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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7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공포됐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조선왕조실록의 나라로 현대의 사초(史草)인 대통령기록을 보존하자는 취지였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1392∼1863년)간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이 파기나 훼손없이 이어진 것은, 후대의 왕이 이를 볼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기록물은 2008년 12월 국회 표결을 통해 쌀직불금관련자료가 공개됐고, 서해(NLL)북방한계선 논란속에 또 공개요구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기록물은 이같은 정치공방속에 공개돼도 되는 것일까. 이 법의 제정 취지와 제정과정, 공개주장과 반대의견에 대한 점검을 통해 이 문제를 짚어본다. [편집자말]
새누리당 이철우, 정문헌, 김기현, 신의진 의원이 12일 오전 국회 의안과에 '민주당 정부의 영토주권 포기 등 진사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철우, 정문헌, 김기현, 신의진 의원이 12일 오전 국회 의안과에 '민주당 정부의 영토주권 포기 등 진사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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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경 전 대통령기록관 관장은 29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현역 의원 가운데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지정기록물 등을) 제일 잘 아는 분일텐데, 뻔히 알면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을 요구하는 코미디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문춘추관법을 발의했을) 당시 그의 행보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2006년 대통령 기록관리비서관으로 일하며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다.

임 전 관장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탄핵사태가 해결된 직후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정을 모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청와대(대통령비서실, 기록관리비서관실)와 국가기록원,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의 기록관리혁신전문위원회가 공동으로 '대통령기록관리혁신전담팀(TF)'를 꾸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통령기록물은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존·관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관련 규정은 '대통령 관련 기록물의 효율적 관리와 전시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대통령기록관을 설치·운영할 수 있다'는 내용 정도였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을 철저히 보존·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무현 "두려움 없이 기록 남기도록 하자"


이 법에서 특히 중점을 둔 것이 바로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다. 임 전 관장은 "그동안 왜 대통령기록물 보존을 못 했는지 분석한 결과, 기록이 남을 경우 정치적으로 악용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며 "'두려움 없이 남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15년쯤 지나면 정치적 악용도 물러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기록관리혁신TF는 대통령지정기록물을 ▲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물 ▲ 국민경제 안정을 저해할 수 있는 기록물 ▲ 정무직 공무원 등 인사에 관한 기록물 ▲ 개인 사생활에 관한 기록물 ▲ 대통령과 대통령의 보좌기관, 자문기관 사이 등의 의사소통기록물로 공개가 부적절한 기록물 ▲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록물 등으로 정의했다. 여기에 '15년~30년'이란 비공개기간을 달았고, 이 기간이 끝나기 전에 공개·열람하려면 법원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2006년 7월 18일, 정부는 마침내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이보다 8개월 정도 앞서 비슷한 법안이 세상에 나왔다. 정문헌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2005년 11월 22일 발의한 '예문춘추관법'이었다. 정 의원은 "대통령 기록물은 공공재이자 국가의 자산이므로, 이젠 국가가 제대로 관리할 때가 됐다"며 '예문춘추관'이란 독립기구를 설립해 대통령기록물을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는 대통령지정기록물과 비슷한 '특정기록물'이란 개념이 있었다. 예문춘추관법은 이를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보호기간은 최대 50년이었다. 열람·공개는 ▲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의결하거나 ▲ 해당 대통령이 형사상 소추를 받아 그 증거로 필요한 경우 ▲ 기록물의 효율적인 관리·보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 등에만 가능했다. 정 의원은 이 법을 발의하며 낸 보도자료에서 '50년'이란 기간을 둔 이유를 "대통령기록물이 전임 대통령의 '정치보복' 또는 '부당한 정치적 공세'의 증거로 악용되지 않도록"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대통령비서실 기록연구사로 대통령기록물관리혁신TF에 참여했던 조영삼 한신대학교 초빙교수는 "대통령기록 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법안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노무현 대통령 지지도가 많이 하락했던 시기라 정치적 부담이 있었다"며 "그런 때에 야당 소속인 정 의원이 법안을 발의해 호재라고 생각하고 환영했다"고 말했다.

국회 소관 상임위인 행정자치위원회(현 행정안전위원회)로 넘어온 두 법안은 그 취지와 내용이 비슷한 점을 감안해 하나의 대안으로 합쳐졌다. 여기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의 정의는 정부안과 비슷했고, 비공개기간은 최대 30년이었다. 열람요건은 영장이 발부된 경우(정부안)에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 의결하거나 업무상의 필요가 있을 경우로 정리됐다.

당초 정부는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정치공세에 악용될 것을 우려해 정부안에 국회의 열람 요건을 넣지 않았다. 조영삼 교수는 "그래도 '재적의원 3분의 2(찬성해야 열람가능)'라면 정치적 공방으로 (대통령지정기록물에) 접근하기 쉽지 않을 테고, 충분히 제도를 도입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임상경 전 관장은 "(이 조항이 만들어지면) 과거 새누리당 행태를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걱정을 많이 했다"며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그거라도 큰 성과다, 기록을 온전하게 넘길 수 있는 최소한의 기제는 마련됐다'고 받아들이셨다"고 회고했다.

'정문헌안'은 최대 50년 비공개도

이 대안은 2007년 2월 27일 법제사법위원회(아래 법사위) 제2법안심사소위원회에 올려졌다.

이주영 소위원장 : 그런데 재적의원 3분의 2로 그렇게 강화를…그것을 누가 이렇게 한 거예요? 원래 정부안 원안에 그렇게 들어 있었지요?

최양식 행정자치부 제1차관 : 그것은 없었습니다.

임중호 전문위원 : 정문헌 의원님이 발의하신 예문춘추관법에 있습니다. 거기에….

이날 소위 회의록의 일부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재적 2/3'기준을 반대했다. 김동철·이상경 의원은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을, 이상민 의원은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을 주장했다. 선병렬 의원만 "재적의원 3분의 2로 해 통치권자가 기록물 생산과 보존에 주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자고 한 쪽은 오히려 한나라당이었다. 박세환 의원은 "국회 간섭을 되도록 배제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재적의원 3분의 2로 한 규정부분은 해당 상임위원회의 결단으로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영 소위원장도 "과반수 정당이 이것(대통령지정기록물)을 자꾸 보자고 하면 대통령기록물의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한 그 취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열람요건 완화에 반대 뜻을 밝혔다.

특히 나경원 의원은 "이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의 입법취지에 비춰서도,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요건) 국회 재적의원 2분의 1(찬성)이라면 한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면 쉽게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입법취지에 반해서 공개될 수 있기 때문에 재적의원 3분의 2는 유지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대통령기록물을 보호하자는 거지 대통령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지 않냐"고도 말했다.

최종적으로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요건은 ▲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의결했거나 ▲ 관할 고등법원장이 중요한 증거로 판단해 발부한 영장이 제시된 경우 또는 ▲ 대통령기록관 직원이 업무수행상 필요에 따라 대통령기록관장의 사전승인을 받았을 때로 정리됐다. 법사위는 2007년 3월 30일 전체회의에서 이 최종안을 별다른 이의 없이 처리했다. 그해 4월 2일 본회의 투표 결과 출석 241명 가운데 반대 1명, 기권 5명이었을 정도로 찬성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여야 압도적으로 찬성했던 법, 이제와 뿌리째 흔들어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0일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을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무력화를 약속했다는 등 의혹에 대해 민주통합당에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0일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을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무력화를 약속했다는 등 의혹에 대해 민주통합당에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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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10월 22일 이철우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현안브리핑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합의해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반문서도 대통령이 기록물로 정하면 비밀보다도 더 볼 수 없다는 모순이 있다"며 "새누리당은 이 모순을 고치기 위한 법률 개정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한구 원내대표도 다음날인 23일 새누리당 국정감사 종반 대책회의에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문제가 있다"며 "대통령이 자신이 몇십 년 1급 비밀로 하라고 하면 그대로 가도록 되는 것은 아무래도 고쳐야 할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는 정문헌 의원의 예문춘추관법을 공동발의한 동료 의원 72명 가운데 하나였다. 최종안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조영삼 교수는 최근 대통령지정기록물을 둘러싼 상황은 "역사기록으로서 대통령기록을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볼 때 아쉬움을 넘어 분통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또 "기록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은 전통적인 것을 지키자는 관점에서 보수적 가치"라며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 '전통을 지키고 보장하는 도구'인 기록을 두고 정치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상경 전 관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갖춘 기록관리 행정은 기초 중의 기초"라며 "그걸 만드느라 고민하고, 제안하고, 뚝심으로 안팎의 반론을 다 설득해가며 '기록을 만들고 온전하게 남기자, 가치판단은 후세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은 "참여정부 때보다 더 후퇴하고 있다"며 "'기록을 남기면 다친다, 패가망신한다'는 정서를 주고 있다, 역사를 관리·입증하는 주요하고 기본적인 영역의 싹을 싹둑 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태그:#대통령기록물, #노무현, #정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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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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