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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새누리당 대선후보 대구경북 합동연설회가 열린 김천 실내체육관. 박근혜 후보의 연설을 지켜보는 이들로 관중석이 꽉 차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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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대선을 앞두고 5.16이 돌연 논쟁거리로 떠올랐습니다. 논란의 요지는 5.16이 '혁명'이냐, 아니면 '쿠데타'냐는 것입니다. 논란을 촉발시킨 사람은 5.16 주동자 박정희 소장의 딸이자 현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박근혜 의원.

박 의원은 지난달 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아버지로선 불가피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그 후 나라 발전이나 오늘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초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버지가) 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판단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박 의원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5.16을 쿠데타로 규정한 역사적 평가를 뒤엎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권과 역사학계에서 거센 비판이 제기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5.16이 대선 정국의 핫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최근 잇따라 세상을 떠난 전직 장성 두 사람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 3일 미국서 타계한 장도영 장군과 지난 4월 29일 서울서 타계한 이한림 장군이 그들입니다.

박정희-장도영-이한림, 엇갈린 세 군인의 길

두 사람은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군영) 출신으로 창군(創軍)의 일원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습니다. 장도영은 5.16 당시 이른바 '혁명군'의 우두머리를 지냈으며, 이한림은 이들과는 정반대 편에 서서 이들의 진압을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정반대로 엇갈렸습니다. 장도영은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쫓겨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현지에서 생을 마쳤고, 반면 이한림은 박 정권 시절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박정희와 먼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이한림이었습니다. 1939년 가을, 당시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는 돌연 만주군관학교 입교시험을 치러 만주행에 올랐습니다. 문경에서 출발한 박정희는 봉천(심양)-신경(장춘)-길림을 지나 흑룡강성 목단강시(市)에서 시험을 쳤고, 이한림은 봉천에서 시험을 쳤습니다.

입학성적은 박정희는 15등, 이한림은 20등. 이들은 이듬해 4월 4일 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는데 예과 2년을 마치고 나란히 일본육사로 본과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만주군 장교로 임관한 두 사람은 해방 때까지 중국에서 근무하였으며, 이같은 전력으로 두 사람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장도영도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습니다만,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일본 동양대학 사학과 졸업 후 귀국해 있던 그는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군에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후 세 사람은 모두 군인의 길로 다시 들어섰습니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군복을 입은 사람은 이한림이었습니다. 해방되던 해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군영) 제1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3개월 과정을 거쳐 이듬해 2월 26일 임관하였습니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장도영은 일제 패망 후 고향(평북 선천)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발생한 후 공산주의 정권의 반공인사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그 무렵 미 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던 이응준으로부터 군영 입교 권유를 받은 장도영은 1946년 2월 군영에 입교하였으며, 그해 3월 졸업과 함께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했습니다.

박정희는 장도영이 한국군 장교로 임관한 지 7개월이 지난 1946년 9월 24일 군문에 들어섰습니다. 그것도 '군영'이 아닌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의 2기생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이처럼 늦은 데는 중국에서 귀국이 늦어졌기 때문인데요, 박정희는 해방 이듬해 5월 6일 미군 LST를 타고 중국 천진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했습니다.

 이한림과 장도영이 졸업한 군사영어학교의 당시 모습. 이 학교는 미 군정청이 통역요원과 임시 장교양성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현재는 감리교신학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한림과 장도영이 졸업한 군사영어학교의 당시 모습. 이 학교는 미 군정청이 통역요원과 임시 장교양성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현재는 감리교신학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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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근처에 있던 만주군 보병8단에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북경으로 나와 그곳에서 김학규 지대장이 지휘하던 광복군 3지대에 잠시 몸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박정희를 '광복군 출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는 이미 해방이 된 뒤였으며, 또 이 부대는 '해방 후 광복군'이어서 항일운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귀국 후 고향(경북 구미)에서 4개월여 소일하던 그는 매형이 농토를 처분해 마련해준 여비로 서울로 올라와 사관학교로 들어갔습니다.

세 사람 가운데 나이는 박정희(1917년생)-이한림(1921년생)-장도영(1923년생) 순이었으나 한국군에서의 계급은 그 반대였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전후를 기준으로 볼 때 장도영은 육군 정보국장을 마치고 그해 10월 9사단장, 6사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한림은 장도영보다는 진급이 늦었는데 1948년부터 1년간 한국군 최초의 도미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1950년 7월 한 달여 2사단장으로 역임한 후 대구지구 사령관, 육본 정보국장, 국방부 정훈국장 등을 거쳐 1953년 2월 9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박정희는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후 좌익에 연루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장도영,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는데 전쟁 발발 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하였습니다. 박정희는 근혜가 태어난(1952년) 그 이듬해 11월 준장으로 진급해 비로소 별을 달았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난 때는 1961년 5.16이었습니다. 5.16 당시 세 사람의 보직과 계급을 살펴보면, 먼저 박정희는 대구 2군사령부 부사령관(육군 소장), 이한림은 제1군사령관(육군 중장),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육군 중장)이었습니다. 당시 장도영과 이한림은 육군의 주요 지휘관이었으나 박정희는 한직이었는데 거기엔 그럴만한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1957년 육군대학 졸업 후 좌익전력으로 인해 어렵게 소장으로 진급한 박정희는 7사단장(57년), 6관구사령관(59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60년)을 역임했습니다.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한 후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일본육사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를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장 총리는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과 이 건을 상의하였는데 매그루더는 육본으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당시 김형일 육본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박정희는 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좌천)되었습니다. 

5.16쿠데타 직후 <5.16 군사혁명사> 편찬 실무 간사였던 이낙선(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비서관, 전 상공부장관)이 채록한 증언자료에 따르면, 박정희가 쿠데타를 구상한 최초의 시기는 1960년 1월, 즉 그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해 1월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인 김동하 해병대 소장(포항 주둔 해병 제1상륙 사단장)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민심 수습'을 논의하였으며, 2월에는 동래 온천장 별관 등에서 이주일 소장(당시 2군사령부 참모장) 등과 처음으로 '혁명'을 모의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병력은 김동하가 해병사단(포항)을, 이주일이 2군사령부 산하 각 부대를, 홍종철 대령(6군단 작전참모)이 33고사포 대대(인천)를 동원해 부산과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 거사일을 1960년 5월 8일로 잡았습니다. 이날은 참모총장 송요찬이 방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거사 한 달가량 앞서 4월 19일 학생혁명(4.19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4.19 일주일 뒤인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한 지 며칠 뒤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생이자 당시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황용주를 만난 자리에서 "아이고, 학생놈들 때문에 다 글렀다!"며 1차 거사 실패를 애통해 했습니다.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던 이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2차 거사를 도모하였는데 거사일은 1961년 4월 19일로 잡았습니다. 이날은 '4.19혁명' 1주년이 되는 날로 이를 기념해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면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동원해 정부를 전복시킬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상과 달리 당일 별다른 집회 없이 조용히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 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 '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 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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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박정희 일파는 결국 주체적으로 거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제3차 거사일을 5월 16일로 잡았습니다. 드디어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소장은 김동하·박임항·김윤근·이주일 등 만군(滿軍) 인맥과 김재춘 등 육사 5기생, 김종필 등 8기생들이 주도하는 3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넜습니다.

별 충돌없이 시내로 진입해 주요 관공서와 언론사를 장악한 쿠데타군은 곧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한 후 '혁명공약' 6개항을 발표했습니다. 초기에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과 이한림 1군사령관의 진압설로 잠시 난관에 부딪혔으나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사가 성공하자 박정희는 육참총장이던 장도영을 의장으로 추대해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부의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습니다.

쿠데타 묵인 대가로 군정 얼굴 마담...'반혁명' 죄명 쓰고 쫓겨나

5.16쿠데타 당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61년 2월 취임)은 민주당 정권의 군부 요인이자 육군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도영은 민주당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 세력을 비호하고 오히려 군정(軍政)의 얼굴마담 노릇까지 하게 됐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우선 장도영은 5.16 이전부터 박정희 일파의 쿠데타 음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쿠데타 구상 단계에서 박정희는 2군사령관으로 있던 장도영을 포섭하기로 하고 여러 번 상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장도영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뜻밖의 4.19혁명으로 인해 1차 거사가 실패하자 박정희는 "장도영 중장만 동의했어도 학생들보다 빨리 거사를 했을 텐데 장 중장이 협조하지 않아 시일을 끌다가 그만 학생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고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박정희 일파는 장도영을 제쳐둔 채 '거사'를 준비하였고, '5.16'이 뜻밖에 성공하자 자신들의 후견인 겸  얼굴마담 노릇을 해 줄만한 사람으로 찾은 것이 바로 장도영이었습니다. 쿠데타 일주일 전인 5월 9일 장면 총리가 장도영을 불러 "박정희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찌 된 것이냐"고 묻자 장도영은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를 두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비호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합니다.

후일 장도영은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야 알았고,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 보고로 (저지에) 실패했다"며 쿠데타 동조설을 부인했습니다. 또 쿠데타 진압에 나서지 않은 것을 두고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란군과 진압군 간에 아군(我軍)끼리의 유혈(流血)은 막아야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군인답지 못한 변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장도영은 본인이 밝힌대로 5.16 전날 밤 영등포 소재 6관구에서 모종의 '거사'가 도모되고 있고, 또 그 우두머리는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고도 박정희 체포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장도영이 신당동 박정희 자택으로 급파된 506부대장 이회영 대령에게 "즉시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라"는 명령 한 마디만 내렸더라면 5.16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박정희는 장도영이 자신들의 거사를 묵인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며 한동안은 '동지'로 봐도 되겠다고 본 것이죠. 결국 박정희는 실권은 본인이 다 쥐고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자리를 비롯해 내각수반,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껍데기 벼슬을 장도영에게 안겨주는 것으로 보답(?)했습니다. 그러자 '혁명주체'들 가운데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것은 자신들인데 정작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장도영이 벼슬자리를 독차지하였으니 불만이 생겨날 법도 했습니다.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장도영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수의 차림으로 눈을 감은 채 검찰 측의 사형 구형을 듣고 있다.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장도영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수의 차림으로 눈을 감은 채 검찰 측의 사형 구형을 듣고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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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최고회의는 임시헌법격인 '비상조치법'을 통과시켰는데 그 속에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안 장도영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참이냐"며 노발대발 했지만 상황은 이미 물 건너 간 뒤였습니다.

새 육참총장에 김종오 장군, 국방장관에 송요찬 장군이 임명되면서 장도영은 군 지휘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6월 8일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최고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는 한 달 뒤 7월 3일에는 내각수반직마저 사임하게 됐습니다. 장도영의 몰락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사냥이 끝난 사냥개'를 처리할 계획을 준비 중이었는데 마침 장도영 측이 오해를 살만한 일이 하나 터졌습니다. 이 일은 결국 '장도영 등 반혁명사건'으로 이어졌고 장도영은 마침내 미국 망명(유학)길에 오르게 됐습니다.

당시 군부 내에는 출신지별로 정일권의 함경도 인맥, 장도영의 평안도 인맥, 그리고 박정희 중심의 영남인맥이 파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5.16 주체세력' 가운데는 지역적 연고에다 박정희-김종필 라인에 불만을 갖고 장도영을 따르는 사람도 몇 있었습니다. 육사 5기생 박치옥과 문재준과 송찬호, 김제민 최고위원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박정희를 제거하고 '혁명정부'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장도영 등 44명과 7월 3일에 체포되었습니다.

장도영은 이듬해(1962년) 1월 10일 혁명재판소 제1심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5월 2일 박정희 의장의 형 면제 조치로 다른 연루자들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이로써 박정희는 서북(평안도, 황해도) 출신과 5기생 반대파들을 대거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그 얼마 뒤에 있은 함경도 출신의 만군인맥 제거작전, 일명 '알래스카 토벌작전'과 함께 박 정권 초기의 반대파 제거 양대작전으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장도영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는 2001년에 펴낸 자전적 회고록 <망향> 출판기념회에서 '반혁명사건'에 대해 "나의 조속한 민정 복귀 방침과 그들(박정희를 포함한 주체세력)의 장기집권 획책 간의 충돌이 결국 '장도영 반혁명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만들었다"며 "반혁명 사건은 날조된 연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1963년 망명성 유학길에 오른 그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위스콘신 대학교와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은퇴 후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노후를 보내다가 수 년 전부터 파킨슨씨병 등으로 자택에서 요양 중 지난 8월 3일 향년 89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5.16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5.16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또 초기 얼굴마담을 하며 박 정권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던 그는 결국 '토사구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사정권 동참 거부하다가 박정희와 극적 화해... 이후부터 승승장구

이제 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5.16 쿠데타군 진압을 주장했던 이한림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5.16 당일 새벽 3시, 제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은 관사에서 채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한 통의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가 취해있었던 것은 바로 전날 5월 15일이 제1군, 즉 제1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어서 장면 총리 이하 군 고위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 모임을 가진 탓이었습니다.

전화의 요지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한림은 즉각 휘하의 임부택 1군단장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습니다. 그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만 내려오면 즉각 출동할 태세였습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친한 사이였지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 입장이었던 이한림은 쿠데타군은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16 쿠데타 당시 진압을 주장했던 이한림 제1군사령관의 당시 모습(육군 중장).
 5.16 쿠데타 당시 진압을 주장했던 이한림 제1군사령관의 당시 모습(육군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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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면 총리는 쿠데타 보고를 받자마자 수녀원으로 몸을 숨겼고, 현석호 국방장관은 연락이 닿질 않았으며, 장도영 육참총장은 쿠데타군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한림이 지휘하던 제1야전군은 한국군 내 최강의 병력이어서 출동만 하면 쿠데타군 진압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튿날에야 윤보선 대통령의 특사가 윤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1군사령부에 도착했는데 친서의 내용은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쿠데타군 진압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뒤이어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급히 이한림에게 날아 왔는데 정작 그는 쿠데타군 진압을 주장했습니다. 이한림 사령관은 당혹스런 한 나절을 보내고는 그날 오후 국기 하강식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쿠데타군 진압을 제대로 시도하지도 못했지만 이한림은 '반혁명죄'로 체포돼 그해 8월 24일 강제 예편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 헌병사령부와 교도소를 전전하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추방돼 한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감금생활을 했으며 박정희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한동안 군사정권 동참을 거부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권고로 박정희와 극적인 화해를 한 후 1963년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을 시작으로 진해화학 사장(68년), 건설부장관(69년), 관광공사 사장(72년), 터키·호주 대사(1974~80년) 등을 지냈습니다. 10.26사건 직후 대사직을 사임한 후에는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언론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하다가 지난 4월 29일 91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장도영에 이어 또 한 사람의 '5.16 산증인'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한림과 박정희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 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 이한림과 박정희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 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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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맺기 전에 첫머리로 잠시 돌아가볼까 합니다. 박정희 소장의 딸 박근혜 의원은 부친이 주도한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장도영-이한림 두 사람의 5.16 당시 입장을 보면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장도영은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야 알았고,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 보고로 (저지에) 실패했다"며 이를 분명히 '쿠데타'로 인식했습니다.

이한림은 장도영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그는 당일 새벽 친구인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찬탈한 사실을 보고받고는 즉시 휘하 부대에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한림은 상부의 누군가로부터 출동명령을 지시받았더라면 출동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한림 역시 박정희 일파의 군 병력 불법 출동을 쿠데타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특정 정치권력이나 역사학자의 궤변으로도 역사는 바꿀 수 없습니다. 역사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fact)'로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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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