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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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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걸음, 참 무섭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서 391km를 왔으니 말이다. 언제 그 거리를 다 걸었을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더니 첫걸음을 떼어놓으니, 어느새 반이 훌쩍 지나고 다시 반이 지나면서 131km가 남았다. 지도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해본다. 땅끝 마을에서 참 많이 올라왔다.

9월 7일 국토대장정 14일차, 오후 5시에 오늘의 목적지인 천안시 목천읍 신계리 충청남도평생교육원 앞에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탈 없이 무사히 잘 도착한 것 같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태풍 볼라벤이 길을 막기도 했고, 엄청난 폭우를 만나 걸음이 지체되기도 했다. 발에 탈이나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채인석 화성시장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걷고 또 걸었다.

오늘(9월 7일), 어제 종착지였던 홍익대학교 조치원분교 앞에 도착한 채 시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원차량에서 내렸다. 오전 6시 50분이었다. 다리가 몹시도 불편해 보인다. 발을 살짝 끄는 것 같기도 하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이맛살을 찌푸릴 만도 한데 눈길이 마주치자 활짝 웃는다. 완전히 팬을 의식한 스타의 자세다.

오늘은 홍대 조치원분교 앞에서 7시에 출발할 예정이다. 출발시간이 어제보다 30분 늦어졌다. 오늘 걷는 거리는 26km. 목적지는 목천읍 신계리 충남평생교육원 앞. 숙소는 신계리 마을회관. 한데 채 시장과 더불어 완주 3인방으로 꼽히는 박승권 회장·한진안씨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늦을 사람들이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젯밤 숙박지인 독립기념관 야영장이 이곳 출발지에서 멀긴 멀었다. 거리상으로 거의 40km쯤 떨어져 있다. 원래 숙박예정지에서 거절을 당한 터라 잠잘 곳이 없어서 급하게 수배한 탓이다. 어제 저녁, 도착지인 홍대 조치원분교에서 야영장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서 숙박한 뒤, 오늘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기로 했던 것이다. 

오늘 걷는 거리는 26km... 목적지는 목천읍 신계리 충남평생교육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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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15분에서야 박 회장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박 회장은 별일이 아니라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젯밤 배탈이 났단다. 박 회장과 한진안씨 두 사람 다. 대체 무엇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둘만 배탈이 나서 밤새 설사했다는 것이다. 아침에 야영장을 출발한 뒤에 배에서 급하다는 긴급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화장실을 찾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했다.

슬슬 몸이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 역시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루하루 피로가 쌓이고 있어, 아침에 일어나도 상쾌하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 집의 편안한 잠자리가 그립다. 슬쩍 물어봤더니 그건 채 시장도 마찬가지란다. 그는 나보다 더 힘들 것이다. 걷고, 인근 지역 자치단체장 면담하고, 서명 받으러 내려온 화성시민들 만나야지, 밤이면 지지·응원하러 찾아온 화성시민들을 만나야지, 쉴 짬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누,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감내해야지.

박 회장과 한씨에 비해 채 시장은 야영장에서 푹 잘 잤다고 했다. 널찍한 텐트 안에서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단잠을 잤단다. 야영준비를 철저히 한 사람은 그럭저럭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정원규씨다. 텐트를 준비해온 원규씨는 어젯밤에 굳이 야영장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야영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행과 함께 모텔을 찾아 청주시까지 진출해야 했다. 원규씨는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텐트를 치고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잔 것이다.

불편할 것 같아 만류했지만 본인이 자겠다는 데야 어쩌겠나. 안녕히 주무세요, 하면서 그를 남겨둘 수밖에. 원규씨는 어젯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야영장에서 잔 보람을 톡톡히 건졌다고나 할까. 침낭도 없으면서 텐트는 왜 치나? 침낭이 있던 사람들도 텐트에서 자다가 너무 추워서 지원차량으로 들어가서 잤다는데 말이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야영장의 기온은 뚝 떨어졌다.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기 시작한 원규씨. 가져온 옷이란 옷은 죄다 껴입었단다. 신발까지 신었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불 한 장을 둘둘 만 채 오들오들 떨면서 보내는 밤, 쉬이 잠이 올 리가 없을뿐더러 무지무지 길었으리라. 나 역시 몇 년 전에 그렇게 추운 밤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아침체조를 하면서 근육을 풀어주는 채인석 화성시장과 박승권 회장
 아침체조를 하면서 근육을 풀어주는 채인석 화성시장과 박승권 회장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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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준비체조에 참여한 사람은 6명. 예정시간보다 35분 늦게 출발했다. 서늘한 한기가 홍대 조치원분교 주차장을 감돌고 있었다. 바람막이를 입고도 쌀쌀한 기운이 한껏 느껴질 정도였다. 9월은 확실히 가을이구나, 싶었다.

조치원에서 천안으로 가는 국도는 이제 더 이상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연출하지 않았다. 확실히 남도 지방보다 마을에 집들이 많았고, 도로도 붐비고 있었다. 대형 트럭이 2차선 도로를 힘차게 달려갔고, 낡은 버스가 털털거리면서 지나갔다. 논에서 벼들은 점점 익어서 고개를 숙였고, 멀리 보이는 산은 옅은 안개에 살짝 가려져 있었다.

산안개를 보면서 비로소 흐린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길이 도로를 따라 이어지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길. 땡땡거리는 종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철도 건널목이다. 기차가 요란한 금속성 여운을 남기면서 달려가고, 화물기차 역시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남기면서 멀리 사라져 간다.

길 위에 서야 세상의 사물을 찬찬히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사무실에 갇혀 있으면, 일에 매몰되어 있으면 세상의 사소한 모습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담는다.

채 시장이 걷는 속도가 확실히 늦춰졌다. 시속 4~4.5km 정도로 가늠된다. 하지만 이 속도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당연하지. 길 위에 오래 머물러 조금씩 지쳐가는 상황이니 발에는 물집이, 근육에는 근육통이 훈장처럼 남겨지는 중이 아닌가.

성무용 천안시장과 채인석 화성시장
 성무용 천안시장과 채인석 화성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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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0분, 채 시장은 걸음을 멈췄다. 오전 10시 30분에 성무용 천안시장 면담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지원차량으로 천안시청으로 이동한 채 시장. 차에서 내리는 채 시장의 다리가 묵직해 보인다.

성무용 천안시장은 채 시장의 자연사 박물관 유치 관련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자치단체에 권한이 너무 없어서 문제"라며 동감을 나타냈다. 성 시장은 채 시장에게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건넸고, 흔쾌히 서명록에 서명했다.

채 시장은 "단체장은 자기 시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한다고 믿는다"며 "자치단체장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 걷기로 결심했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오늘은 천안역에서 화성시 병점2동과 진안동 주민들이 화성시 3개 현안에 대한 지지 서명을 받는다고 했다. 채 시장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성 시장과 면담이 끝나자마자 천안역으로 달려갔다.

오후 2시, 채 시장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점심식사를 하고 잠깐 눈을 붙이면서 쉬는 시간은 세상의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쉬다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힘들다. 바람이 선선해졌다고는 하나 한낮의 열기는 아직 위력을 잃지 않았다. 오후에 걸어야할 거리는 14km. 아직도 그렇게 남았다고? 힘내자, 기운 내자. 아자아자, 파이팅!

오후에 걸어야할 거리는 14km... 아직도 그렇게 남았다고? 힘내자

정말 힘들다... 배가 아프다고 엎드린 한진안씨.
 정말 힘들다... 배가 아프다고 엎드린 한진안씨.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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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3인방 중 한 사람인 한진안씨의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어젯밤 배탈 후유증이 영향을 많이 미친 모양이다. 몸살기운도 있단다. 얼굴이 창백하다. 그래도 한씨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지금까지 걸은 게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5시가 임박해서 남은 거리를 전부 걸은 채 시장 일행은 신계리 충청남도평생교육원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한씨는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다. 하지만 충남평생교육원 주차장 앞에 도착해서 그대로 배를 깔고 엎드렸다. 창백한 얼굴빛. 계속 대장정을 할 수 있겠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채 시장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양말부터 벗었다. 그의 초인적인 의지를 물집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발뒤꿈치에만 잡혔던 물집이 이제는 발가락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 만해도 약간 불편하다는 느낌뿐이었는데 발가락에 잡힌 물집은 탱탱 불어 있었다. 이게 한쪽 발에만 잡히면 다행인데, 양발에 다 잡혔다.

물집이 잡힌 발가락을 보여주는 채인석 시장
 물집이 잡힌 발가락을 보여주는 채인석 시장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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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는 그래도 참을만한데, 쉬었다가 다시 걸으려면 죽음입니다.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파요."

채 시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어지간하면 참을만하다고 할 텐데 정말 아픈가 보다.

채 시장은 아프다고 인상을 쓰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다. 기록으로 남겨야지. 아쉬운 건, 사진에는 흉물스럽게 잡힌 물집만이 드러날 뿐 고통이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


태그:#채인석, #국토대장정, #화성시장, #성무용, #자연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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