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서석원 시민기자는 가수 이름을 외우며 한글을 깨쳤고 소년기 한 때 피아노를 쳤으나 장래 아들이 배를 곯을까 염려한 어머니의 결단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며 지금은 평범한 전방위 리스너로서 만족하며 살고 있는 음악 애호가입니다. 현재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 필생의 저작을 꿈꾸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편집자말]
장사익 정규앨범 7집 <역> 재킷 이미지

▲ 장사익 정규앨범 7집 <역> 재킷 이미지 ⓒ 로엔 엔터테인먼트


목소리에도 연륜은 쌓인다. 지난 세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면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비단 얼굴에만 있지 않다는 소리다. 그래서다.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듣는 이에게 전혀 다른 노래로 다가올 수 있는 건.

하지만 불행하게도 최근 한국 대중음악은 이른바 '현역'들의 연령대가 좁고 극히 한정돼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 매몰된 나머지 저마다 '팔리는' 음악에 치중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현역'임을 강조하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노장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은 엄연히 존재한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가뭄 속 단비' 처럼 그들이 보여 주곤 하는 한방은 강력하다. 최근 정규앨범 7집 <역>(驛)을 발표한 '가객' 장사익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어떤 이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해져서 좋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한창 수험공부에 시달리던 고3 무렵이었다. 별 다른 기교 없이 시원스럽게 고음을 뽑아내고 한과 흥을 자유자재로 주조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리만족을 느낀 것일 게다.

잎사귀 하나의 슬픔, '관능'도 품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총 9곡이 실렸는데, 지금까지 그의 작업이 그래왔던 것처럼, 왕년의 히트곡을 다시 부른 곡들과 신곡을 함께 담아냈다. 신곡은 '역', '기차는 간다', '산 너머 저쪽',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네 곡이다. 국악, 트로트, 재즈,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성인 취향의 곡들로 구성됐다.

타이틀곡인 '역'은 인생을 "다시 못 올 역"에 비유한 노래다. 회한과 슬픔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이 노래의 세계관은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 시인의 그것이나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론적 세계관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오히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영화 <맨발의 청춘>의 유명한 대사가 품고 있던 숙명론적 허무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는 노랫말이 사무치도록 슬프게 느껴진다면, 그건 "한 세월 그냥 버티다 보면 덩달아 뿌리 내려 나무 될 줄 알았다"는 '잎사귀'의 백일몽 같은 '꿈'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군가는 한을 토해내는 듯한 장사익의 절창을 들으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산화해 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기차는 간다'는 자고 있던 관능을 후끈 달굴 만한 노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노래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순전히 '밤꽃'과 '기차' 같은 단어의 조합에서 오는 연상 작용 때문이기도 하고, '몸'을 언급한 육감적인 노랫말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같은 노랫말 앞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불온한 듯 농염한 사운드는 달뜬 분위기를 조성하고, 노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염을 품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 하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로 시작했을까

'산 너머 저쪽'은 현실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노래다. 노랫말은 흡사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삽입곡이었던 '오버 더 레인보우'를 연상시킨다. 고단하기만 한 '지금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에 행복이 있다고 믿고 싶은 민중의 굴뚝같은 마음에는 동양과 서양이 따로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로시가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데 반해, 화자는 "눈물만 머금고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라는 대목을 듣고 있노라면, 현실이 가혹할수록 '유토피아'를 꿈꿨던 민중의 수난사가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장사익의 목소리와 애잔한 반주가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시인 김영랑이 쓴 동명의 시를 토대로 한 곡이다. 노랫말 첫 머리에 등장하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반적인 감상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겠다. 누군가는 1980년 5월 광주를, 또 누군가는 1987년 혹은 1991년 5월 서울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절기상의 '오월'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의 '봄'을 생각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직 모란이 피지 않았다는 인식에는 차이가 없을 듯하다. 트럼펫 솔로와 코러스, 북소리 등은 장송곡 특유의 묵직한 비장함을 전달하고, 장사익의 절창은 노래라기보다 울분이 담긴 '조사'에 가까워 보인다.

낙화유수...환장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지만

'낙화유수'(원곡 : 1942년, 남인수 노래)는 꽃피는 봄날 자연에서 느낀 흥취를 담은 노래다. 환장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곡은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꽃잎의 행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고, 그 곡조를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늘어지는 듯한 장사익의 노래는 마치 끝은 보이지만 가도 가도 좀처럼 줄지 않는 언덕배기 길을 오르는 아이의 아장걸음 마냥 애간장을 녹인다.

노상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이들 중 일부는 이 곡의 속도에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겠으나, 일단 그 '느림의 미학'에 익숙해지면 십중팔구 그 속도에 맞춰 느긋해진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곡이기도 하다.

'미사의 종'(원곡 : 1952년, 나애심 노래)은 지나 버린 청춘을 돌아보며 과오를 성찰하는 노래다. 화자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과거사를 뉘우치고, 또 성가를 들으며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낸다. 노랫말은 마치 '돌아온 탕아'를 주인공으로 한 인간성 회복에 대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블루스 색이 짙은 곡 구성은 전반적으로 왕년의 히트곡 '댄서의 순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명처럼 들어간 고즈넉한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원곡 : 1965년, 곽순옥 노래)는 흔히 1980년대 한국방송 '이산 가족 찾기'의 '주제가'로 알려진 곡이다. 그 시대를 몸으로 통과해온 이들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며 그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과잉이 자연스러웠던 그 순간들을 말이다. 하지만 장사익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절절하되 절제미가 있다. 피아노와 기타 등 단출한 사운드에 실린 그의 노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분출하기보다 행여 그마저 조심스럽다는 듯 삼키고 또 삼킨다.

김수희가 가슴을 쥐어뜯게 했다면, 장사익은?

'못 있겠어요'는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김수희의 대형 히트곡을 다시 부른 곡이다. 화자는 지금은 남이 된 연인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고 또 못 잊는다고 토로하고 있는데, 그가 들려주는 이별의 정황을 보면 두 사람은 피치 못할 사연 때문에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수희가 불렀던 원곡이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신파 조'의 호소력이 강렬했다면, 장사익의 '못 있겠어요'는 블루스 리듬에 연륜을 실은 그의 목소리와 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지난 세월을 응시하며 가슴으로 우는 노신사의 마음을 정갈하게 담아냈다.

'이별의 종착역'(원곡 : 1960년, 손시향 노래)은 맞아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종착역에 도착한 남자의 울적한 심사를 담은 곡이다. 화자는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 그 어느 것도 그의 마음을 편히 잡아주지 못하는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이 곡은 7분 48초에 달하는 재즈 블루스 곡으로 만들어졌다, 장사익의 노래는 밴드 사운드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고유한 창법과 정서를 유지하면서도 재즈라는 '바다'의 무궁무진함을 즐기며 종횡무진 그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낸다. 한국적인 재즈 블루스의 장사익 식 성취라 할 만한 곡이다.

장사익의 '낙화유수', 박해일의 <은교>와도 통한다

사십 줄에 노래를 시작한 장사익도 어느덧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다. 그래서일까? 시원스럽게 곡조를 뽑아내는 그의 목청은 여전하지만, 이번 앨범에 실린 곡들은 유난히 회고의 정서가 짙고 속도감에 있어서도 느릿한 곡들이 많아 보인다. 나이 듦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호시절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도 고단한 시대의 그림자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앨범의 백미는 '느림의 미학'이 제대로 녹아든 5번 트랙 '낙화유수'다. '낙화유수'의 미학은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영화 <은교>에서 70대 노인을 연기한 박해일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 역을 한 이후 "전체적으로 느린 삶을 살게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바로 이 '느림'의 미덕일지 모른다.

세상 곳곳에서 미친 듯한 속도전이 벌어지고 있고, 거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복음'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한국 사회가 이제라도 다시 진짜 '인간답게 사는 법'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제대로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잘 보는 방법으로 지금보다 느리게 보고 듣고 먹고 사는 일 이상 좋은 것은 없어 보인다. 걷는 여행 이상으로 여행지의 속살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장사익 박해일 은교 낙화유수 김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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