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이 사 1
봄만 되면 이사를 한다/ 이사 들기만 하면 당장/ 내 집이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희망을 보따리 보따리 싸서 꾸린다/ 팍팍한 세상살이/ 걸리적거리고 무겁기만 할 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인/ 그럼에도 매번 버리지 못 하는 손때 전 책들/ 아이가 고사리 손으로/ 그린 사군자 액자 몇 점/ 우리 가족만의 비밀스런 일상이 구석구석 내밴/ 남루한 세간이 부끄러운 듯/ 길바닥에 내다 널린다/ 다 큰 사내 앞에서/ 처음으로/ 맨몸을 드러내는 처녀같이/ 수줍어하는 세간을 부리면서/ 판교신도시, 아파트 미분양 속출 같은/ 가재도구에 둘러진 신문기사를 무심히 본다/ 넓다면 넓은 땅 덩어리/ 내 것으로 등기된 집 한 칸이 없어서/ 고사리 손 아이가/ 지 엄마 보다 커버린 지금까지/ 봄만 되면 이사를 한다/ 희망처럼 이사를 한다.

이사 2
아귀다툼 하는 생존에/ 충실히 끼어들지 못한 댓가/ 집이 나올 수 없는/ 책과, 음악과, 그림에 받친/ 죽은 시간의 흔적들.../ 천정부지 오른 아파트 값에/ 언감생심 내 집은 고사하고/ 전세금조차 감당 못해/ 몇 달을 발품 팔고 팔아/ 밀려 난 도시외곽/ 산복도로 하나 더 건넜을 뿐인데/ 교통 불편하고/ 등산하듯 하는 계단 길 감수하고/ 이사 든 주택 3층/ "공기가 맑아!  전망이 좋잖아"/ 아무리 스스로를 위로해도/ 아직 한 겨울도 아니건만/ 작은 체구마저 어깨를 펴지 못하는 이 추위/ 웅크려 자고/ 해 떠 새날 준비하는 하루/ 가만, / 지지, 직찍 배배,,,,/ 아침을 깨우는/ 무명의 새소리에/ 어제의 고달픔이 확 달아나는/이 대책 없는 어설픈 낭만의 정체/ 고달픈 중년이 피식 웃음 날린다.

두 편의 자작시가 나오게 된 배경. 남 보기에 안정적이고 반듯한 직장을 가지고도 내 집을 갖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가치관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중 '주(住)'로 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별 불편없이 지내면 된다는 주거의 개념에 충실한 결과이고, 같은 세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달리 요즘 신세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결과였다.

대다수 내 나이 세대는 결혼 이후 몇 번의 전세살이를 거쳐 적정 시기에 대출을 해서라도 자신의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물론 월급의 많은 부분이 대출금 갚는데 들어가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고 아낀 결과이다. 심한 경우 직장에서 회식 한번 하는데 드는 회비가 부담스러워 모임 참석을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현재에 충실하여 능력을 키우는 일에 비용을 아끼지 않고, 감성도 돌보면서 살고 싶었다. 시간 여유만 나면 여행을 하고, 문학관, 미술관, 박물관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건 친정아버지의 영향이었던 듯 하다. 친정아버지 역시 박봉인 공무원이셨다. 6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힘든 삶을 사시면서도 학구열이 높았다. 물질보다 정신영역을 추구하신 분이라 60~70년대를 사시면서 이미 문화, 예술분야에 취미를 가지고 계셨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없이 달랑 월급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직접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곤 붓글씨 쓰기나 '주말의 명화' 같이 TV로 상영되는 영화 시청 정도였지만 말이다.

나 역시 아버지의 학구열을 이어 받았는지 공부하는 비용과 시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공부를 해서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겠다가 아니라 책 읽고, 공부하는 재주 외에 특별히 가치를 두는 곳이 없었고 직업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공부를 하다 보면 궁금한 것이 많아지고 학문이란 것이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자꾸 확산되어 나가다 보니 그런 결과를 가져왔나보다. 문학에서 시작해서 역사, 심리학, 상담을 공부 하면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에까지 취미와 관심이 많았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매달 기본 생활은 되니 수입 안에서 검소하게 살다보면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결혼도 고모 셋에 하나 아들인 남편을 만나 시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는데 결혼 할 당시 소도시지만 윗채 아래채에 잔디밭이 있던 주택이었다. 시어머님이 살림에 아이들까지 맡아 길러 주시니 아무 불편이나 부족 없이 7년을 살았고, 자영업을 하던 남편이 중소도시로 나오면서 분가를 하고 세를 얻어 살게 되었다.

딸 아이 다섯 살 올라갈 즈음이었는데 집에서 큰 길 건너지 않고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 엄마 직장이 어딘지 눈에 보여서 엄마랑 같이 있지 않더라도 마음 푸근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세를 얻었다. 또 어릴 적 시골서 살아서 그런지 아파트보다는 주인과 따로 사는 독립된 주택을 얻어 다녔다. 아이가 이웃집 아이와 아기자기 소꿉놀이도 살고, 급하면 친구 엄마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를 애지중지 키우다가 죽어서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 하나 만들어 묻어 줄 수 있는 화단이 있는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 키우면서도 특별히 주인집 눈치를 본다든지 하는 일 없이 살아서 내 집에 대한 애착이나 필요를 덜 느꼈던 모양이다. 또 사실 한낮에는 식구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없고 맨날 집이 집을 보고 있어서 "내 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약했다. 다른 사람들이 부동산이나 재테크 수단으로 재산을 형성하기 위해 "집"에 열을 올리며 몰두할 때도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IMF를 넘긴 2000년대 근무연한이 다 되어 다시 소도시로 들어갔다 나오니 시골 전세금 빼서 더 큰 도시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아예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금액을 좀 더 보태고 일부 달세를 주면서 당시 이미 2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에 세를 얻게 되었다. 명품 이름을 지닌 새 아파트들이 한창 분양되던 시기여서 새 아파트로 갈아타려던 추세이니 오래된 아파트는 매매만 있지 전세 자체가 아예 없어서 오래된 아파트라도 감지덕지 선택 할 수밖에 없던 입장이었다. 딸이 중학생 입학하고, 아들이 초등학생이라 학교 가깝고, 학원 다니기 좋고 교통편하고 시장 가까운 등 입지조건을 위주로 급하게 구해진 집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가치가 "돈 에만" 쏠려 있는 집 주인을 만났다. 전기도 100V였고, 나중에 보니 벽지도 갈지 않고 페인트를 칠해 더께가 두꺼워 떨어져 나왔다. 20년이 넘은 출입문이 갑작스럽게 고장이 나서 연락 할 사이 없이 급하게 갈았는데 달세에서 감하고 주었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는 동안 웬만하게 비용 드는 것은 그냥 갈아 버렸다. 수도가 새서 꼭지를 사 단다든지 싱크대 지저분한 배수구 그물막 등등…. 출입문을 갈러 온 사람이나 보일러가 고장 나서 고치러 온 사람들이 참으로 신기해 할 정도였다.

오래된 아파트라도 대다수 자가인 사람들은 내부 수리를 다해서 겉보기에 비해 내부는 아늑하고 살 만하게 해 놓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서 유일하게 건축 당시 출입문 잠금쇄라든지, 마루 바닥, 새시, 보일러 등이 다 골동품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은 사실 하나가 '아! 저렇게 욕을 먹을 정도로 지독해야 돈을 모으는 구나! 집을 여러 채 가진 집 주인이 되어 갑의 입장에서 큰 소리 치면서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일 년에 결근 한번 안 할 정도로 충실한 직장 생활이어도 아이들 교육시키고 부모님 생활비, 집안 대소사 인사 챙기면서 사람 노릇 하고 살려면 빠듯해서 일 년에 500-1000만원 저축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젊은 주부들이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라도 아파트를 분양 받아 넘겨서 프리미엄 5000만원 -1억씩 차액이 생긴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어도 그 흔한 모델 하우스 한번 구경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서 할 말은 없다. 마음먹고 뜻하는 일이 있으면 일단 관심을 집중해야 하고, 의지를 지니고 노력을 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집"에 대해 아예 생각 자체를 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 직장생활에 아이들 키우면서 대학원 공부 하느라  "이사를 한번 해야지 " 하면서도 묵은 살림을 정리 할 시간이 없어 그냥 눌러 산 게 거진 10년이었다. 나이 50이 넘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창 새로 지어진 명품 아파트에 입주한 직장 동료들 집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청약을 위해 이불을 두르고 밤을 새워 가면서 줄 서 있던 모습이 뉴스를 타기도 했던 분양열기 높던 집들.

부러움이 확 밀려들었다. 일상의 삶이 어느 외국 풍광 좋은 곳 여름 휴가지였고 어쩌다 마음먹고 가는 바다가 보이는 찻집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잠이 드는 사람들의 풍요로움. 누구보다 보람차게 살았지만 너무 한쪽으로만 외곬이어서 또 다른 삶의 보람이고 재미일 수도 있는 다른 부분은 너무 무시하고 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도 더 좋은 여건이나 환경을 만들어 줬어야 했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러나 이미 가지 못한 길이고, 그 사이 남들이 하지 못한 풍부한 지식, 교양, 인생살이에 대한 바람직한 지혜들이 생겼기에 후회는 없다. 집 문제를 제외 하곤 내 자신, 자녀들이 '본인 인간자체'로서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대한민국의 주거에 대한 개념은 왜곡되어 있었고 다소 사회병리적이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 집을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 4천 채(물론 어느정도 규모인지는 모르지만)라거나. 재벌들의 불법 증여로 인해 초등학생이나 갓 태어나는 아이가 20-30억의 집 소유권자라거나 하는 등의 비 상식적인 일들.

내 집 소유에 대한 집착이나 집을 이용한 재산축적에 열을 올린 결과 그 막차에 승차했던 사람들이 대출금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는 하우스 푸어 얘기. 평생 마련한 집 말고는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은퇴한 노년의 생활 등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우울한 얘기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또한 정부정책을 위시하여 금융, 토지주택공사나 건설업, 토건족 들인들 다수 국민의 주거 문제 해결보다 땅을 매개로 부를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여러 정황들.

나 역시 그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인데 문제는 여전히 우리 집은 주거비가 많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서울 부산서 공부하는 동안 나가는 원룸비 달세, 직장이동으로 인한 본인의 달세, 주거에 관한 비용이 참으로 클수록 모을 수 있는 돈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제 내 집에 대한 마지막 희망은 현직에서 물러나면 마당이 넓은, 시골 비어 있는 조그만 집을 사서 손질을 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때면 이 지구상에서 내 이름으로 등기 된 내 집, 내 땅 한 칸 소유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 지구상에 잠깐 머물다 가는 동안 잠시 빌려 사용하고 있을 뿐 인 것, 매장해도 기껏 0.몇 평(체격이 왜소하다), 그나마 화장해서 뿌리거나 수목장 하면 이미 차지하고 있는 나무 한 그루 땅이면 되는 것을.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



태그:#내집, #내땅, #등기, #소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