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영동>을 기피하는 태도를 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마니아로서 오랫동안 영활 보며 생긴 감각에 의해 <남영동>이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적인 픽션일 거라 판단했고, 결국 <남영동>을 보면 한국의 과거가 부끄럽게 여겨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영동>을 보고나니 영화 속 한국의 과거보다 부끄러운 건, 한국의 현재였다. 여전히 군사정권의 후예 세력이 과거 반성보다 자기 이득 추구에 매진하며, 이제 과거보다 새로워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민주화 세력이 역시 자기 이득 추구에 매진하는 가운데,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남영동>에 별점테러를 가하는 일부 대중들과 <남영동>이 좌파 영화라며 경계하는 일부 언론의 모습 말이다.

그들은 이미 세상이 변했음을 모르는 걸까? <남영동> 같은 영화가 수백 개의 스크린에서 개봉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은 변화한 것이다. 좋은 쪽으로, 더 자유롭게. 물론 <남영동> 속 모습처럼 여전히 구태를 보이는 자들이 있다. 아마도 <남영동>은 그런 자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남영동1985> 스틸.

<남영동1985> 스틸. ⓒ 아우라 픽쳐스


<남영동 1985> 좋은 상업 영화에 속하기도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26년>처럼 <남영동>도 영화 외적인 비판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잠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부터 한동안은 철저하게 영화 외적인 말은 배제하고, 작품으로서의 <남영동> 감상만 전해보겠다.

김종태(박원상 분)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종태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남영동> 플롯의 중심축이다. 결말에서 김종태가 이두한(이경영 분)을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남영동>의 스토리를 이끄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평화와 양심을 지키려는 인생이 <남영동> 플롯의 또 하나의 축이며, 여느 명작 영화가 그렇듯 그런 플롯을 완결시키기 위해 주인공은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렇다. <남영동>은 명작 영화다. 올해 본 개봉영화 중 가장 인간한계에 도전하게끔 했다. 김종태가 잡혀온 뒤 대공분실 직원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자백 공작을 당할 때, 김종태가 무참히 집단 구타당하는 것에서 출발해 고문 가해자들이 점점 단계를 높여가며 등장할 때 나는 <남영동>의 시나리오가 작심을 했음을 깨달았다.

보통 좋은 상업 영화는 절정으로 갈수록 관객의 감정을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게 만든다. <남영동>은 그런 점에서 좋은 상업 영화에 속한다. 김종태가 잡혀와 5일째까지 잠을 안 재우고 밥을 안 먹이는 고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나중에 이두한이 보여주는 점차 강해지는 고문 기법을 영상으로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더라도 충격을 받게 된다.

김종태를 가둬놓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대공분실 직원들에게 그런 끔찍한 고문은 그저 '일'에 불과하다. 고문에 의해 점점 삶이 피폐해져가는 김종태에 아랑곳없이 그들은 야구 중계를 듣고, 연애 얘기를 하고, 승진 얘기를 하며 즐거워한다. 일단 대공분실 직원들이 맡은  소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김종태처럼 나라를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말이다.

<남영동>은 대부분의 장면을 대공분실 세트에서 촬영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한번쯤 극전개가 지루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보다보면 김종태와 대공분실 직원들의 대사들을 통해 극의 지루함을 많이 없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일관된 대공분실의 조명과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촬영은 <남영동>의 진지한 스타일을 말해주고 있다.

 <남영동1985> 스틸.

<남영동1985> 스틸. ⓒ 아우라 픽쳐스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영화...일단 보고 비판하자

영화는 김종태가 갇힌 22일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주는데, 중간에 한번 플래시백으로 인서트 신이 삽입된다. 대공분실에 잡혀오게 될 때의 김종태와 김종태의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더해지는 것이다. 또한 김종태는 대공분실에서 몇 번 환상을 보게 되는데, 자기 자신을 만나기도 하고 아내를 만나기도 한다. 이런 환상 신들은 김종태가 절정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행동의 근거, 즉 복선으로 작용한다.

<남영동>은 반전도 있다. 고문 사건 후 20여년이 지나 김종태가 이두한을 재회했을 때 그런 반전이 관객으로 하여금 김종태의 과거 기억을 공감하게끔 돕는다.

고문 장면들은 참 끔찍하다. 고문이 목표하는 것은 김종태로 하여금 자신이 '빨갱이'임을 인정케 하고, 그 배후를 밀고하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까지의 과정 속에 아이러니 하고 기가 차는 스토리가 대공분실 직원들과 김종태 사이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누리는 모든 자유가 비록 불만스럽더라도 감사하게 여겨진다. <남영동>은 고문-빨갱이-군부독재 등 꼴도 보기 싫은 소재들로 채워져 가지만, 특이하게도 영화의 성격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다.

그건 <남영동>에서 김종태 역을 맡은 박원상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연기를 했다. 그의 카리스마로 인해 <남영동>은 단순한 선동영화나 겁주는 정치적 영화가 아닌, 최고의 '휴먼 드라마'가 되었다. 이 작품을 만든 제작진 모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남영동1985 정지영 박원상 이경영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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