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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스무 살이 되기도 전부터 6~7개월 단위로 방을 구하러 다녀야만 했을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 청춘의 시기는 참 아슬아슬했다. 옆에서 속삭이는 대로만 했다면 나는 아마 최소한 다섯 번은 살인자가 됐을 것이고, 특수강도 꼬리표를 열 번 이상 달았을 것이며, 또 무엇무엇 해서 지금쯤 이력서를 쓴다면 아마도 전과 기록으로 시작해서 전과 기록으로 끝내야 할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다. 전혀 몰랐다. 딱히 아프지도 않았고, 가난하지만 가난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셋방살이의 비애? 그런 것도 없었다. 집을 두 채 세 채씩 가지고 방을 열 개 스무 개씩 가지고 월세를 놓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게끔 돼 있다고만 여겼을 뿐,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 아줌마의 그 얼굴, 그 눈빛, 그리고 웃음소리... 마녀 같지는 않았다. 악독해 보이지도 않았다. 돈을 엄청 밝히는 까닭에 비명횡사를 당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전당포 아줌마 같은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첫인상은 큰형수 같고, 고모 같고, 이모 같기도 했다.

'눈물의 미아리고개'로 널리 알려진 고개마루에 검정고시로 유명한 수도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미성년이었다. 열두 살에 무단으로 가출해 5~6년 정도 갈팡질팡 헤매고 다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룸살롱 웨이터 보조로 들어갔다. 룸살롱은 밤에만 일하니까, 낮에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제법 근사한 청운의 꿈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룸살롱에 즐비한 의자 아무 데서나 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실내에 만화책이 너무 많이 돌아다녔다. 여자든 남자든 종업원들은 눈만 뜨면 해가 질 때까지 만화책 이야기를 했다. 만화책이라면 나도 엄청 많이 좋아했지만, 그때는 이미 무협지마저도 시시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어쩌면 검정고시라는 세속적인(?) 목표를 세워버린 탓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만화책이 없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칙을 따라야만 했던 '하꼬방' 생활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한 장면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한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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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티스 누나들이 몰려 사는 동네는 길음시장 뒷편. 누나들의 도움으로 그 동네에 방 한 칸을 얻어 이사했다. 밖에서 문을 열면 담요 반 장 넓이의 부엌이고, 부엌에서 또 문을 열면 담요 한 장 반 넓이 정도의 방이었다. 손바닥만한 창문을 열면 이웃집 담장과 정면으로 딱 보이는 바람에 무슨 요새에라도 감금된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방이 본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있었다. 마치 호위 병사들의 숙소처럼. 열 개였던가, 열한 개였던가... 하여튼 열 개 남짓 늘어서 있었다.

집 주인은 50대 초반의 통통한, 후독한 인상을 주는 아줌마로 남편 없이 아들과 단 둘이 살며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는 삼수생 조카 하나를 '군식구'로 데리고 있었다. 본체는 2층 목조건물이었고, 이런저런 부속실을 빼고도 방이 넷인데 세 사람이 그것을 다 쓰고 있었다. 내가 이사간 다음 날 후덕한 인상의 주인 아줌마가 나를 그 본체로 초대했다. 근사하게 무슨 다과 같은 것을 대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이 놀아달라는 것이었다.

"어이 총각, 우리 집에 살려면 우리의 법칙을 따라야 해."

법칙이란 게 뭐 대단하겠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대단한 법칙이었다. 그 집에 세를 들어 사는 사람은 누가 됐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됐든 낮동안 집에 있는 동안에는 본체 거실로 들어가 1시간 정도 아줌마와 같이 놀아줘야 했다. 얼마가 됐든 돈을 잃어주는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불편한, 싫든 좋든 함께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 문화가 이미 형성돼 있었다.

호스티스 누나들은 그 문화에 아주 익숙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주도하고 있기도 했다. 간밤에 손님과 '2차'를 나가지 않고 퇴근한 누나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으레 지갑 하나만 달랑 챙겨들고 본체 거실로 모여들었다. 그토록 화장을 잘하는 여자들이 아무 화장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거나 되는 대로 나부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본체로 들어서곤 했다. 내 기억 속에 그 모습은 지금까지 내 기억에 꽤나 인상적인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인아줌마는 호스티스 누나들을 상대로 일수놀이를 하고 있었다. 호스티스 누나들은 대체로 배포가 컸다. 500여 미터쯤 떨어진 목욕탕을 가더라도 택시를 불렀고,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더라도 동전이 아닌 지폐를 꺼냈다. 고향의 동생이나 어머니가 돈 십만 원만 보내달라고 하면 50만 원 정도를 보내는 식이었다. 가진 돈이 많아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녀들은 가진 돈이 많기는커녕 항상 돈에 쪼들렸다.

주인아줌마는 그녀들의 개인 금고인 셈이었다. 언제라도 손을 내밀면 즉석에서 돈을 내줬다. 일수놀이는 떼이는 돈이 많아서 이자가 높다지만, 호스티스 누나들의 경우 돈을 떼어먹고 달아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쨌든 누나들은 그렇게 날마다 간밤에 룸살롱 손님으로부터 받은 팁을 들고 본체 거실로 모여들었다. 거실에서 그날 일수를 찍고, 그 뒤 화투판을 벌였다. 판이 몇 번 돌아가면 탕수육, 잡채 등을 잔뜩 주문해놓고 그것을 먹어가며 돈을 잃어주곤 했다.

그랬다. 판돈은 대부분 주인아줌마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아줌마가 워낙 화투를 잘 치기도 했지만, 자릿세라고 해서 한 판에 얼마씩 무조건 떼어놓는 돈이 있었다. 그 돈은 모두 주인아줌마의 몫이었다. 누나들은 그런 돈을 돈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었다. 껌값 혹은 푼돈이라는 말이 그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룸살롱에서 손님 하나만 제대로 만나면 팔자가 변한다고 생각하는, 절망 같은 희망을 살고 있는 그녀들은 어쩌면 주인아줌마를 희망도 없는 불쌍한 여자라고 여기고 그렇게 날마다 푼돈을 적선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날아온 전기요금 고지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이었지만, 뭐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만한 능력이 없는 까닭에 혼자 속으로만 '나쁜 여자, 나쁜 여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기요금 고지서 한 장을 봤다. 그것을 보고 나는 그만 머리뚜껑이 열려버렸다.

당시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은 주인아줌마가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규칙에 의해 징수됐다. 세입자들은 무조건 그 규칙을 따랐다. 전등 하나에 얼마, 선풍기나 전기밥통 같은 전자제품 하나에 얼마 하는 식이었고, 수도요금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으면 많은 대로 얼마씩 추가되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누진세였다. 호스티스 누나들의 경우 '2차'니 외박이니 해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들어오는 날보다 많은데도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은 전달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주인아줌마가 세입자들로부터 걷어 들인 전기요금 총합이 가령 15만 원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주 우연히 보게 된 전기요금 고지서에 납부 금액은 10만 원이 채 안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인아줌마는 전기요금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고 있었고, 부담은커녕 거기서도 일정 부분 수익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치사한 도둑의 심리란 말인가. 잔뜩 흥분한 나는 누나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강구하자고 졸랐지만, 어이없게도 누나들은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투로 피식피식 웃어대며 "사내 녀석이 왜 그런 째째한 것에 신경을 쓰느냐"고 피식 웃었다.

졸지에 '째째한 녀석'이 된 나는 무안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랐다. 결국 '이 일은 그만 잊어버리자'라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긴 했다. 하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까지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분노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주인아줌마의 언행 일체가 모두 분노의 소재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주인아줌마에게 전기요금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어이 총각, 우리는 자네 같은 사람 아니어도 방이 없어서 못 내놓거든."

내 얘기를 다 들은 주인아줌마.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는 손을 훠이훠이 마치 새라도 쫓는 식으로 저으며 꺼지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단호한 행동에 나는 온 몸이 졸아들었다. 치욕스럽다는 느낌은 한참 뒤에 찾아왔지만, 당장에는 내 자신이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이상한 부끄러움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현장에 같이 있었던 사람은 주인아줌마가 툭하면 '군식구'라고 말해던 삼수생.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대고 있었는데, 방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려 열렸다. 그리고 그 삼수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수생과의 '거사'... 그날을 기다렸건만

"야 인마, 너 소주 마실 줄 아냐?"

내가 아무리 민법상 미성년자라곤 하지만, 이래 봬도 룸살롱 웨이터 보조다. 그런 내가 술 하나 못 마시겠는가. 결국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대낮에 술을 마시러 길음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실 '군식구'는 아니었다. 집안 청소라든가 수도꼭지가 고장났을 때, 혹은 전기에 이상이 생겼을 때 등등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일을 그가 처리하고 있었고, 주인아줌마가 시장을 가면 장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기도 하는 명실상부한 일꾼이었다. 일꾼이되 임금이 없으니 노예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는 자기 외숙모에 대해 입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꽤 심각한 수준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비로소 알았다. 그날 그는 놀라운 제안을 하나 했다.

"너 돈 필요하지? 나도 돈 필요하거든. 너나 나나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거... 이것만큼 확실하게 돈이 필요한 이유가 뭐겠냐. 응?"

그는 자기가 돈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했다. 언제 가장 많은 돈이 쌓이게 되는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그 돈을 어떻게 하면 끄집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했다. 다만 하나 문제인 것은, 사람이 최소한 두 명은 있어야 하는데 믿을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지난 두 달 동안 꼼꼼히 지켜봤다는 것. 그 결과 믿을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단다.

대낮에 순대를 안주로 술까지 얻어 마신 나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게 그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인아줌마의 외아들이 날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오는데, 무슨 직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삼양동과 장위동, 길음동, 종암동 등 미아리 일대의 복덕방을 순례하며 바둑을 둔다는 것이었다. 취미가 바둑이어서 바둑을 두는 게 아니라 매물로 나오는 무허가 '하꼬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목적으로 그렇게 바둑이 취미인 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꼬방'을 지어놓고 살다가 더욱 가난해졌거나 혹은 잘 살게 돼 그것을 팔려고 내놓으면 주인아줌마의 아들이 달려가서 1차 '감정'을 하고, 마음에 들면 자기 어머니에게 말해서 다음 날 모자가 함께 가서 2차 '감정'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 들인 무허가 건물이 벌써 몇 채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주인아줌마의 안방 장롱에는 항상 많은 돈이 쌓여 있지만, 가장 많은 돈이 쌓이는 때는 바로 새로 사 들이는 무허가 건물의 잔금을 치르는 날의 전날 밤. 게다가 그날은 돈이 장롱 속에 처박혀 있지도 않는다고 했다. 주인아줌마에게는 몇 가지 특이한 종교적인 습관이 있어서, 그날이 되면 집에 있던 자기앞수표도 모조리 빳빳한 현금으로 바꿔서 예쁜 비단보자기에 싸서 상 위에 올려놓고, 돼지머리도 큰 것으로 삶아서 올려놓는단다. 이후 촛불을 켜고, 향도 사르고, 술도 한 잔 따라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밤을 새다시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밤을 새다시피 하는 주인아줌마가 지쳐서 깜빡 잠이 들었을 때, 그러니까 한밤중을 지나 새벽 동이 터 오르기 직전에 잠긴 방문을 미리 준비한 보조열쇠로 열고 들어가서 비단보자기로 싸놓은 돈뭉치를 들고 나오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의 생각은 제법 괜찮아 보였다.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아주 간단한 일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예행연습을 시작했는데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만약에 깜빡 잠이 들었던 주인아줌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나 버리면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일단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복면을 해야 하고, 복면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주인아줌마의 얼굴을 쌀자루 같은 것으로 뒤집어씌워야 했다. 반항할 경우를 대비해서 밧줄도 준비해야 하고, 불행하게도 반항이 심하면 기절을 시켜야 하니까 망치 같은 것도 있어야 했다. 우리가 준비하고 고민하며 연습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어쨌든 우리는 틈만 나면 내 방에서 그런저런 만약의 수를 대비한 연습에 열을 올렸다. 다른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돈 보따리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세상이 온통 우리의 '거사'를 기다리며 성공을 기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랬다. 우리는 그 일을 '거사'라고 불렀다. 돈 보따리를 가져다가 결코 우리들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는 않을 것이었다. 커다란 집 한 채를 전세로 빌려서, 불쌍한 호스티스 누나들을 모두 이사시켜서 함께 사는, 그런 거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일을 어찌 작은 일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거사임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스티스 누나들 가운데 한 명이 내 방 문을 벌컥 여는 사건이 발생했다. 탕수육 먹으라고 소리쳐 불러도 답이 없길래 얘들이 뭔 짓을 하나 싶어서 열어젖힌 것으로 나중에 밝혀지긴 했지만, 어쨌든 뜻밖에 벌어진 사태 앞에서 우리는 피가 멈춰버린 듯이 우뚝 선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누나는 자기도 놀랐는지 한참동안 말문을 열지 못한 채, 복면을 썼거나 혹은 쌀자루를 뒤집어쓰고 망치와 밧줄을 들고 연습을 하고 있는 우이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가는 한마디했다.

"니들 뭐해? 연애 하냐? 그건 아닌 것 같고... 혹시라도 나쁜 짓 꾸미고 다니면 안 돼, 알았지?"

그녀의 그 한마디, 억양이 높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여자'의 평범한 말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 마디는 우리의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잘라버렸다. 갑자기 뭔가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무서워지기도 했다. 급기야는 나 자신에 대해 소름마저 끼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다음 날,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해 온 복면과 쌀자루와 밧줄을 가방에 넣어서 들고 인적이 뜸한 돌산에 갔다. 돌산 꼭대기에서 그것들을 아래로 하나씩 내던지며 우리는 주인아줌마를 실컷 욕했다. 그때 그 말이 나왔다. '벼룩의 간을 빼 먹는 이가 세상에 정말로 있었구나'라는 말이...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



태그:#샛방살이, #청춘의시기, #주인아줌마, #룸살롱, #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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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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