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난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못생긴 흠집들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 흔적들은 다른 이가 돌보아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벗겨진 껍질 위를 재생시켜야 하는 것도 스스로 몫이다. 하지만 맘처럼 쉽지가 않다. 더욱더 얇아진 하얀 표면 위로 순결한 표피가 살짝 자신의 존재를 드리우지만 그만큼 두께는 얇아졌기에 겨울은 춥기만 하다. 이 겨울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의당 정해진 것처럼 되어 있음에도 지구에게는 그에게 불쑥 찾아온 것만 같은 겨울이 길고도 냉정하게만 보인다.

보라! 이 소년의 남다른 삶

 햇살 비추는 창밖을 응시하는 지구(서영주)

햇살 비추는 창밖을 응시하는 지구(서영주) ⓒ 영화사 남원


지구(서영주)가 바라보는 세상은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창밖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한 번도 그가 바라보는 창밖의 모습들을 그의 시선과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그윽한 햇살임에도 창 안에 놓여있는 지구가 그곳을 통과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혼자 남겨진 채 살아온 지구에게 햇살의 근원이 밖의 모습들은 지극히 지독한 현실일 뿐, 그를 위로하는 법이 없다.

그가 만나는 친구들도 지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혼과 무관심으로 얼룩진 그들에게 온전히 학교를 다니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반복적인 탈선과 범죄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문제아로 낙인 찍히게 만든다. 사회는 그 아이들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시궁창에서 빠져나오기도 힘겹다는 것을 당연하듯 말한다. 정작 누구도 그들의 속사정을 궁금해 하거나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 지구의 여자친구 새롬이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에게 모두 버림받은 새롬의 이야기를 지구는 묵묵히 듣고 있다. 마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새롬을 바라본다.

그보다 더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구는 아버지 어머니도 누군지 모른 채 병든 외할아버지를 간호해야 하는 처지지만 새롬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도 않는다. 담담히 오랜 시간동안 이겨왔으니까. 긴 여운을 남기는 이 첫 장면은 지구가 앞으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이겨내며 살아가야 할지를 새롬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새롬. 사실 그녀가 닮은 사람은 지구가 애시당초 포기했던 어머니임을 알게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시 만난 엄마, 하지만 불안한 삶이 이어진다.

다시 만난 엄마, 하지만 불안한 삶이 이어진다. ⓒ 영화사 남원


운이 좋았던 것일까?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갑작스럽게 엄마(이정현)가 나타난다. 지구는 처음 본 엄마에게 왜 한 번도 찾지 않았냐고 이야기하지만, 자신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명확한 이유를 듣기는 어렵다.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긴 시간을 방황했을 엄마는 아직도 사춘기 소녀처럼 배시시 웃지만, 지구를 향해 숨겨둔 애정을 퍼붓는다.

아는 동생 집에서 쫓겨난 모자는 가고 싶었던 바다는 고사하고 그들의 처지를 꼭 닮은 한강을 찾는다. 엄마는 꺼림낌 없이 어떻게 해서 임신하게 되었는지를 지구에게 말한다. 그리고 딱 한번 봤었던 남자가 휴대폰 속 지구의 사진과 너무나 닮았다고 말하면서 그 남자는 자식을 낳았는지조차 모를거라고 이야기한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아빠임을 알면서도 지구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속에는 원래부터 아빠라는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정말 아무일도 아니라는 표정이다.

그동안 지구에게 있었던 일들에 비하면 아마 그 사실은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하고 싶지만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게 태어난 소년. 지구의 표정이 반응을 하는 것은 다시 만난 친구가 전한 새롬의 이야기를 들은 후이다. 새롬과의 관계로 태어난 자신과 닮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그 아이기 이미 입양이 되었고 새롬 역시 집에서 나와 평범하지 않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지구는 다시 냉혹한 현실 앞에 조용히 자신의 발을 디뎌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과연 지구는 그 상처를 엄마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과연 지구는 그 상처를 엄마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엄마 옆에 누운 지구

엄마 옆에 누운 지구 ⓒ 영화사 남원


아니라고 믿는다. 책임감 없이 떠난 엄마와 아빠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구는 믿는다. 그래서 새롬 또한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따뜻하게 받아주려고 하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 그 상황들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다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기엔 그의 곁을 둘러싼 방해물들이 너무나도 많다.

다시 냉담한 현실의 굴레에 놓인 지구는 습관처럼 햇살이 비추는 창밖을 본다. 외로움과 얼룩진 상처들로 인해서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세상. 오히려 소년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하는 판사. 자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 엄마. 자신으로 인해 평생 굴곡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새롬. 그들이 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굉장한 모순처럼 느껴졌을 지구.

지구는 두 번 자신의 생각을 판사와 형사한테 이야기한다. 그가 하는 말을 똑같다.

"한번 만 봐 주시면 안돼요?"

하지만 그 누구도 지구를 위해서 봐 주는 사람은 없다. 할어버지를 위해서, 다른 한번은 엄마와 새롬을 위해서 애타게 간청했겄만 죄의 흔적은 배려가 없다. 하지만 그 같은 말을 하는 시간의 간격동안 지구의 표정이 변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처음 판사 앞에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던 그에게 형사 앞에서 같은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더욱더 애가 탄다. 책임감이라는 것을 알게된 10대 소년의 표정은 가혹한 현실과 맞부딪혀 시린 가슴을 더욱더 먹먹하게 만든다.

수만 가지의 감정의 결로 사랑을 이야기했던 <사과>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2번째 장편을 내놓은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의 지구는 <사과>의 현정과 닮아있다. 깊이 생각하고 말이 없이 세상을 응시하는 모습이 시종일관 현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 감정의 결을 잘 표현해 낸 서영주란 배우에게 더 눈길이 간다.

백지 같은 얼굴 속에서 수만 가지의 감정의 곁을 가지고 지구가 된 서영주에게서 또다른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강이관의 컴백만큼 반가운 일이었다. 지구, 그 소년의 남다른 삶은 순전히 그 서영주란 배우로 인해서 가능했고 난 그에게서 남다른 배우의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마치 딱 서영주가 태어날 무렵의 <꽃잎>에서의 이정현을 보았던 것처럼.

범죄소년 서영주 강이관 이정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 '물안에서' 이미 죽은 이의 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