 단절될 수 있는 곳이다. 그 순간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몸은 그대로이고 눈만 깜짝인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시인처럼 나도 이 세계가 피곤하다. 단독자인 내가 다룰 수 없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는 인식으로라도 세계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다. 눈을 깜짝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의 몸과 인식은 이렇게 단절된다. 나의 속한 곳과 속하고 싶지 않은 곳은 동일하고, 나의 속한 곳과 속하고 싶은 곳은 다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제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들이 곳곳에 많다. 병역거부, 비혼, 반자본주의, 주민등록 거부 등. 하물며 스마트폰에서 피처폰으로 바꾸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왜 이들은 최첨단 유행과 편리를 거부하는 것일까? 제도 속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일까.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선택 역시 나에게 달려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아, 너도 행복하지 않을거야'라고 섣불리 비관할 수 없듯이 '나는 이 제도 속에서 행복해, 너도 행복할거야' 혹은 '네가 잘 하면 행복할 수 있어'라고 쉽게 긍정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나'(제도에 물든 나)의 밖으로 나가 '나'(새로운 나 일 수도 있고 본래의 나 일 수도 있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나를 객관화 시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사랑을 걷어내는 것이고, 그래서 시인은 '사랑이 추방당하는 시간'이라고 노래했다.

루카스가 마을로 돌아온 이유를 고향에 대한 사랑, 친구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집단 폭력 속에서도 인내하며 친구들을 떠나지 않는 루카스의 태도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은 계속 머물러야 하는 곳인가'하는 물음에서 다시 생각해본다면,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친밀감과 애정은 무리에 속하고 싶은 본성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무리에 속하고 싶은 본성은 이 세계의 시스템과 너무나 잘 들어맞아 시스템의 그림자를 알면서도 눈감게 만든다.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고민은 행복과 안전의 양자택일과 맞닿아 있다. 루카스는 폭력을 견디며 무리 속에 남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시인 김소연이 결혼에 대해 쓴 한 산문에서 '제도 속에서는 행복한 삶이 우선되지 않는다. 안전한 삶을 우선 보장한다'고 말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안전하게 보장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고 나 역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세계의 그림자가 불편하고 거부하고 싶지만, 눈을 깜빡이는 정도로만 세계를 거부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익숙한 세계가 펼쳐지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이 영화의 힘이 여기에 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제도 속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그 김수영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집단과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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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와 시, 소설을 좋아했다. 지금은 워킹맘으로 양육과 일 두마리 토끼를 잡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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