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냘픈 몸과 달리 이정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렬함'이다. 연기를 할 때든 노래를 할 때든 이정현은 '파격'과 '광기'라는 수식어로 묶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목이 말랐다"고 표현했다. 영화 <꽃잎>(1996)으로 혜성처럼 데뷔한 이후, 평단과 대중에게 꾸준히 주목을 받았지만 갈증이 있었다던 그였다.

그러던 이정현이 <범죄소년>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미혼모 역할이다. 캐릭터로만 따지면 이번에도 평범하진 않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가 맡았던 효승은 미혼모라는 상황적 처지 빼놓고는 우리 사회의 여느 젊은 여자와 다를 바 없는 인물. 우리의 시선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꽃잎>으로 데뷔한 이후 제 이미지가 너무 강했죠?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공포영화를 하거나 센 캐릭터를 주로 했죠. 그때의 힘든 마음을 그걸 음반으로 풀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도 영화에 대한 갈망은 항상 있었어요.. 오랜만에 박찬욱 감독님의 아이폰 영화인 <파란만장>을 했는데 거기서도 무당 역이었네요(웃음). 제가 좋아하는 감독님이라 하게 됐죠."

ⓒ 영화사 남원


고사했던 <범죄소년>, 하지만 미혼모 다큐에 눈물 쏟아

멋있게 짠! 하고 영화계에 나타나고 싶었다던 이정현은 사실 이번 영화 출연을 많이 고민했다. 역할 이전에 촬영 일정이 촉박했고, 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거절도 여러 번 했었단다.

"강이관 감독님이 다큐멘터리 몇 편을 주시면서 <범죄소년>이 미혼모의 아픔을 나타내는 건데, 그걸 보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깜짝 놀랐어요. 효승과 지구(서영주 분)처럼 그들이 세상에 버려진 채 살고 있더라고요. 성교육·가정교육이 부족하고 사회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아 불행한 삶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펑펑 울었어요. 다큐멘터리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범죄소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나는 지구의 입장에서 끌어낸 한국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성장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효승의 입장에서 끌어낸 미혼모 이야기다. 미혼모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의 영화 <주노>(시기와 소재 면에선 한국영화 <제니, 주노>가 앞선 작품)를 떠올릴 수 있다. 같은 소재지만 미혼모를 다루는 방식이 정반대인 작품들이다.

"<주노>를 보긴 봤어요. 그쪽은 가벼운 터치였죠. 하지만 <범죄소년>의 효승은 내던져진 아이잖아요. 자살시도나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고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아이에요. 그런 면에서 주노와는 다르죠. 완전 다르게 봤어요."

 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미소를 짓고 있다.

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미소를 짓고 있다. ⓒ 이정민



<범죄소년> 감독과 배우의 호흡 돋보인 작품

이정현은 본래 <범죄소년>이 많이 무겁고 신파적인 면이 강한 작품이었다고 운을 뗐다. 정부의 지원도 받았고, 다소 교조적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 해당 부분에선 감독이 배우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면서 현실에 맞게 방향을 조정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실제 효승의 캐릭터도 많이 무겁고 완전 신파였거든요. 근데 무작정 슬퍼하고 우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지구를 소년원에서 만날 때 대성통곡한다는 설정이었지만,   늙은 할머니도 아닌데 대성통곡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렇게 울 거면 자신이 버린 아들을 진작 찾으러 오지 않았을까요? 13년 만에 아들을 만나면 울기보단 당황할 거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받아들여 주셨어요."

어둡지만은 않은 효승이라는 캐릭터는 실상 자존심을 모두 버린 젊은 여성이었다. 삶을 비관하면서 울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보단 아들을 데려올 만큼 삶의 의지도 강한 여성이겠다는 게 이정현의 분석이었다. 울기보단 자존심을 버린 웃음을 보이는 게 강이관 감독과 의논 하에 나온 효승의 성격이었다.

 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미소를 짓고 있다.

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미소를 짓고 있다. ⓒ 이정민


이정현은 영화를 통해 스태프와 호흡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고,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또 다른 현실을 느껴서 의미가 강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범죄소년>을 봐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일정 금액 이상 수입이 나면 해당 금액이 사회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출연료를 받지 않기로 한 이정현은 영화 흥행에 따라 일정 금액을 받고 나머진 기부하기로 결정했단다. 기부금은 미혼모와 소년원 시설을 위해 쓰인다. 이정현은 "연말에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셔도 좋겠어요"라며 깜찍한 미소를 보였다.

자, 이정현의 본격적인 기지개가 시작됐다. <범죄소년> 이후엔 김한민 감독의 <명량>에 홍일점으로 등장한다. 향후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전한 이정현이다. 가늘어 보이는 외관 안에 에너지가 가득 차 있었다. 참, 내년 상반기에 새로운 싱글 음반도 발표한다니 여기에도 주목해야겠다.

이정현 범죄소년 서영주 강이관 미혼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