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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7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공포됐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조선왕조실록의 나라로 현대의 사초(史草)인 대통령기록을 보존하자는 취지였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1392∼1863년)간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이 파기나 훼손없이 이어진 것은, 후대의 왕이 이를 볼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기록물은 2008년 12월 국회 표결을 통해 쌀직불금관련자료가 공개됐고, 서해(NLL)북방한계선 논란속에 또 공개요구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기록물은 이같은 정치공방속에 공개돼도 되는 것일까. 이 법의 제정 취지와 제정과정, 공개주장과 반대의견에 대한 점검을 통해 이 문제를 짚어본다. [편집자말]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0일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을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무력화를 약속했다는 등 의혹에 대해 민주통합당에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0일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을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무력화를 약속했다는 등 의혹에 대해 민주통합당에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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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서해 북방한계선)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에게 했다는 발언이다. 이것이 실제 있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조금도 틀릴 것이 없는 말이다.

서해 바다가 미국 영해가 아닌 이상, 미국이 임의로 선을 긋고 남북 양측에게 준수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월권이므로, 미국의 월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또 대한민국 헌법에서 미국의 월권을 사후적으로 추인하지도 않았으므로, 위의 발언은 헌법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다.

위의 발언이 정말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에 기록됐다면, 우리는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문제 삼는 쪽의 의도는 순수하지 않다. 이들의 의도는 (기록물이 비공개라는 점을 악용해) 죽은 노무현을 부관참시하고 개혁세력의 정치적 활로를 막는 데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노무현 부관참시 조짐, 연산군이 떠오른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개혁세력을 죽이려 한 폭군이 있었다. 조선 제10대 주상인 연산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연산군은 죽은 사람의 발언이나 글을 문제 삼아 망자를 부관참시한 것은 물론이고 이를 빌미로 개혁세력을 탄압했다. 이래서 나타난 공안정국이 바로 사화(士禍)였다.

선비들의 환난을 의미하는 사화 중에서 유명한 것들은 바로 연산군의 작품이었다. 이런 사화 가운데서 최초의 것은 1498년 무오사화였다.

연산군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소재.
 연산군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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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년의 사화가 발생하기 40년 전인 세조 3년 10월. 양력으로 하면 1458년 10월 18일에서 11월 16일 사이였다. 요즘 이맘때였던 셈이다. 음력 10월의 어느 날 아침, 스물여덟 살 된 김종직이란 선비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종직은 5년 전인 스물세 살에 과거시험 소과(제1단계)인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제2단계 시험인 대과를 준비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이미 10대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수재였다.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따르면, 김종직이 16세 때 제출한 진사시험 답안지는 하도 탁월해서 세종 임금에게까지 보고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답안이 불합격 처리 됐습니다"라며 보고된 것이었다. 비록 시험에서는 낙방했지만, 이때부터 김종직은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재능은 훗날 그가 새로운 정치세력을 이끄는 밑바탕이 됐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김종직은 간밤에 꾼 꿈을 되뇌었다. 연산군 4년 7월 17일자(1498년 8월 4일)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이 꿈은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회왕)가 김종직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었다. 꿈속에서 의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인데, 서초 패왕에게 시해되어 빈강(호남성 소재)에 빠뜨려졌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던 과도기에, 의제는 초나라 왕의 타이틀을 갖고 반(反)진나라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때 신하의 입장에 있었던 항우는 의제를 죽이고 서초패왕을 자처했다. 최근에 대만 배우 초은준(쟈오언쥔)이 주연한 중국 드라마 <대장군 한신>에서는 유약한 의제가 항우에게 시달리다가 항우의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꿈에서 본 의제의 사연을 소재로 김종직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의제문>이란 글을 작성했다. 제목처럼 '의제를 조문하는 문장'이었다. 위의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김종직은 의제의 죽음을 한스러워하면서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탄식했다.

신하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에게 동정심을 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신하를 욕하고 임금을 동정한다. 개인적으로 항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매우 당연한 글이었다.

<조의제문> 원문을 담고 있는 연산군 4년 7월 17일자 <연산군일기>.
 <조의제문> 원문을 담고 있는 연산군 4년 7월 17일자 <연산군일기>.
ⓒ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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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어떻게 사화로 비화됐나

그런데, 이 당연한 글은 40년 후에 연산군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됐다. 꿈을 꾼 지 얼마 뒤 김종직은 대과에 급제했고, 구세력에 맞서 개혁을 추구하는 사림파의 리더로 성장했다. 그가 개혁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가 죽은 지 6년 만에 <조의제문>은 정국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이 주로 활약한 성종시대에 신진세력인 사림파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춘추관 같은 사법 혹은 학술 기관을 장악했다. 반면에, 구세력인 훈구파는 이·호·예·병·형·공조 같은 일반 행정기관을 장악했다. 실권은 여전히 훈구파의 수중에 있었지만, 사림파 역시 사헌부 등을 통해 구세력을 공식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김종직이 1492년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뒤인 1495년에 성종 임금이 죽었고, 아들 연산군이 새로이 주상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대부분의 논문이나 백과사전에서는 성종이 1494년에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날짜는 성종 25년 12월 24일 즉 1495년 1월 20일이다. 음력인 성종 25년은, 양력으로 하면 1494년 2월 6일부터 1495년 1월 25일까지다. 성종 25년이 '주로' 1494년에 걸린다는 점만 생각하고 그것이 1495년에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왕이 된 연산군은 관례에 따라 아버지 시대의 역사서인 <성종실록>의 편찬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여당인 훈구파에게 좋은 먹잇감이 떠올랐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평소에 축적한 자료를 사초(史草)라고 부른다. 이것을 바탕으로 실록이 편찬되었다. <성종실록> 편찬을 맡은 훈구파는 사초 수집과정에서 <조의제문>이 적힌 사초를 발견했다. 그것은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였다.

<조의제문>은 문구만 놓고 보면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글을 불온문서로 몰아세우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훈구파는 '초나라 의제는 노산군(단종 임금)을 상징하고, 그를 추모하는 것은 세조(수양대군)를 비난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1998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의 한 장면.
 1998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의 한 장면.

연산군은 세조의 쿠데타가 아니었으면 왕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조의 증손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연산군의 자격을 부정하는 대역죄나 마찬가지였다. 훈구파의 의도는 연산군을 자극해서 김종직을 대역죄로 모는 데 있었다.

연산군 정권은 김종직에게 대역죄를 적용하고 그의 무덤을 파냈다. 이른바 부관참시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훈구파의 진짜 의도는 김종직 한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진짜 표적은 다른 데 있었다.

연산군 정권은 억지 같은 논리를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사림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수많은 개혁파 선비들이 이로 인해 화를 입고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조의제문>을 빌미로 개혁파의 위세를 잠재우고 기득권을 연장하려 했다. 이것이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였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사림파를 탄압하던 연산군은 창덕궁에 있다가 쿠데타를 당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사림파를 탄압하던 연산군은 창덕궁에 있다가 쿠데타를 당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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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탄압에 맛들인 연산군, 잘못된 과거 따라하는 정치권

한 번 재미를 들인 연산군은 6년 뒤 또 다른 사화인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벌인 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사화'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사림파에 대한 정치탄압이었다. 사화의 특징은 억지 같은 논리를 내세워 신진세력을 탄압했다는 데 있다.

연산군 정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화를 일으키곤 했지만, 가혹하고 터무니없는 정치탄압은 오히려 연산군에 대한 지지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연산군의 위상이 흔들리자 기득권층 내의 일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축출했다(중종반정). 개혁파를 탄압하기 위해 시작한 무모한 정치탄압이 결국 연산군 정권의 파멸을 초래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은 표면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연산군 정권은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몰아 사림파에 대한 정치탄압을 단행했다.

노무현 대화록 사건의 경우에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진짜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했다고 하는 NLL 발언도 전혀 틀릴 것이 없는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미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NLL에 의해 침해될 수 없고,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의 권한 역시 그것에 의해 침해될 수 없다. 따라서 노무현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헌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죽은 노무현의 발언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비단 노무현만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현대판 사림파의 정치적 진로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올해는 임진년이다. 현대판 훈구파들은 올해가 임진년이라서 임진사화라도 준비하려는 걸까. 이런 터무니없는 정치탄압의 말로가 어떨 것인가는 연산군의 종말에서 잘 나타났다. 임진년에는 '왜군'만 준동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현대판 훈구파들도 임진년의 문제아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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