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나레이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단편 중 '하나레이 만'에는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 등장한다. 그녀는 하와이 하나레이 만에서 서핑을 타다가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죽은 아들의 기일마다 그곳을 찾는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이 여인은 한때 '엄마'였던 자신을 추억하고 있다. 하레라이 만을 거닐다 어딘가 좀 모자른 얼뜨기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들이 얼마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이기도 한다. 만약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였다면 쳐다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청년들은 주인공에게 언젠가 하나레이 만에서 다리 잃은 유령을 봤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유령을 봤다는 장소를 몇 번이나 배회하며 아들의 유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늦게 호텔로 돌아간 여자는 갑자기 침대에 쓰러져 울기 시작한다. '왜 내 눈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거야? 내게 그럴 자격이 없는거니?' 소설 내내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는 그 지점에서 무너진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였다면 쳐다 보지도 않았을 그 아이 때문에.

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법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 BBC Films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아들과 엄마의 사랑이야기이다. 영화에는 <하나레이 만>에서 처럼 자유롭고 세련되지만 사랑을 주는 것이 서투른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뜻밖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았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직업은 여행 수필가이다).

자신은 엄마가 될 준비가 안됐을 뿐더러 자신의 원래 삶을 포기하기도 힘들었다. 아이는 그 순간 그녀 삶의 가장 무거운 존재가 된다. 감독은 여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 운명 중에 누구나 생각했을 법한 두려움.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내가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한다면? 그 아이가 결국 나쁜 아이가 된다면? 영화의 정서를 통과하고 있는 건 이런 '엄마'로서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영화는 비극이 지나간 후 남겨진 '엄마'에서 부터 시작한다. 집은 누군가 장난을 친듯 붉은 페인트로 물들여져 있다. 시작부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물음표를 던질만 하다. 그녀는 이유없이 욕을 먹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런 괴롭힘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행동을 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감독의 연출과 조화로운 배우들의 열연이다. 영화의 뒷부분에 갈수록 남편과 딸의 모습은 화면에서 점점 감정을 잃어가고 아들과의 관계나 아들과의 갈등이 부각되는 전계가 펼쳐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혹은 편집에 따라) 주인공들의 모습을 조금씩 디테일하게 변화를 준 감독과 그것을 연기한 연기자들 모두 굉장한 영화였다. 상징적인 화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깔끔한 미술 작품 속에 있는 듯한 주인공의 배치도 감각적이다. 이야기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은 감독의 역량이 굉장하다.

프로이드적 인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완벽함이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들의 역활에는 총 3명의 아역 배우가 시간 순서대로 연기를 했는데 '오멘'이나 '엑소시스트'에서 처럼 어딘가 신들린 아이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대사를 한다. 아이를 14년째 키우는 엄마는 아직도 '엄마'가 아닌 것 같다. 그정도 시간이면 서로에게 익숙(극중 아이의 대사처럼)해 졌을 텐데도.

그리고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프로이드적 이야기가 아닌가? 프로이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평생동안 컴플렉스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들로 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어릴적 자식이 잘못하면 매를 때렸다. 그래도 우리는 사이코패스로 자라지 않았다!) 이러한 완벽함들이 역설적으로 영화 속의 두 사람을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게 했다. 상징과 은유는 문학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이지만 영화속에선 언제나 어색하다.

* 스포일러

영화의 편집은 처음부터 시간을 오고가며 산만하다. 어떤 일들이 오갔는지 다만 짐작할 뿐이다. 아마도 그녀는 법정에서 아이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도 사랑하는 딸도 인생도 행복도 자유도 그 아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뺐어간 '남자'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였다면 그녀는 진정한 비극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매주 소년원에 찾아가 그의 증오를 듣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믿으며 돈이 없어 전전 긍긍하지만 언젠가 석방될 아들을 위해 아들의 방을 꾸미는 그녀의 모습은 줄곧 그녀가 거부해 왔던 '엄마'의 모습이였다. 그녀가 끝까지 '여자'로 남았다면 비극이 되었을 이 이야기가 희망적이진 않지만 절망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로 탈바꿈 하는 순간이다. 여자는 약했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영화 케빈에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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