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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경계인문학'이란 기존 분과학문 간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나들며 학문 간의 유기성 및 상호 소통을 강조하는 인문학이며, 탈경계 문화현상 속의 인간과 인간 경험을 체계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경계 짓기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인간과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인문학이다" -'사이 시리즈 발간에 부쳐' 몇 토막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고 낯선 것들이 익숙해지는, 그 '틈새'를 밝히는 인문학 '사이 시리즈'(그린비) 1차분 3권이 먼저 나왔다. 철학이 지니고 있는 오랜 주제인 '주체와 타자 사이'를 다룬 <여성, 타자의 은유>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를 엿보는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매체와 지각 사이'를 오가는 <매체, 지각을 흔들다>가 그 책들.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이 기획한 '사이 시리즈'는 '사이에 담겨 있는 풍요로움'을 읽어내는 걸 꿈꾼다. 이들은 "경계 안쪽의 대상에 대한 면밀한 탐구와 경계 바깥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탈경계 시대 사유를 펼친다. 시리즈 각 권은 키워드 두 개를 내세워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싹트고 어떤 것이 씨름을 하는지 꼼꼼하게 파헤친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경계들이 빠르게 해체되고 재편되는 변화의 시기를 살고 있다"며 "인문학과 타 학문, 학문과 일상,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존과 융합을 추구하는 '사이 시리즈'의 작업이 탈경계 문화현상을 새로이 성찰하고 이분법적인 사유를 극복하고 통합적인 시각을 만들어 나가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나는 너에게 누구이며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그는 스스로를 이끄는 ‘주체’이지만 그가 만나는 텍스트 속에서는 ‘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그는 스스로를 이끄는 ‘주체’이지만 그가 만나는 텍스트 속에서는 ‘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린비
"오뒷세우스는 세이렌의 바다를 지날 때, 이방인이자 도래자, 경유자였다. 공손히 자신의 위치에서 길을 청해야 마땅한 이방인이, 세이렌들을 타자로, 이방인으로, 낯선 괴물로 만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뒷세우스가 말하는 주체로서, 언어 권력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세우기 때문이다"-48쪽 몇 토막

김애령이 지은 <여성, 타자의 은유>는 한 여성 철학자가 지닌 고민이 담겨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끄는 '주체'이지만 그가 만나는 텍스트 속에서는 '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프리드리히 니체, 자크 데리다 등 '주체의 동질성'을 비판한 철학자들은 '여성'이라는 은유를 자주 사용했다. 글쓴이는 여기에서 "여성은 과연 은유로 소비될 뿐이고, 주체로 설 수는 없는가"라는 데 물음표를 던지며 이들 철학자들 텍스트를 꼬집는다.

이 책은 1장 '주체와 타자의 자리', 2장 '주체에서 타자로', 3장 '여성, 타자의 은유' 등 모두 3장에 '주체의 자리', '타자의 표상', '주체가 타자를 말할 때', '주체 중심의 동일성 철학에서 타자 중심의 차이의 철학으로', '타자의 은유', '레비나스의 경우', '니체의 경우' 등 모두 25꼭지가 나(주체)와 너(타자) 사이를 흘깃흘깃 넘보고 있다.

김애령은 머리글에서 "모든 사람은 섬"이라며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전적으로 명징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자신의 고유한 것을 타자와 완전히 공유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섬처럼 고립된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 타자와 소통하고자 열망하지만 그 열망은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는 "그러나 또한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전적으로 고립된 섬은 아니다"라며 나와 다른 사사람 '사이'에 놓인 그 '사이'를 파고든다. 왜? 사람은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지만 홀로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 아무리 혼자 살려고 몸부림을 친다 하더라도 결국 어떤 물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서 나란 사람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피해야 할 오류는 주체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일정하게 고정하는 것이다. 특별한 속성을 부여하고, 그 속성을 지닌 존재로 타자를 집단화할 때, 타자와 주체의 관계가 맥락적이고 관계적인 역학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이 위치의 역학에 대한 망각은 주체뿐 아니라 타자를 동질화하고 정체화하는, 타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철학적 사유가 피해야 할 오류를 되풀이하게 한다"-164쪽 몇 토막

이 책은 서구철학이 지닌 전통을 밑그림으로 삼아 '타자' 문제를 그린다. 나에게 너는 누구인가, 너는 왜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가, 너란 무엇인가, 너와 나 사이에 나란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위해 '타자의 철학자'로 손꼽히는 레비나스, 니체, 데리다가 지닌 철학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김애령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했으며,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은유와 서사이론에 관한 해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소수자의 언어, 다의적 표현, 이해와 해석의 문제 등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시와 그림도 그 샘물로 짓고, 그 샘물로 그린다

조윤경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를 다룬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는 장르를 가로막는 경계를 풀어헤치며 지평을 드넓힌 새로운 예술을 품는다
조윤경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텍스트와 이미지 사이’를 다룬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는 장르를 가로막는 경계를 풀어헤치며 지평을 드넓힌 새로운 예술을 품는다 ⓒ 그린비
"광고포스터 속에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함께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있는 그대로를 읽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없었던 것을 '읽을 수 있게',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일한 목표 아래에서 텍스트는 순차적인 이미지가, 이미지는 공간화 된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88쪽 몇 토막

조윤경이 지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를 다룬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는 장르를 가로막는 경계를 풀어헤치며 지평을 드넓힌 새로운 예술을 품는다. 그림 안에 단어나 문장을 넣었던 르네 마그리트, 시어들을 그림 형태로 놓은 기욤 아폴리네르, 글씨를 쓴다는 것, 그 뜻을 파헤친 피터 그리너웨이 등 여러 예술가들 작품을 선보인다.

1장 '시인의 그림과 화가의 시', 2장 '시와 삽화, 그 겹의 언어', 3장 '광고포스터와 이미지-텍스트' 4장 '영화 속 매체화된 몸과 에로스의 글쓰기', 5장 '캘리그램과 문자·시각언어 구사력', 6장 '통합적 예술 매체로서의 책' 등 25꼭지가 그것. 글쓴이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때로는 시로, 때로는 삽화로, 때로는 포스트 이미지로 드러낸다. 

조윤경은 머리글에서 "하늘과 땅 사이, 바다와 육지 사이, 나와 타자 사이, 나와 또다른 나 사이에 있는 접경지대는 이질적인 것을 연결하고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항의 장소"라며 "관념과 구체, 이성과 광기,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지대에 샘이 고인다"고 적었다.

그는 "그 샘물이 모든 생명을 적시고 키운다"라며 "그 샘물을 길어올려 사람들은 물을 마시고 밥을 짓고 빵을 만든다"고 썼다. "중간, 사이, 틈새의 장소에 서 봐야 비로소 일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성과 속을 아우르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와 그림도 그 샘물로 짓고, 그 샘물로 그리는 것 아니겠는가.  

"'필로우북'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글쓰기, 즉 종이 위의 글쓰기, 필름 위의 글쓰기, 몸 위의 글쓰기 방식은 서로 겹쳐지고 침투하면서 에로스의 글쓰기를 창출해냈다.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침해의 기쁨'은 에로티시즘의 핵심을 이룬다. 성스러움과 속됨, 관능과 폭력,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병치, 나열, 결합되는 것은 남녀의 완벽한 융합을 이루는 사랑의 행위로 상징화되었다"-115쪽 몇 토막 

이 책은 빛나는 상상력과 기발한 실험을 통해 장르 사이에 놓인 경계를 풀어헤치고, 이를 통해 예술이라는 지평을 드넓힌 '새로운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글쓴이는 '글자는 읽는 것이고 그림은 보는 것'이라는 당연한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그것을 뒤집었던, 나아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던 이들이 지닌 작품세계를 꼼꼼하게 엿본다.

조윤경(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은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 및 대학원을 마쳤으며, 프랑스 파리3대학교에서 초현실주의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펴낸 책으로는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상상력>, <초현실주의와 몸의 상상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MADE IN USA : 미국 문명에 대한 새로운 시선>, <스물한 편의 연애편지>가 있다.

사람이 매체를 만들고 매체가 사람을 만든다

천현순 <매체, 지각을 흔들다> <매체, 지각을 흔들다>는 사람들 지각을 변화시킨 매체들이 지닌 역사를 들려준다.
천현순 <매체, 지각을 흔들다><매체, 지각을 흔들다>는 사람들 지각을 변화시킨 매체들이 지닌 역사를 들려준다. ⓒ 그린비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손을 벗어나 기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객관적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였다. 기존의 회화와는 달리, 사진은 자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현실 세계에 대한 지각 및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현실은 이제 더 이상 주체의 주관적인 관점에 따라 자율적으로 해석되는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각되고 인식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129쪽 몇 토막

천현순이 지은 '매체와 지각 사이'를 이야기하는 <매체, 지각을 흔들다>는 사람들 지각을 변화시킨 매체들이 지닌 역사를 들려준다. "짧은 시에 의미가 모호한 그림을 곁들이고 제목을 단 르네상스 시대의 '엠블럼'은 상징을 시각화해 세계의 본질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1930년대 포토 저널리즘에 눈길을 머문다. "사진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1장 '엠블럼, 잠재된 세계의 시각화', 2장 '사진, 재현을 넘어 정치투쟁으로', 3장 '컴퓨터 게임, 환상성과 몰입' 등 3장에 살아 꿈틀거리는 사진처럼 실려 있는 '엠블럼,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나다', '사진, 순수예술 혹은 정치투쟁의 도구', '니벨룽겐의 반지, 오페라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등 26꼭지가 그것.

천현순은 머리말에서 "매체 기술의 발달사를 역으로 추적해 볼 때, 인간은 각 시대가 요구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러한 기술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를 만들어낸다"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매체는 다시 인간의 지각 및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고 적었다.

그는 "인간, 매체, 세계는 긴밀한 구조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는 곧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란 말처럼 사람이 매체를 만들고 매체가 사람을 만들어 지구촌을 바라보는 눈에 새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문학과 영화에서의 참여가 '텍스트'의 의미 해석을 요구로 한다면, 컴퓨터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참여는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실시간 진행되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게임의 세계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컴퓨터 게임은 몰입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는 플레이어의 지성 능력보다는 오히려 게임을 스릴 있게 즐길 수 있는 유희적 충동을 강화시킨다" -151쪽 몇 토막

이 책은 매체와 지각 사이에 놓인,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미묘한 경계를 밝히고 있다. 글쓴이는 감각기관을 통해 밖에 있는 그 어떤 사물을 받아들이는 지각과 그 지각이 미치는 우리 시대 흐름과 거듭나는 매체 속에서 어떻게 상생상극하는지 깊숙이 파고든다. 다시 말하자면 지각이 매체를 낳고 매체가 지각을 낳아 한 시대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천현순(이화인문과학원 HK 연구교수)은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마치고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상호매체성 이론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펴낸 책으로 <알렉산더 클루게에 나타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매체성:근대와 현대의 대응을 중심으로>(Intermedialitat von Text und Bild bei Alexander Kluge: Zur Korrespondenz von Fruher Neuzeit und Moderne, 독문)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물의 요정의 매혹>(공역)이 있다.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연구단은 2007년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뽑혀 '탈경계인문학'을 다지고 이를 우리 사회로 드넓힘으로써 한국 인문학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연구단이다. 이 연구단이 이끄는 '사이 시리즈'는 앞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 예술과 기술 사이, 소설과 영화 사이 등으로 계속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여성, 타자의 은유 - 주체와 타자 사이

김애령 지음, 그린비(2012)


#김애령, 조윤경, 천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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