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본 연인들은 아름다움이나 행복감을 느끼지만, 전방의 군인들은 '눈을 치워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사람은 같은 사건, 사물이라도 자신이 놓인 상황 또는 각자의 역사성 안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그래서 선입견, 편견 등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는데 작용하는 것들은,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작은 거울 하나가 비록 공장에서 500개, 1000개 똑같은 복제품으로 찍혀 나오는 '싸구려'일지라도 그것에 어떤 의미가 담겼다면, 더 이상 그것은 싸구려 복제품이 아닐 것이다. 노인이 손녀같은 여고생을 특별히 대하는 모습은 탐닉이나 추잡한 어떤 것도 아닌 삶의 생기이자 추억이고, 사랑일 수 있다.

이처럼 '특수성', '개인의 역사성이 담긴 편견 및 선입견'에 대해 우리는 '상식', '보편성'이라는 말로 개인들의 의미를 작은 것으로 무시하고 혹은 '잘못되었다'고 치부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을까?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천재 시인 이적요는 여고생 은교를 만나 새로운 젊음을 느끼지만, 이내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갈등한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천재 시인 이적요는 여고생 은교를 만나 새로운 젊음을 느끼지만, 이내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갈등한다. ⓒ 이상호


영화 <은교>는 사건에 대한 한 개인의 의미, 각자가 가지는 시선에 대해 설명한다.
영화는 천재시인 이적요가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적요는 70대 노인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늙음'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은교를 만난 그는 늙어버린 몸에 그녀와 같은 문신을 새기며 노쇠한 가슴에 젊음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이적요는 은교와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그녀가 알려준 '헐' 같은 요새 말도 내뱉는다. 뿐만 아니라 이적요는 육체적으로 그녀를 탐하고 관계를 맺는 상상까지 벌인다.

이렇게 이적요와 은교의 이야기는 여느 젊은이들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제자 서지우에게 이적요와 은교의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이적요의 이야기를 사랑이라 말하지 않기 때문' 이다. 이건 '흔히' 늙은이의 탐닉이고 추잡한 행동일 뿐이다.

서지우의 보편적 시각과 이적요의 특별한 행동의 갈등은 사실 스승과의 갈등을 좁히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영화는 이 갈등을 엄마에게 선물받은 은교의 거울을 흔한 복제품으로 말하고,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지우. 그리고 '연필'을 보며 슬픈 자신의 과거를 상상할 줄 아는 이적요와 엄마의 발뒤꿈치를 보고 '아픔',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은교와 대조되게 한다.

'별이 같은 별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아는데 10년이 걸린 서지우의 모습에는 한 개인이 사물에 갖는 상징성, 역사성, 현장성 등이 빠져있다. 그리고 그런 서지우는 시를 '쓰고 싶을 뿐' 쓰지 못한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여고생 은교는 시인 이적요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그와 가까워 진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여고생 은교는 시인 이적요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그와 가까워 진다. ⓒ 이상호


서지우라는 사회, 그리고 이적요라는 개인

서지우와 이적요를 통해 개인의 이상과 사회의 시선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지 답을 얻고자 애쓴다. 고민 끝에 답을 내린다 한들 그것만이 옳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더 문제인 것은 종종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기도 전에 미리 제시된 답을 받아들일 것을 권유받는데 있다.

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갖가지 구실로 회유되고 심지어 강요당하기도 한다. 그처럼 개인은 문제에 대해 답을 얻는 일에 앞서 답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는 각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일을 해야한다.

더욱이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요구가 일치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실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개인의 꿈은 늘 시대와 현실이 세워 놓은 장애물에 가로막힌다.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관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개인에게 그가 몸담은 세계는 늘 가혹하다.

그래서 세상의 시선을 보여주는 서지우가 '늙음'을 지적할 때 개인의 삶을 통해 사랑을 하고 있는 이적요는 화를 낸다. 은교와 침대에서의 해프닝, 그녀의 무릎을 베고 문신을 새긴 일, 대학로 데이트 등을 겪은 이적요의 행동은 서지우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무너진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는 한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스승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는 한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스승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 이상호


서지우에 대한 안쓰러움...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

이런 맥락에서 서지우를 통해 우리의 현실 모습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서지우의 시선을 사회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특성이다. 흔히 우리는 사회가 제시한 틀 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불안해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안에 안주하려 한다.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불나방처럼 한 점을 보고 달리고 사회의 시선에 순응한다.

'별은 별이지 그 다른 무엇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한 행복이란 '개인이 정하는 다양한 의미'가 아닌 '사회가 제시한' 어떤 것일 뿐이다.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는 자신의 가구를 옮기려는 은교에게 그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사물이란 것도 뿌리가 있어 자리를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역시 뿌리가 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가 제시한 틀 때문에 그 뿌리가 너무 쉽게 뽑혀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에 나오는 말로 글을 마무리 할까 한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덧붙이는 글 제 개인 블로그에도 같이 올립니다.
은교 박해일 김고은 김무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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