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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고향 선산 벌초 때 찍은 사진. 웬일로 어머니께서 동행하셨다.
 지난해 고향 선산 벌초 때 찍은 사진. 웬일로 어머니께서 동행하셨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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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리따운 처녀가 걸어서 시간 반이면 오갈 수 있는 이웃마을로 가마 대신에 군용트럭을 타고 시집을 왔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는 호형호제하는 친구사이였다. 시집온 날 처음 본 신랑 얼굴은 그래도 밉상은 아니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더라만, 시어미 '낯짝'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인물값 한다고 시어미의 시집살이가 시집온 이튿날부터 시작되는데 재너머 친정엄마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단다. 누구 얘기인가하니 바로 나의 어머니 얘기다.

그래도 종갓집에 시집을 왔으니, 남들 보란 듯이 시집온 그 이듬해 종손을 낳아서 시어미 품에 안겨놓았다. 손자라도 안겨놓으면 고초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 덜할까 싶었더니 웬걸? 더 기가 살아서 펄펄 뛰더란다. 그리고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장손자랍시고 품에 끼고 사는데 그 자식이 젖 뗄 때까지 젖 먹일 때만 품에 안아봤다니 말은 해 무엇하랴.

인물만 멀쩡했지 무뚝뚝하기만 한 신랑은 꿀 먹은 벙어리고, 그나마 시아버지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는데…, 새벽에 소 꼴 베러 나갔다 오시며 들판에서 따온 개구리참외며 주둥이 뻘겋게 벌린 석류를 시어미 몰래 앞치마 속에 넣어주더란다.

"오라질 년, 친정 다녀오랬더니 자고 와?"

시집온 지 삼 년이 지나고 둘째아들을 낳으니, 종갓집에 귀한 손 낳아놓는다고 일가들은 칭찬이 자자하건만 시어머니는 "아들은 잘 낳는구먼!" 딱 한마디 하시더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란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어머니에게는 밥상머리에 마주앉기조차 싫은 시어머니지만 나에게는 어머니보다 더 좋은 할머니셨다. 할머니께서 큰아들과 큰손자 이외는 아예 사람취급도 안 했으니 둘째 아들과 둘째 손자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그런 여분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께서 둘째 손자를 안겨줬다고 상으로 시집온 지 4년 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걸어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친정을 4년 만에 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어머니를 태워 친정에 모셔다 드리고 왔는데, 이튿날 오후가 되자 할머니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지신다. 호롱불 밑에 저녁밥상을 받아놓고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오라질 년이 어미 얼굴 봤으면 얼른 올 것이지…." 역정이 대단하시다.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결국 그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모시러 갔는데, 저녁 짓는 연기가 나도록 안 오신다.

밥을 먹고 할머니 젖을 꼭 움켜쥐고 누웠는데 저 멀리 콩밭에서 들릴 듯 말 듯, 한이 뒤섞인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할머니의 일갈. "어떤 년이 시어미 등쌀에 쫓겨났나? 밤에 청승맞게 웬 곡소리야? 집안 말아먹을 년 같으니."

콩밭두렁에 앉아 밤이슬을 맞아가며 청승맞게 아리랑을 부르던, 할머니의 말씀대로 '집안 말아먹을 오라질 년'이 내 어머니인 줄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밤하늘만 바라보며 쓰다 달다 암말 없이 담배만 피워대더란다. 콩밭의 차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내 설움에 겨워 아리랑을 부르는데 나중에는 밤이슬에 젖었던 차돌멩이가 따듯해지더란다. 뻐끔뻐끔 담배만 피우던 아버지가 이제 그만 가자며 자전거를 어머니 앞에 대 놓기에 따듯해진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더니 아버지가 "억"하고 소리 한 번 지르고 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베고 주무셨던 베개가 뻘겋게 물이 들어 있더란다.

큰아들에게 부메랑 돼 날아온 '어머니의 시집살이 한'

척추수술과 인공관절을 넣으신 뒤로 부쩍 늙으신 어머니의 뒷 모습.
 척추수술과 인공관절을 넣으신 뒤로 부쩍 늙으신 어머니의 뒷 모습.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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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 보니 어머니의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이러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을 가릴 법도 하건만 죄송스럽게도 나는 아니다. 어머니의 시어머니에 대한 포한이 나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유년시절 장손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품을 벗어나지 못했고 어머니 품에는 안겨본 기억도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주검에 대한 공포와 할머니를 잃었다는 충격으로 거의 일 년 동안을 병원을 들락거리며 신경안정제에 의지를 했다. 이러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저 녀석이 이 다음에 어미가 죽었을 때도 저리하려나?" 하는 말씀과 함께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을 털어놓으셨다. 할머니가 어린 핏덩이를 끌어안고 안 놓아주시는 바람에 어머니께서는 오로지 젖 먹일 때만 안아보셨다며 그 서운함에 호롱불 아래서 눈물깨나 흘리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큰아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온전히 자기 몫이 될 줄 알았더니 아니더란다. 우선은 턱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장성을 하니 어릴 적의 자분자분한 재미도 없을뿐더러 스스로 돈을 벌면서부터는 일 년에 열두 번도 마다않고 고향 선산의 할머니 묘를 찾아가서 눈물을 흩뿌리다가 오는데 거의 시묘 살이 수준이더란다. 이러는 나를 보며 "저게 내 배만 빌려서 나왔지 온전한 내 자식만은 아니구나" 하며 서운함을 표시하셨다. 이렇게 어머니께 본의 아니게 죄 아닌 죄를 짓고 살았는데, 어머니께는 서운한 자식이었을지 몰라도 내가 큰아들로서 의무까지 저버리지는 않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어머니께 서운한 점이 있다.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 포도나무집 4층 건물에 4대가 십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밑의 아우들에게는 생활비 자체를 아예 안 받으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동생 부부의 통장에는 차곡차곡 돈이 쌓여만 갔고,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하건만 두 동생들의 생활비까지 충당을 하려니 항상 돈에 쪼들렸다.

그러나 아내나 나나 큰아들이니 그렇겠거니, 이게 큰아들의 몫이겠거니 하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헌데 웬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식 셋을 모두 분가시키는데 두 동생들이야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 반듯한 전세라도 얻어 분가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두 동생들의 생활비까지 대느라고 오히려 마이너스 통장만 한 개 덜렁 있었다.

적어도 어머니께서 사정을 아시니 지하방이라도 얻어주실 줄 알았다. 아니었다. 결국은 결혼패물 팔고 처가에서 몇 푼 얻어 방 두 칸짜리 지하방을 얻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던 일이 잘못되어 제법 큰돈이 필요했다. 어머니께 돈 좀 보태 주십사 말은 못하고, 포도나무집 은행에 담보 좀 넣고 보증 좀 서달라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이었다. 참으로 서운했다.

"너때문에 할머니한테 얼마나 당한 줄 알아?"

할머니산소 벌초를 마치고 당숙과 함께. 어머니에게는 나의 이런 모습도 얄미워보였을지 모르겠다.
 할머니산소 벌초를 마치고 당숙과 함께. 어머니에게는 나의 이런 모습도 얄미워보였을지 모르겠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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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아버지의 신장암수술과 어머니의 인공관절 수술, 그리고 아버지의 목 디스크수술에 이어 어머니의 척추수술까지 병원비가 거의 3000만 원을 육박했다. 당연히 큰아들인 내 몫이었다. 덕분에 그 좋아하는 오토바이까지 팔았다. 아내가 김밥집까지 다녀가며 사준 오토바이였다. 어디 그뿐이던가? 내 아무리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이 생일이라도 할머니 살아계셨을 적에는 제사음식 따로, 내 생일 음식 따로 장만을 해서 생일상을 받았건만 할머니 돌아가신 뒤로는 생일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저 미역국 한 그릇이 다였다. 참고 참다가 어머니께 물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제가 뭐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왜 아쉬울 때만 큰아들 찾는 겁니까?"
"너? 할머니 말씀대로 장손이잖아? 야 이놈아, 할머니가 왜 장손 장손 했겠냐? 그 잘난 제삿밥 얻어먹자고 그런 줄 알아? 장손대접 받고 컸으니 그 값 해 이놈아."

"아니, 그러면 할머니가 장손대접 해줬지 어머니가 장손대접 해주시었소?"
"내가 네 할머니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아직 멀었어, 이놈아."

"예? 아니 그러면, 할머니한테 당한 시집살이 장손대접 받고 자란 큰아들한테 퍼붓는 거요?"
"내가 너 때문에도 네 할머니한테 얼마나 당한 줄 알아? 네놈 개흙바닥에 엎어져 무릎이라도 까지는 날이면 나는 그 잘난 네놈 할머니가 휘두르는 부지깽이에 다리가 부러졌어 이놈아. 귀한 장손 피 봤다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머니 큰아들여요."
"너? 내 아들이기 이전에 할머니 손자여. 할머니 돌아가시고 거의 시묘 살이 하다시피 하더라?"
"아이고! 우리 어머니…."

고향집 앞의 느티나무.
 고향집 앞의 느티나무.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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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장독대 옆에 찔레꽃이 있었지요. 어머니는 파릇하고 연한 줄기를 꺾으십니다. 그리고는 껍질을 벗겨 내 조막만 한 내 손에 쥐여 주시고는 했지요. 입안에서 오물오물, 이처럼 달콤하고 파릇한 맛은 처음이었어요.

이제는 제가 당신에게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꺾어주신 달콤했던 찔레이고 싶습니다. 껍질이 벗기어져 세상에 드러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벌게져도 좋습니다. 어머니에게 달콤한 찔레줄기가 될 수만 있다면, 기어이 세상에 발가벗기어지는 찔레이기를 마다치 않겠습니다. 아무리 할머니 정이 깊기로서니 어머니에 대한 정만이야 하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제가 어머니 젖 먹고 컸어요. 할머니의 장손이기 이전에 어머니 아들입니다 제가. 이제 그만 큰아들 화로에 소당 엎어놓고 콩 볶듯이 하지 마시고 예쁘게 봐주셔요.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달아 드렸구먼! 사랑해요 어머니.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나의 어머니' 응모글입니다.



태그:#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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