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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 60주년 향군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해 이건개 무소속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0월 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 60주년 향군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해 이건개 무소속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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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20여일 남겨둔 가운데 새누리당의 보수세 결집이 가속화 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최근 자유선진당을 합당해 충청권 공략에 나선 데 이어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영입했다. 이 전 대표는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새누리당 입당과 동시에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박 후보가 이 전 대표를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이 전 대표가 이에 화답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의 입당으로 박 후보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충청권 표심을 굳히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차떼기당 원조'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무소속 대선후보로 나섰던 이건개(71) 변호사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표명하면서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이 후보는 지난 22일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대한민국 미래세력이 통합할 때가 됐다, 과거에 집착해서 과거로 흠집 내고 과거를 탓하는 사람은 과거 세력"이라면서 "특히 안보를 무시하는 세력이 어떻게 미래의 대한민국을 찾을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나마 박 후보가 정치인 중 안보를 강조하고 지킬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박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41년 평양 태생인 이 후보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 서울시경국장, 대전고검장을 거쳐 1996년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15대 국회에 진출했다. 대검 공안부장 시절인 1989년 소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수사 당시 공안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공안정국을 주도했으며, 대전고검장 시절 슬롯머신업계 대부 정덕진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현재 법무법인 '주원' 대표 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선대에서 시작된 인연... 이용문, 일찍 죽지 않았다면 현대사 달라졌 것

한편, 이 후보는 보수적 정치 성향은 물론 가족사(史)로도 박근혜 후보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선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후보의 부친 이용문 장군은 박 후보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배이자 직속상관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용문 장군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매우 따랐다. 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 시절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도 했는데 이 장군이 비행사고로 요절하면서 이 계획은 좌절됐다. 만약 이용문 장군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마저 나온다.

이용문(李龍文·1916∼1953) 장군은 평양 태생으로 평양고보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해 50기로 졸업했다. 그의 한 기수 위는 나중에 한국군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채병덕, 이종찬 장군이며, 박정희는 기수로는 7기 후배(57)였다. 육사 졸업 후 기병소위로 임관해 일본 도쿄 주둔 제1기병대를 거쳐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된 그는 일제 패망 후 베트남·중국을 거쳐 1947년 9월 귀국하였다. 해방 당시 이용문의 계급은 일본군 소좌(소령). 이듬해 11월 육사 7기 특기생으로 들어가 소령으로 임관한 그는 한 달 뒤 중령으로 승진해 초대 기갑단장이 되었다.

1949년 4월 대령으로 승진한 이용문은 그해 7월 30일 5사단장으로 나간 백선엽의 후임으로 제2대 육본 정보국장에 부임했다. 여기서 이용문은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숙군 재판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박정희는 정보국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용문은 불과 3개월간 정보국장 자리에 있었으나 그 짧은 기간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특히 박정희 쪽에서 이용문을 따랐다.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들은 기수는 빠르지만, 박정희가 교사 3년을 마치고 입대한 까닭에 나이는 대개 박정희보다 아래였다. 그런데 이용문은 박정희(1917년생)보다 나이도 한 살 많았고, 기수로도 7기 선배였다.

이용문은 큰 덩치에 호방한 기질, 화려한 군 경력 등이 박정희를 압도했다. 성격상으로 보자면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의 박정희와는 정반대였지만 박정희로서는 비로소 믿고 따를 만한 선배이자 형을 만난 셈이었다. 그런 박정희를 이용문도 좋아했다. 1951년 준장으로 승진해 육본 작전 교육국장이 된 이용문은 정보국에 있던 박정희를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발탁해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시국관(時局觀)도 비슷해 대화가 잘 통하였고, 관계도 더욱 돈독해져 3년 뒤 두 사람은 '부산정치파동' 소용돌이에서 모종의 모의를 하기에 이른다.

 육본 작전교육국 근무 시절 이용문(왼쪽) 국장과 박정희 차장
 육본 작전교육국 근무 시절 이용문(왼쪽) 국장과 박정희 차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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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승만은 피난지 부산에서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켜 정치적 파문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발생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때 이승만은 이종찬 당시 육참총장에게 병력 동원을 지시했다. 그러자 이종찬은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종찬을 두고 흔히 '참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항명사건' 때문이다. 이 일로 이종찬은 육참총장에서 해임되었는데, 이후 그의 존재는 오늘날 우리 군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그 무렵 박정희는 일본 육사 선배인 이종찬 장군을 찾아가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건의(혹은 종용)했다. 그러자 이종찬은 평소 자신의 주장대로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박정희에게 면박을 주고는 거절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얼마 뒤 이번에는 평소 가깝게 지내며 따르던 이용문을 찾아가서 다시 '거사'를 거론했다. 그런데 이용문은 이에 관심을 표명했다. 이용문은 6·25 때 서울을 탈출하지 못해 근 한 달을 숨어 지냈다. 이 일로 서울 수복 후에 조사를 받았고, 또 공을 세울 기회도 잃어 동료에 비해 진급도 늦었다.

한국전쟁 종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당시 이용문은 수도사단장을 거쳐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휘하는 남부지구경비사령관(딩시 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전북 남원에 있었다. 박정희는 당시 대령으로 광주 포병학교에 입교해 있었는데, 박정희는 구상 시인(당시 영남일보 주필)에게 연락해 퇴근하지 말고 좀 기다리라고 했다. 이용문 장군이 남원에서 대구로 올 예정이니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이용문이 정보국장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그날 이용문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37세로 사망했다.

그를 친형처럼 따르던 박정희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5·16 후 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가 맨 먼저 한 일은 이용문 장군 묘소 수유리 이장이었다. 당시로선 거금인 백만 원을 경비로 선뜻 마련해 주었으며, 묘소이장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맡기도 했다. 몇 년 뒤 육사에서 생도들에게 승마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마장(馬場) 개장 기념행사로 마술(馬術)대회를 열었다. 대회 명칭을 '이용문 장군배 쟁탈 승마대회'로 정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더니 직접 '李龍文 將軍盃(이용문 장군배)'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참고로 이용문은 기병(騎兵) 출신이었다.

박정희는 이용문 장군의 유족들도 정성껏 챙겼다. 더러 자신의 봉급을 털기도 하고 동료의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이용문 장군의 장남 이건개(健介)가 사법고시에 합격(1963년)해 검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박정희는 검사 임용 3년 뒤인 69년 이건개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비서관으로 근무시켰다. 2년 뒤인 71년 12월에는 파격적인 발탁인사를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박정희는 당시 만 30세인 이건개를 최연소 서울시경국장(당시 치안감, 현 서울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는 이건개에 대한 박정희의 특별한 배려였다.

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독대... '정치검사'로 불려

 이건개의 서울시경국장 임명 당시 기사(매경, 1971. 12.14). 기사 제목의 '33세'는 '30세'의 오기임.
 이건개의 서울시경국장 임명 당시 기사(매경, 1971. 12.14). 기사 제목의 '33세'는 '30세'의 오기임.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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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개는 73년 초까지 만 2년간 근무 후 치안국(현 경찰청)으로 자리를 옮겨 제1부국장을 지내다가 77년 서울지검 평검사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대검중수부 1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부장, 서울지검장, 대전고검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군·경찰은 물론 정·재계에도 엄청난 인맥을 갖고 있어 검사장으로 승진할 때는 각계 인사들로부터 법무부장관에게 "잘 봐 주라"는 전화가 수십 통이 걸려왔을 정도라고 한다. 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취임하기도 전에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가 독대하는 등 일찍부터 '정치검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이건개는 그로서는 '은인'인 육영수 여사와 박 전 대통령의 최후를 '확인'하는 묘한 운명에 처했다. 1974년 광복절 행사장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에 피격당해 숨을 거두자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서 현장에 나가 수사를 지휘했다. 그로부터 5년 뒤 '10·26사건'이 발생해 박 전 대통령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대검 연구관으로 있던 그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파견돼 현장수사에 참여하였고, 얼마 뒤 합동수사본부의 10·26사건 수사 발표문을 최종 손질하기도 했다. 박정희 일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셈이다.

96년 당시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15대 국회의원을 한 차례 지낸 그는 몇몇 기업체의 고문과 나라미래준비모임 대표, 국민실향안보당 대표 등 보수우익 단체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지난 9월 25일 "국가기강을 바로잡겠다"며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 그는 불과 두 달도 안 돼 출마를 접고 박근혜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이건개의 선친 이용문 장군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멘토였다면 박정희는 다시 이건개의 멘토였다. 그리고 이제 이건개는 다시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 나름으로는 대(代)를 이은 '보은'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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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