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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를 겸한 회식 자리. 불판에는 갈비가 맛스럽게 구워져간다. 하지만 벽걸이 TV의 숫자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서인지 그리 기분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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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술 한잔을 기울인 후 다시 바라보지만 쉽게 변하질 않는다. 그놈의 숫자가 뭔지. 작게만 느껴지는 그 간격이 좀처럼 좁혀지질 않으니 애가 탄다. 평소 즐겨 먹던 갈비도 고무줄 마냥 질기기만 한 느낌이다.

흥이 나질 않으니 가볍게 1차만 하고 집으로 향한다. 날이 참 을씨년스럽다. 친구를 불러 한잔 더 할까도 생각해 보지만 이내 마음을 접는다. 왠지 그냥 혼자이고 싶다.

'젠장. 왜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지.'

배낭여행 중 찍었던 섬마을 풍경입니다. 섬이름은 오래 되어서 생각이 나질 않네요.
▲ 섬마을 전경 배낭여행 중 찍었던 섬마을 풍경입니다. 섬이름은 오래 되어서 생각이 나질 않네요.
ⓒ 윤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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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의 배낭여행 시절. 니카라과의 포토시(Potosi) 라는 작은 마을에서 배편으로 엘살바도르의 라우니온(La Union)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작은 도시이다 보니 정기적인 배편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해안경비대에 들러 마을의 유일한 선주를 소개받은 후 선주 일정에 맞추어 며칠을 Potosi에 머문 후 국경을 넘게 되었다.

떠나는 날 아침 부둣가로 나가보니 손님은 나와 아주머님 한 분이 전부였고, 배 안에는 바나나 등의 과일과 닭 몇 마리, 쌀 등이 가득 실렸다. 왠지 밀수 배 느낌이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배는 1시간 반가량 지난 후 한 작은 섬에 도착했고, 부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짐을 다 내린 후 선주가 내게 다가오더니 오늘은 더 이상 배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돈을 요구했다. 잘 이해가 가질 않아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에게 설명을 부탁하니 이곳은 선주의 집이 있는 엘살바도르의 한 섬인데, 선주가 마음을 바꿨다면서, 이곳에서 La Union으로 가는 정기 노선이 있으니 다음날 아침에 그 배를 타고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분명 육지에 있는 La Union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완전 자기 마음대로였다. 약속을 어긴 선주에게 화도 나고 이 모양 이 꼴이니 나라가 가난하지 하는 교만한 마음에 육두문자라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외딴 섬에서 생매장을 당할 수도 있으니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다음날 이른 새벽에 떠나는 배편을 알아본 후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았다.

방을 잡은 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샤워를 하고 방에 설치된 해먹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고 한참을 뒤척이기만 하다가 결국 눈을 떴다. 그 때 태평양과 섬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태평양과 조용한 작은 섬마을. 이상하리만큼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전의 흥분은 어느덧 사라졌고, 마음이 평안해지니 이전까지 보지 못하던 태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결국 해먹에 누워 하염없이 태평양을 바라본 후,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음 편하게 있다가자면서 이 섬에서 며칠 밤을 더 머물기로 했다.

니카라과 Isla de Ometepe 이야기 속의 섬은 아니지만. 마무리 글을 쓰며 떠오른 사진이네요.
▲ 한마리 새처럼 니카라과 Isla de Ometepe 이야기 속의 섬은 아니지만. 마무리 글을 쓰며 떠오른 사진이네요.
ⓒ 윤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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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섬에 모래사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어설픈 스페인어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길을 물어야 했다. 그 때 한 흑인 친구가 영어할 줄 아냐면서 말을 걸어왔다. 뉴욕에서 일을 하다가 그곳의 바쁜 일상이 싫어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였는데, 바다낚시를 갈 생각인데 그 때 비치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낚시 준비가 끝나길 기다린 후에 작은 보트에 몸을 싣게 되었다. 보트가 출발하자, 바다 냄새와 바람 그리고 멀리 보이는 태평양까지 모든 것이 너무 좋게 다가왔다. 정말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혼자 비치에 가 보았자 별 재미도 없을 것 같아 그 친구에게 낚시 구경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고 배 안에 남게 되었다. 비록 손맛을 느끼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난생 처음으로 하는 바다낚시였다. 한국에서도 못 해본 바다낚시를 태평양에서 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 보트를 빠르게 몰면서 새우 모형의 플라스틱 미끼를 이용해 낚시를 하는 것이었는데, 보트가 출렁일 때마다 혹여나 물에 빠지면 어떡하나 겁이 나기도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아쉬운 것은 날이 좋지 않아선지 물고기가 전혀 잡히질 않았다. 가끔 미끼를 물기는 했지만 이내 빠져나가기만 했다. 결국 몇 시간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고기 잡는 맛이 없으니 조금씩 지루해졌다. 친구도 오늘은 물이 좋지 않다면서 마을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조금 아쉬웠다. 한 마리라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줄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잡혔다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만치에 보이는 물고기 한 마리! 월척이었다. 친구의 빠른 손놀림과 물고기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하길 기도했다. 내 기도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물고기가 배안에 '쿵'하고 떨어졌고, 70cm 이상은 되어 보이는 큰 놈이 배 안에서 파닥거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나도 흥분이 되었고, 친구들 모두도 이 한 마리 때문에 얼마나 신나했는지 모른다.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기념 삼아 낚시잡지에나 나올 듯한 포즈로 사진을 찍은 후 마을로 돌아왔는데, 그 흥분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뜻하지 않게 찾아 온 외딴 섬. 그리고 환상적인 바다낚시. 왜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올랐을까?

어쩌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은 대선의 결과가 나에게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인지 모르겠다. 삶의 진로를 바꿔볼까 망설이던 것의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미루었던 여행을 다시 계획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뭘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할 수도 있다. 늦은 밤 글을 올리는 나의 모습이 위로받고 싶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난 살아 있다, 라는 나만의 몸부림인 것처럼 말이다.

대선 패배의 상실감과 배낭여행에서의 황당함의 무게가 같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 땅에 소외 받는 많은 사람들, 대안이 없어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그들에 비하면 나의 투덜거림은 그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 이렇게 많은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쌀쌀한 날씨에도 투표소로 향하고, 나 자신 또한 나라와 정치에 대한 나름의 처절한 고민을 하고.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 안철수 전 후보님, 이정희 대표님, 그리고 끝까지 당당한 모습을 보이신 문재인 후보님. 그들 모두가 진정한 승자다. 5대 0 게임을 3대 2게임으로 만들어주신 그분들이 있었기에 간절함과 떨림으로 이번 대선을 함께할 수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말이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며 덤덤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들 중에는 내 부모님도 있고 친한 친구도 있을 것이기에,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택이기에 말이다.

2012.12.20 새벽 박근혜 당선 확정

뜻하지 않게 도착한 이 섬이 환상의 섬이 되길 간절히, 정말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태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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