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게임>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배틀 로얄>입니다. 강제차출 당한다는 점과 오직 한명이 남을 때까지 죽여야 한다는 설정을 보면 절로 떠오릅니다.

<배틀로얄>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승전국이라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 내에서 청소년문제를 나태와 게으름이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BR법이라는 죽음의 경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이 부조리를 통해 조직문화, 경쟁문화 나아가 극우주의를 비판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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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hunger game, May the odds be ever in your favor(해피 헝거게임, 확률의 신이 여러분 편이기를)'.

이 대사를 하는 에피(엘리자베스 뱅크스)의 모습 보면 <헝거게임>이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마가렛대처입니다. 그리고 영화 뒷부분에서 탄광촌이 폭파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는 영국 보수파를 노리고 나왔습니다.

<헝거게임>의 세계관인 판엠이라는 국가는 수도를 중심으로 12개의 디스트릭트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수도와 12개 구역의 소득격차는 심각할 정도로 벌어져 있습니다. 더 나가 수도를 12개 구역이 떠받들고 있는 구조입니다. 이를 볼 때, 12개 구역이 헝거게임에 강제차출당하는 이유였던 전쟁은 노동자 파업을 상징하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헝거게임>에 놀란 이유는, 이 영화가 <배틀로얄>보다 더 진일보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헝거게임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반자본주의적 –노동자 계층-을 자본주의에 순응하도록 만드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 헝거게임을 RSA(억압적 국가 기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헝거게임은 ISA(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입니다. TV쇼와 야합하면서 헝거게임은 대중문화로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 대중문화는 끊임없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생산해내는데 이 이데올로기가 호명을 통해 노동자계층을 주제화 시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재생산을 반복합니다.

이론적으로 경제적 층위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이 정치적 층위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이데올로기입니다. 만약 수도에서 계속해서 공권력을 투입해 탄압했다면 12개 구역은 끝까지 투쟁했을 겁니다. 하지만 헝거게임이 시작하면서 물리적 마찰이 사라졌습니다.

이 무자비한 살인게임이 확률의 신으로 둔갑합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스노우 대통령(도날드 서덜랜드)이 말하는 '희망'에 목을 맵니다. 편애가 심한 확률의 신과 잡을 수 없는 희망이라는 부조리를 망각하는 순간입니다. 영화는 헝거게임이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노동자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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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조쉬 허처슨)입장에서 보면, 그는 두 가지 갈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헝거게임에 강제차출당한 것이고, 둘은 켓스니(제니퍼 로렌스)라는 '엄친딸'을 곁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번째 불만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집니다.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실제 사람들을 글래디에이터를 바라보는 로마인의 시선이겠지만)와 화려한 쇼윈도우, 그리고 첨단 시설이 자신의 것이라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없어집니다.

두번째는 켓스니가 자신과 같은 편이 된 후에 사라집니다. 피타는 켓스니에게 열등감이 있습니다. 경쟁시스템 안에서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위기의식 속에서 피타는 TV쇼의 속성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그것은 피타, 자신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캐릭터를 만들어 냅니다.

존 닐(John Niels)의 말처럼 인간은 호모나랜스(Homonarrans)이기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소비합니다. 대표적 서바이벌 경쟁시스템인 <슈퍼스타k>가 성공했던 이유도 참가자들의 사연을 잘 살려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처럼 피타는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비운의 남자로 만들고 유망주인 켓스니와 star-crossed lovers로 묶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천부적으로 잘 쏘는 활솜씨와 사냥으로 다져진 숲속 환경에 대한 이해, 거기다가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스폰서의 도움까지 받는 켓스니를 보며 피타의 열등감은 깊어집니다.

감독은 당위성을 죽이고 개연성을 높이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켓스니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피타의 이 갈등은 그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켓스니가 같은 편이 되자고 손 내밀면서 '해소'됩니다. 마치 기득권을 향한 열등감이 그들이 내민 손을 잡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둘은 우승합니다. 그리고 영웅이 됩니다. 그리고 열차에서 켓스니는 헝거게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다고 말하지만 피타는 반대로 모두 기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피타는 이상하리만큼 만족해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 역시 헝거게임을 TV쇼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관객들 역시 피타처럼 승리감에 취합니다. 이렇게 피타는 적의 세계에 편승합니다. 아마 이것이 스노우 대통령이 말하는 '희망'일겁니다.

헝거게임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4부까지 가면 '켓스니'라는 어떤 영웅이 나타나 무너뜨리겠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헝거게임을 무너뜨린 것은 스노우 대통령입니다. 룰을 번복함으로써 게임이 갖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미디어는 경쟁시스템이 매우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포장합니다. 하지만 그 경쟁시스템 역시 어떤 존재의 수단일 뿐이고, 어떤 존재의 욕망일 뿐입니다.

또 헝거게임은 과연 실현 불가능한 쇼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헝거게임>, 심상치 않은 녀석입니다. 프랜차이즈 영화로서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니 아주 날카롭게 과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헝거게임>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헝거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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