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되고 있는 사극들의 부진이 심상치 않다. '사극' 타이틀만 달아도 시청률 20%는 가뿐히 넘었던 과거와는 아주 다른 양상이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사극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MBC <마의>조차 10% 후반대에서 답보 상태이고, KBS 2TV <전우치>, SBS <대풍수>, KBS 1TV <대왕의 꿈> 등은 10% 초반대나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물고 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사극의 장기불황이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방송 된 SBS 사극 <신의>는 100억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2012년 방송 된 SBS 사극 <신의>는 100억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 SBS


2012년 시작된 '사극 잔혹사'

2012년 초반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최고 시청률 42.2%, 평균 시청률 33%를 기록한 MBC <해를 품은 달>이 '사극불패' 공식을 입증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를 품은 달> 이후 각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내놓은 사극들은 모두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부진에 허덕였다. 방송사의 최고 효자상품이었던 사극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진의 시작은 MBC가 자존심을 걸고 만들었던 250억대 사극 <무신>부터였다. <용의 눈물><태조 왕건><야인시대>로 유명한 이환경 작가가 집필을 맡고 김주혁, 김규리, 정보석, 박상민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했지만, 시청률은 오랫동안 한 자릿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최종 스코어도 14%로 보잘것없었다. 국민사극을 만들어 보겠다던 MBC의 야심 찬 포부가 무색해지는 성적표였다.

송승헌, 박민영, 이범수 등이 출연했던 MBC <닥터 진> 역시 지지부진한 시청률로 아쉬움을 남겼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원작 만화 <타임슬립 닥터 진>을 우리나라에 맞게 각색해 화제를 모았지만, 경쟁작이었던 SBS <신사의 품격>, KBS 2TV <개그콘서트>에 밀려 동시간대 3위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닥터 진>에 큰 기대를 걸었던 MBC로선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닥터 진>과 비슷한 소재를 차용했던 SBS <신의> 또한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명의 눈동자><모래시계><태왕사신기>의 황금콤비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의기투합했고, 톱스타 김희선이 6년 만에 컴백을 결정해 방송 시작 전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정작 손에 받아든 성적표는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10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부었음에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판타지 퓨전사극을 표방한 MBC <아랑사또전>

판타지 퓨전사극을 표방한 MBC <아랑사또전> ⓒ MBC


군 제대 후 이준기의 첫 TV 복귀작 MBC <아랑사또전>의 실패는 충격적이었다. MBC는 방송사 건물 전면을 <아랑사또전> 포스터로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스페셜 방송 <아랑사또전 100배 즐기기>를 편성하는 등 홍보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처음부터 KBS <각시탈>의 기세에 밀려 제대로 된 힘조차 쓰지 못한데다가, 송중기 주연의 <착한남자>에 연이어 같은 시간대 1위를 내주며 자존심을 완전히 구긴 것이다. 다소 생소한 판타지 장르와 허술한 대본이 만들어 낸 참극이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지금 방송되고 있는 <마의><전우치><대풍수><대왕의 꿈>조차 이러한 부진 양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의>는 <허준><대중금> 신화를 만든 이병훈 PD와 <이산><동이>의 김이영 작가가 각각 연출과 집필을 맡고, 영화배우 조승우의 첫 드라마 데뷔작이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20%대 시청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경쟁작인 KBS 2TV <학교 2013>이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면서 3% 차이의 박빙 구도가 전개되는 형국이다.

차태현의 드라마 복귀작 <전우치>, 최수종 주연의 정통사극 <대왕의 꿈> 또한 아슬아슬하게 10%대 시청률에 턱걸이하고 있을 뿐이고, 설상가상으로 200억 대작 <대풍수>는 한 자릿수 시청률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100억대를 훌쩍 넘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사극을 만들고 있지만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는, '고비용 저효율'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방송가 일각에서 사극 무용론이 나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MBC <마의>는 이병훈표 성공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치고 있다.

MBC <마의>는 이병훈표 성공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치고 있다. ⓒ MBC


한국 사극, 부진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극이 왜 이렇게까지 부진에 빠진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 시장이 전체적으로 활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극뿐 아니라 다른 드라마 장르 역시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현재 주중에 방송되는 작품 중 시청률 20%를 넘기는 작품은 단 한편도 없다. 그만큼 드라마 시청률 파이가 현저히 줄어든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드라마 시장 침체라는 외부 요인이 있긴 하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해를 품은 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재밌는 드라마'는 어떻게든 성공하기 마련인데 최근의 사극들이 하나같이 침체기에 빠져든 것은 그만큼 재미가 없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왜 재미가 없는지, 왜 시청자들의 흥미를 당기지 못하는지를 심각히 고민해 봐야 한다.

<마의> 같은 경우, 이병훈표 사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비범한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승리한다는 내용은 <허준><대장금><이산><동이> 등 기존의 이병훈 사극에서 이미 지겹게 본 스토리다. 여기에 <마의>는 <허준><대장금>에 이은 의학 드라마 3부작이다. 스토리에 소재까지 비슷하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드라마가 돼버린 것이다.

과거 <허준>이나 <대장금>이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히트작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드라마'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의>는 그간의 성공공식을 그대로 답습할 뿐 전작과의 확실한 차별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학교 2013>이 전혀 다른 학원물을 선포하며 맹추격하고 있는 지금, <마의> 또한 나름의 개척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시청률 3% 차이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숫자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닥터 진>이나 <신의>의 부진 역시 차별화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2012년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작품은 무려 3편이나 된다. SBS <옥탑방 왕세자>를 시작으로 <닥터 진><신의>가 연달아 방송된 것이다. <옥탑방 왕세자>가 타임슬립으로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를 거의 다 보여준 상태에서 <닥터 진>과 <신의>가 펼쳐낼 스토리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시청자들 역시 신선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은 '의사가 과거로 간다'는 콘셉트까지 비슷해 식상함을 더욱 배가시켰다. 소재 선정부터 시청자들을 끌어 앉히는 데 실패한 셈이다.

 차태현 주연의 KBS 사극 <전우치>

차태현 주연의 KBS 사극 <전우치> ⓒ KBS


<아랑사또전>이나 <전우치>는 이와는 반대의 경우다. 이 두 작품이 '판타지 퓨전 사극'이라는 생소한 장르에 도전한 용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새로움을 강조하다가 드라마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놓친 것은 아쉽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세계관, 엉성한 대본, 유치한 연출은 장르의 신선함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완성도가 높지 못한 드라마가 뒷심이 딸리는 건 당연하다. <아랑사또전>, <전우치>의 사례는 후에 만들어질 판타지 퓨전 사극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2012년 사극들이 부진을 겪은 데에는 드라마 시장의 침체, 도전의식의 부재, 개척정신의 실종, 식상한 소재차용, 완성도 저하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2013년 방송될 <장옥정, 사랑에 살다><칼과 꽃><구가의서> 등의 사극들이 2012년의 악몽을 되새기지 않으려면 앞서 거론한 문제들부터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처절한 자기반성 없이는 냉정한 시청자들을 돌려세울 수 없다.

지금껏 한국 사극은 50여 년의 역사 동안 수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시청자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왔다. 과연 2013년의 사극은 그간의 부진을 만회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한국 사극이 다시 한 번 냉엄한 심판대에 올라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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