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패션왕>에서 강영걸 역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을 지난 5월 31일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SBS <패션왕>에서 강영걸 역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을 지난 5월 31일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Star-K Entertainment


누군가는 <패션왕>의 강영걸을 답이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명색이 남자 주인공인데, 양아치처럼 건들건들하고 욕망과 치기만을 동력으로 살아가다가,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총에 속되게 '뒈진다'. 그래서 '패션왕'이라는 호기로운 수식에 그 불온한 존재를 허락할 수 없었던 시청자들이 있을지언정, 정작 배우 유아인은 그가 '세속적이고 찌질해서' 좋았단다.

이야기 안의 강영걸은 욕망을 쫓다 제자리를 맴돌았지만, 유아인은 배우로서 새로운 인물을 경험했다. 이제껏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웠던 '멋있지 않은 남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연기 스타일을 고집해 온 유아인에게 영걸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산을 가장 많이 한 캐릭터였다고.

"이제훈(정재혁 역) 형이 공부를 많이 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배우였기 때문에 나는 형이 갖고 있는 것과 자연스럽게 주고받기만 하면 됐어요. 워낙 연기하는 스타일이 다른 두 배우가 각자의 색깔로 다른 걸 보여주는 점에서 시너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훈이 형이 좀 더 정답에 근접한 연기를 한다면, 저는 정답이 없는 연기를 하죠. 평가하는 사람도 애매한.(웃음) 저는 100점짜리 연기를 향해서 10점, 20점 조금씩 올라가는 것보다, 50점-100점-50점을 반복하는 게 더 재밌어요."

"희망보다 중요한 건, 화가 나서 바꾸고 싶어지는 것"

- 개인적으로는 100점 짜리 연기는 영걸이 가영에게 "너랑 나랑은 끝까지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면서 눈물을 보인 장면이었어요. 영걸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기자 주- 유아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50점, 100점 짜리 연기에 대해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라며 답하지 않았다)

"원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어요. 독한 영걸이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약한 모습을 보인 지점들이 있죠. 의도한 건 아닌데, 연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더 정확한 연기는 서운함의 눈물보다 배신감이었어요.

자꾸 정확함에 대해 신경 쓰게 돼요. 감정적, 즉흥적, 순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추구해왔는데, 예전에는 과녁이 없이 그냥 던졌다면 지금은 과녁을 두고 던지는 느낌이에요. 영걸이는 계산을 가장 많이 한 캐릭터인데, 대사에 대한 계산이라기보다 감정의 크기나 감정이 비롯돼 향하는 곳을 정확하게 인지한 채로 연기해야겠다는 계산이죠."

- 흔히 작가들의 전작 <발리에서 생긴 일>의 답습이라고 하는 <패션왕>과 그 안의 강영걸이 어떤 면에서 새로웠나요?
"<패션왕>의 인물들은 옹졸하고 치졸하게, 돈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지만, 그 욕망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비난을 해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돈 벌겠다고 하는 짓이면서 정직하게 돈 버는 사람까지 매도하는 일은 쉽잖아요. 아이러니예요. 어쩌면 시청자들은 그 욕망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걸 불편해했을 것 같아요.

그냥 멋있는 것만 보고 싶어해요. 대리만족, 그게 답답한 거야. 드라마가 희망을 얘기할 필요는 있지만, 불편한 걸 덮고 위로하는 게 진짜 현실에 도움이 되나? 킬링타임 이상의 무엇이 있나? <성균관 스캔들> 때 바랐던 것도 그런 거예요. 이 아이들이 좌절하고, 현실의 벽 앞에 무릎 꿇고, 비리를 일삼는 어른들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이요.

그게 오히려 말도 안 되게 어른들을 이기고,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얘기가 아닌가? 화나고, 그래서 변화하고 싶고, 바꾸고 싶어져야죠. 드라마의 무조건적인 희망은 거짓희망으로 현실을 덮을 뿐이에요. 그래서 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실을 계속 건드리고 싶어요."

 SBS <패션왕>에서 강영걸 역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을 지난 5월 31일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SBS <패션왕>에서 강영걸 역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을 지난 5월 31일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Star-K Entertainment


배우 유아인, 진보에 대해 입을 열다

- (트위터에서 종종 진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지금 말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까발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걸 진보라고 생각하나요?
"진보는 '더 나은 것'이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는 대단한 정치 성향이라기보다, 내 삶의 방식이에요. 다만, 진보적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보 정치를 더 비판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완벽한 존재라고 건방을 떨 수 있을까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 여기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는 게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어.

세상엔 드라마도 한 편만 있는 게 아니고, 사람도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다 똑같은 얘기, 똑같은 방향이 아니고, 다른 것들이 존재 가치를 갖고 합쳐졌을 때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게 아닌가? 진보든 보수든 그렇게 균형감 있게 갔으면 좋겠어요. 이념들이 대립하고, 섞이고, 깨져서 다양함이 공존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생각, 이념, 방향,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획일화는 아주 공포스러워요."

- 연기 경력이 벌써 10년 정도 됐는데, 처음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고 지금은 달라졌나요?
"별 마음 없었어요. 유명해지고 싶고, 돈 좀 벌고 싶었죠. 지금도 그래요."(웃음)

- 그게 동력의 다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한참 침묵한 후)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전에 관심을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존재죠. 그런 것들이 창작, 성숙한 매체들과 맞닿고 경력이 쌓이면서 세련되어 가는 과정일 뿐이지 근본적인 마음은 같아요. 대단한 어떤 누구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숨기면서 살았어요. 내가 대단한 예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차피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하는 사람인 이상, 점점 포장하는 방법을 알게 된 거죠.

그래도 외로운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제가 글을 쓰는데, 처음에는 '외롭다'고 썼다가 더 주목 받고 싶어서 자꾸 다른 말로 꼬았어요. 나중에야 그냥 '외롭다'고 말했던 내가 가장 순수했다는 걸 알았죠. 내 필력이 더 좋아지더라도, 결국 외롭다는 말밖에 쓸 수 없었던 내가 가장 순수했다고 생각하게 된 시기가 있었어요. 그 후로는 그런 솔직한 마음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요. 당신도 그렇고, 모두가 그렇다는 걸 아니까."

유아인 패션왕 강영걸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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